History - 東.西洋 歷史

메주 2014. 8. 3. 01:53
역사 속'의 중국 4대 미녀와 3대 악녀
 


역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history 는 ‘그의 이야기’라는 의미를 가진다. 
시대를 움직인 역사 속의 인물들 중 대다수가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역사를 들여다보면, 여성들의 등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 역사 속의 여인들은 때로는 아름다운 미모로 권력을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때로는 잔혹한 방식으로 한 시대를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여인들의 삶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 여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이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Historia

by Nikolaos Gysis (1892)




History

(from Greek ἱστορίαhistoria, meaning "inquiry, knowledge acquired by investigation")

is the study of the past, specifically how it relates to humans.


It is an umbrella term that

relates to past events as well as 

the discovery,

collection, organization,

and presentation of information

about these events.


The term includes cosmicgeologic, and organic history,

but is often generically implied to mean human history.

Scholars who write about history are called historians.

Events occurring prior to written record are considered prehistory.


History by Frederick Dielman (1896)


영어의 역사에 해당하는 단어인 “history” ...는....

고대 그리스어의 ἱστορία(historia)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다”·“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는원시 인도유럽어 *wid-tor-에서 나온 말로,

"알다", "보다"를 뜻하는 *weid-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 어근'은 영어' wit, wise, wisdom,vision, idea,

산스크리트어 베다(veda),

슬라브어 videti, vedati 등에 남아있다.

(wid-tor-와 weid 앞에 붙은 별표는 이것이 확정된 정설이 아닌 가설에 근거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고대 그리스어 ἱστορία(historia)는 ...

“조사와 탐문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는 뜻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저서 《Περί Τά Ζωα Ιστορία

(Peri Ta Zoa Istória, 라틴어 역어: Historia Animalium)에서 사용하였다.


이 낱말은 현자(賢者), 증언자, 혹은 판관을 뜻하는 ἵστωρ(hístōr)에서 유래했다.

이 말은 호메로스의 시, 헤라클레이토스, 아테네 젊은이들의 선서,

보이오티아의 비문(법적인 의미로 "판관", "증인" 혹은 비슷한 것을 지칭하는 말이었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사하다"...는, 뜻'의 historeîn 은 이오니아 그리스어의 파생어'로서,

고전기 그리스에서 처음으로 퍼져서 나중에는 헬레니즘 문명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스어에서 이 말의 맥락은 16세기 말 프랜시스 베이컨이....

"자연사"에 대해 쓸 때도 여전히 등장한다.

 그는 historia를 "시공간에 따른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으로,

 기억에 따른 지식이라는 의미로 썼다.

(반면 과학 추론, 시는 환상에 따른 것이다)


1390년 영어에도 이 낱말이 "사건들의 연관, 이야기"를 뜻하는 말로 나타난다.

중세 영어에서 이 말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뜻했다.

그러다가 15세기 말에 이르면 "과거 사건의 기록"으로 의미가 좁아진다.


독일어, 프랑스어, 다른 게르만어나 로망스어에서도 ....

"역사(history)"와 "이야기(story)"를 의미하는 데 같은 낱말이 쓰인다.


형용사 'historical'은 1661년에, 'historic'은 1669년에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연구자"를 뜻하는 'historian'은 1531년에 등장한다.

모든 유럽 언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명사들은 용례상....

"사람에게 일어난 일"과 "과거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둘 다 의미하고 있다.


영어에서 후자의 의미로는 대문자를 써서 "History"라고 쓰거나,

"역사서술 (historiography)"라고 쓰기도 한다.


한자어 역사(歷史)는 근대 이후의 'history'에 대한 번역이며,

동아시아의 역사를 의미하는 '史(사)'는 원래는 '기록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유래하였다.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George Santayana

 Scanned by SCEhardT This is a plate from The How and Why Library



4 대 美女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주인공 서시(西施 :  Xishi )



중국의 유명한 고대 중국 사대 미녀로서 본명은 施夷光이다. 중국에서는 西子라고도 한다. 
기원전 5세기경 춘추시대 말기 월(越)나라 사람이다. 현재 저장 성 사오싱 주지 시 출신이다.
중국'의 4대 미녀 中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던 서시!

서시는 관련된 여러 가지 고사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침어( : 잠길 침,: 고기어)'이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

항상 부러움을 샀는데 하루는 강가에서 빨래하다가 

그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췄다. 

이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버리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해서 지어진 고사이다. 


현재 서시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저장 성의 제기시에는....

서시가 빨래하던 완사(浣紗)'라는 곳이....

전설하는 그곳이라면서 관광지로 지정되었다.


장자에는 효빈( : 본받을 효,  : 찡그릴 빈)의 고사가 전래하는데 ....

속 병이 있던, 서시는 이마를 찌푸리고 걸었는데 ....

이 마을의 추녀도 잔뜩 찌푸린 채 따라하다가 ....

마을 사람들이 두문불출하고 그 추녀는 외면받았다는 고사이다.



당시 오(吳)나라의7대이자 마지막 군주'였던 부차(夫差, ? ~ 기원전 473년))와

 춘추전국시대 후기의 (越)나라의 왕으로 윤상의 아들 구천(句踐, ? ~ 기원전 464년)'이 싸우던 중

구천이 패하게 되어 항복하고 부차'의 신하가 될 것을 약속한다.

하지만 구천은 치욕을 씻기 위해 뛰어난 미모를 소유한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면서 미인계를 쓰고, 부차는 서시의 미색에 빠져 국정은 돌보지 않고 정치를 태만하게 한다. 그 틈을 타 구천은 부차를 공격하여 오나라를 패망시킨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춘추 시대 (기원전 770~403)

중국의 고대 춘추 시대 제후 간 회맹(會盟)의 맹주를 춘추오패(春秋五覇)라 하는데, 

(齊) 환공, 

(晉) 문공, 

(楚)장왕, 

(吳) 합려, 

(越) 구천이 있다.



춘추시대양쯔강 하류에 서로 적대적인 ....
오()'나라와 월()'나라가 맞닿아 있었다. 
서로 적대적인데다가, 
양국의 바로 북쪽에 위치한 초나라()' 오나라()가 
자신들의 수도를 정복하고 그들을 거의 멸망시킬 뻔한 일들 등 때문에
(진나라(秦)의 지원으로 가까스로 멸망은 모면함) 
강국이 자신들의 바로 밑에 있는 것을 꺼려 
월나라더러 오나라를 치도록 사주한 덕분에 그들은 항상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월왕 구천이 병법의 대가인 손무가 오를 떠나고, 
오왕 합려가 주색에 빠진 틈을 이용해 계획을 세워 오를 공격했다. 
구천의 공격을 받고 반격해 온 오왕 합려와 세자를 죽이고 오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둘째 왕자 부차는 오왕이 되어 그날의 치욕을 갚기위하여 매일 장작더미 위에서 자며 
부하들 더러 인사 대신에 구천에게 원수 갚을 것을 각인시키도록 했다. 

그렇게 오자서 등의 도움으로 수 년간 복수를 다짐하고 부국강병을 이룬 끝에, 
오나라는 월군을 몰살시키고 월왕 구천을 생포해 오국으로 압송, 
합려의 묘지기 일을 보고 왕후와 함께 삭발시키는 등 치욕을 주고, 
월나라를 철저히 파괴하고 돌아갔다. 

그 수 년 후, 구천은 오자서가 자신의 복수 의지를 알아채고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부차의 신임을 얻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고, 
초나라를 경유해 월나라로 돌아가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후,구천은 곰의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밖으로는 부차에게 경국지색이라고도 불리는 서시를 보내고, 
온갖 진귀한 조공품이며 군대를 지원해 주는 등 진실한 신하로 보여서 20년을 기다렸다.

마침내 부차가 제나라와 초 양강을 굴복시키고...
마침 또 다른 중원의 강국 (晋)을 굴복시키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려는 틈을 타 오국을 기습, 
라오허 산에서 화공과 수전의 대승으로 오나라를 패배시켰다. 

이후 구천은 부차를 죽이고 오국을 합병하였다. 
이 고사로부터 와신상담은 
'장작에 누워 복수를 다짐하고 
곰의 쓸개를 핥으며 노력해서 고난을 이겨낸다'
.....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구천의 정부인에게 비밀리에 제거당한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주인공이자 영웅호걸들의 애간장을 녹인 장본인 서시. 아름답고 화려한 외면 속에 남모를 슬픔이 서려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미인계란 바라는 목적이 있을 때 아름다운 여인으로 하여금 상대를 유혹하게 하여 뜻하는 바를 성취하는 건데 이를 저속하게는 ‘성 상납’이라고 표현한다. 여자의 인격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단지 임무와 사명감만으로 마음에도 없는 남자를 유혹하고 때로는 몸까지 허락해야 하는 비운. 서시와 같은 인물이 오늘날에도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다.


뇌물을 주지 못해 추녀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왕소군(王昭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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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昭君图,江戸時代久隈守景绘,东京国立博物馆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선우의 처)로, 
본래... 전한의 11대 황제 - 원제(漢高宗 元帝 劉奭, 기원전 76년 ~ 기원전 33년)'의 궁녀였다. 
이름은 장(嬙, 출전은 한서)이다. 
성'을 왕, 자를 소군'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다. 
형주 남군(현재의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양귀비서시초선과 함께 고대 중국 사대 미인의 한 사람에 손꼽힌다.

전한의 원제 시대,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의 여성을 알씨(흉노의 말로 군주의 처)로 달라고 해, 
왕소군이 선택되어 그의 장남을 낳았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변방의 세력을 달래기 위해 보냈다는 설도 있다.) 

이후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자, 
당시 흉노의 관습대로 아들 복주누약제 선우의 처가 되어 둘째 딸을 낳았다. 
한족은 부친의 처첩을 아들이 물려받는 것을 꺼려하여,
이것이 왕소군의 비극으로 민간에 전승되었다. 

황량한 초원지대가 대부분이었던 흉노의 땅에서, 
왕소군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땅을 그리며 시를 남겼는데, 
그 시구 중에 "봄은 왔으나 봄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라는 구절은 ....
흉노 땅의 봄을 맞이했음에도 고향 땅의 봄같지 않아 더욱 사무치게 고향이 그립다는 ....
그녀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도 이 시구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은 그리움의 인용구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후 72세가 되던 해에 병을 얻어 돌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사람들은 그 무덤을 일컬어 소군묘(昭君墓) 혹은 청총(靑塚)이라고 부른다.

한(漢)나라의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두루 갖춘 팔방미인이다.

당시 한나라의 원제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화공에게 그리게 하여 
초상화를 보고 아름다운 궁녀를 골라 총애하였다. 
궁녀들은 자신들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화공에게 앞다투어 뇌물을 바쳤다. 
 
그러나 가난했던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못해 본인의 
외모와는 상반되는 미운 초상화가 그려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화친을 위해 북쪽 흉노왕에게 궁녀를 보내려던 원제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못생긴 왕소군을 뽑아서 보내도록 하였다. 
원제는 이별의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야 비로소 왕소군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 미모에 반하지만 어쩔 수 없이 흉노왕에게 보내고 만다. 
 
결국 그녀는 흉노왕의 아내가 되어 싸움이 빈번하던 두 나라를 
50년 이상 원만한 관계로 유지시킨다. 
 
현대 중국인들은 왕소군을 고대 영웅 중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앞서 궁녀들이 화공에게 자신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치는 모습을 보니 예나 지금이나 뇌물수수는 
가장 만연하게 행해지는 비리인 듯하다. 
 
그래서 그만큼 더 뿌리뽑기 힘든 부정행위이다.
 비록 가난했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질 못해 
오랑캐의 땅으로 보내졌지만 탁월한 국정능력을 보여주었다. 
 
어찌 보면 그녀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지도자의 양상인지도 모르겠다.


여포와 동탁의 그녀 초선(貂蟬)



초선(貂蟬)175년~199년(소설상 나이)'은....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염문을 가졌다는 정사의 기록과 ....

왕윤이 여포를 부추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연의에서 각색한 것이다.


‘초선(貂蟬)’이란 이름은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로 만든 ....

당상관 전용 관모인 초선관(貂蟬冠)을 관리하는 시녀의 관직명이다.

(한나라 관모 일람(zh) 참조.) 

동탁이 상국에 올랐기 때문에 그에따라 동탁의 초선관을 관리하는 시녀가 할당되었다.



Qu_Shisi(초선관)

미상 - 1920年上海《常熟瞿氏忠贤遗像》



초선(貂蟬)'은 비록 삼국지(三國志 : 서진의 진수'가 쓴 중국 삼국시대의 정사)'上에서는....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에 해당되는 실존인물은 있었다.


후한서(HouHan shu, 後漢書)


유수(劉秀)가 스스로 황제에 오른 25년부터 위(魏)의 조비(曹丕)가 칭제하여 ...

후한이 망한 220년까지의 후한시대의 역사를 기록했다.

현재 전하는 것은 120편 130권이다.

후한시대 역사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귀중한 문헌자료이다.

남조(南朝)의 송나라 범엽(范曄 : 398~446)이 지었다.

이 책 이전에 이미 후한의 역사를 기술한 20여 종의 다양한 사서들이 세상에 나와 있었다.

범엽은 이 책들에서 번잡함을 줄이고 모자란 것은 보충했고,

정확한 기록을 광범하게 수집하여 후한에 대한 훌륭한 사서를 만들었다.

때문에 범엽의 〈후한서〉가 나오자 다른 책들은 모두 폐기되어 전하지 않게 되었다.




정사 후한서(HouHan shu, 後漢書) 여포전(呂布傳)'에 의하면 .....

궁중에서는 초선관'이라는 관(冠)을 관리하는 시녀'가 있었는데....

이 시녀의 관직 이름이 "초선"이였다.



여포(呂布, ? ~ 198 12)'는 ....

후한 末'의 정치가 - 동탁(董卓, 139년 ~ 192년 음력 4월 23일)'의 초선관을 관리하는....

초선과 밀통을 하고 있는데 계속 밀통하다가 ....



동탁(권력의 찬탈과 폭정으로 후한(後漢)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분열시킨 장군)'이 이를 알자 ...

여포에게 수극을 던지며 둘의 연애를 반대했다고 나온다.



이를 이용하여 여포와 같은 병주 출신'이였던 왕윤(王允, 137년 ~ 192년 6월 7일)' ....

여포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결국 동탁을 죽이도록 만든다.

정사 후한서 여포전에 의하면 여포와 밀애를 한 이 동탁의 시녀는 직책이 초선이였으며,

이름이 알려진 바 없으며 왕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An illustration from a Ming dynasty printed edition of the novel from 1591, collection of thePeking University.



다만 나관중(羅貫中, 1330년? ~ 1400년중국 말 초의 인물)'은....

이 사실에 대해 삼국지연'를 집필할 때 

(三國志演義,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서기 184년 황건의 난부터 서기 280년까지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집필한중국의 대표적 고전 소설)

동탁의 시녀 대신 왕윤의 양녀'라는 설정으로 변경하고

초선이라는 관직 이름'을 이 양녀'의 개인 이름'으로 고쳐서 묘사'했다.




초선은 중국의 4대 미녀 중 유일한 가상인물'이다. 
초선은 삼국지 초기에 나오는 인물로 한(漢)나라의 대신 왕윤(王允)의 수양딸로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 
 
하루는 초선이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는데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우자 그 모습을 본 왕윤은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 수가 없네. 
달이 부끄러워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구나." 라고 말해, 
이 때부터 초선은 폐월(閉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록 양아버지였지만 초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었고, 
그녀 또한 그를 잘 따랐다. 
훗날 초선은 왕윤의 부탁을 받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의 계략을 실행에 옮긴다. 
미인계를 써서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켜 서로 질투하게 하고 
배신하게 하여 결국 여포로 하여금 섬겨야 할 주인인 동탁을 
칼로 베어 죽이게 한다. 
동탁을 죽게 만든 후 초선 또한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
 
아름다운 여자는 수명이 길지 않거나 운명이 기구하다더니 
‘미인박명’ 은 초선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비록 남들보다 일찍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누구보다 용기 있는 여인이었다. 
 
당시 동탁은 권력의 찬탈과 폭정으로 후한을 멸망시키고 
제국을 분열시키는 등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던 터였다. 
다들 동탁이 죽기만을 바라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맞서 싸우는 이는 없었다. 
 
그 찰나 초선이 개입돼 동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의 부탁이라지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한 말 ‘폭정’과 ‘ 권력찬탈의 쿠데타’를 멈추게 한 
1등 공신은 초선이 아닌가 싶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절세미인 양귀비
(Dương Quý Phi 楊貴妃, 719  756 )

에도시대 호소다 에이시가 그린 양귀비


자질풍염’미인으로 유명한 양귀비'는....

(
楊貴妃, 719년 6월 26일 ~ 756년 7월 15일
)

당 현종의 후궁이자 며느리이며,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다.


Dương Quý Phi, tranh lụa của Takaku Aigai tại bảo tàng mỹ thuật SEIKADO BUNKO


본래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수왕의 비로 
17세 때 궁에 들어왔으나 
시와 노래에 뛰어난 보기 드문 절세미인으로 
현종의 눈에 들게 되어 간택되었다. 현종이 양귀비를 무척 사랑한 나머지 그녀의 딸들도 현종의 비로 맞아들여졌고, 사촌오빠인 양국충은 재상이 되었다. 한편 돌궐족 출신인 젊은 장군 안녹산은 양귀비가 무척 예뻐하던 양자였는데, 양귀비의 득세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세를 누리게 된다. 양국충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자 안녹산을 제거하려고 하지만 이를 눈치 챈 안녹산이 ‘안사의 난’ 을 일으킨다. 이로 인해 수도가 점령당하자 현종과 황실은 피신해야만 했고, 도망가던 중 현종의 친위병들은 황실의 몰락이 양씨 일가 때문이라고 여겨 양귀비와 양국충을 처형하라고 현종에게 제기한다. 목숨과 사랑 중 목숨을 택한 현종은 결국 양귀비를 처형하는데 동의하고 양귀비는 자결 아닌 자결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현종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이기적이고 대범하지 못한 남자였다. 어찌 보면 본인이 여자의 치마폭에 싸여 정치를 소홀히 한 과실을 양귀비에 떠넘긴 비겁한 남자이기도 하다. 사실 현종은 소싯적 정치에 꽤나 소질이 있는 황제였다.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장본인이지만 양귀비에게 빠지면서부터 점점 정세가 기울게 된다. 나아가 ‘양국충’과 ‘안녹산’을 비롯해 양귀비의 일가친척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게 되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망국으로 치닫게 된다. 혈연, 학연, 지연을 중심으로 한 국가는 결국에는 망하게 되어있다. 혹시 오늘날 우리사회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등외] 몸도 마음도 가벼웠던 조비연
(Zhao Feiyan ,趙飛燕, c. 32–1 BC ) 


아쉽게 중국의 4대 미녀'에서 탈락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조비연'이다.

‘연수환비(燕瘦環肥)’

즉,

조비연'은 말랐으나 미인이었고, 양귀비'는 뚱뚱했으나 미인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항상 중국의 4대 미녀 중 한 명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조비연(趙飛燕,Zhao Feiyan : c. 32 BC – 1 BC)'은 ....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명인 조의주(趙宜主)'대신.....

조비연(

趙飛燕

)'으로 불렸다.

뛰어난 몸매와 가무로 그녀는 한나라 성황제(漢 成帝)'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지위(기원전 16년 孝成皇后)'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자신의 힘만으로 지위를 지키는 것이 벅차게 되자

동생인 조합덕(趙 合德)'을 불러들인다. 언니와는 달리 풍만한 몸매를 지녔던 조합덕은 성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고 이를 질투한 조비연은 욕정을 풀기 위해 외간남자들을 불러들여 정을 통한다. 하지만 임신을 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던 그녀는 임신을 한 후비들을 살해하거나 그 자식들을 살해한다. 훗날 성황제가 죽자 지지 기반을 잃은 조비연은 황후에서 서인으로 신분이 강등되고 끝내 자결하고 만다. 조비연이 4대 미녀에서 탈락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 악덕 행위과 가벼운 행동 때문이었다. 만약 그녀가 올곧은 품성과 마음가짐을 가진 자로서 도덕적으로 행동했더라면 황제가 죽었다 한들 그녀를 반대하는 세력은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여전히 황후의 자리를 유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식 밖의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많이 했던 그녀는 유일한 지지 기반을 잃게 되자 권력도 잃고 그 동안의 죄값을 치르게 되는 최후를 맞게 된다. 옛말에 ‘뿌린 대로 거둔다’라는 말이 있듯이 하늘의 그물은 넓고 넓어서 엉성한 듯하지만 잘못에 대해서는 빠뜨리지 않고 벌을 내린다고 한다.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이라고 한들 악덕하고 부도덕적인 행위를 일삼는다면 하늘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3 대 惡女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주인공, 달기(妲己 : Daji
)


중국 역사에 대한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면 ‘악녀의 아이콘’ 달기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달기는 중국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의 애첩으로 미모가 아주 빼어났다고 한다.


달기를 보고 한 눈에 반한 주왕은 여색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뜻의 ‘주지육림’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사치는 상상을 초월했다고 한다. 이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잔인한 형벌을 가하는 것을 즐겨 자신들에게 조금이라도 반기를 드는 자가 있으면 ‘포락형’을 내렸다. ‘포락형’ 은 구리 기둥 위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걷게 하여 미끄러져서 타 죽게 하는 잔혹한 형벌이다. 달기는 주로 고통을 줌으로써 쾌감을 얻는, 사디스트적인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역사적 자료에 달기에 대한 언급이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윤리적인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든 ‘허구의 인물’ 이라고도 한다. 달기라는 여인이 실존인물이라면, 그것도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달기가 주나라의 ‘명분’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적 인물이라면 조금 다른 차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어떠한 윤리적 타당성을 위하여 또 다른 윤리가 퇴색되어 버리는 일, 오늘 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돼지'를 만든 여태후
(高皇后 呂氏, 여치呂雉, Empress Lü Zhi : 前241年-前180年8月18日)



여태후는 중국 한나라 시조 유방의 조강지처로, 유방이 죽은 뒤 실권을 잡고 온갖 악행을 서슴지 않은 인물이다. 사실 여태후는 유방이 죽기 전부터도 잔인한 면모를 드러내왔다. 한나라가 안정을 찾자 여태후는 장래에 후환이 될 것을 우려하여, 한신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하나씩 ‘처리’ 해 나갔다. 이 사건이 바로 그 유명한 ‘토사구팽’ 의 유래이다. 유방이 죽고 자신의 어린 아들이 왕위에 즉위하자, 여태후는 본격적으로 악랄함을 드러냈다. 여태후는 유방이 죽기 전, 자신의 권력을 넘보았던 유방의 첩 척부인을 잡아다가 팔다리와 두 귀를 자르고 눈알을 뽑아버린 뒤 벙어리가 되게 하는 약을 먹여 변소에 던져 놓았다. 그도 모자라 척부인의 아들 혜제에게 보여주며 ‘사람돼지’ 라고 소개한다. 이것은 일종의 ‘협박’이었다.
중국사상 최초 정식 황후이며, 중국 최초 황태후이자 태황태후이다.

그 후로도 여태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여씨 일족을 왕후로 책봉했다.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여태후의 ‘국정 운영’ 능력이다. 
그녀는 악녀 중의 악녀였지만, 백성들에게는 매우 ‘이상적’이었다. 
민생안정 정책을 강화하고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여 
경제를 회복시키고 사회를 점차 안정시켰다. 
 
그녀는 개인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정책만큼은 유토피아를 꿈꿔왔었는지도 모르겠다. 
통치자 혹은 CEO가 최우선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만약 그녀가 21세기에 태어났더라면 법적 제도적 장치를 통해서 
‘결단력이 남다른’ 통치자나 CEO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권력을 위해서 친자식도 살해한 측천무후
(則天武後 , Wu Zetian : February 17, 624 – December 16, 705) 



중국에서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황제가 된 측천무후는 일개 궁녀에 불과했었다. 측천무후는 태종이 죽은 후 당시 관례에 따라 다른 궁녀들처럼 비구니가 되었지만, 태종의 아들인 고종과의 은밀한 관계 덕분에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시 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측전무후의 야심은 끝이 없었다. 왕황후가 자신의 아이를 보러 왔다가 돌아가자, 생후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자신의 딸을 목 졸라 죽였다. 왕황후를 모함하기 위하여 자식을 도구로 삼은 것이다. 측전무후는 결국 황후를 끌어내리고 자신이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 황후가 된 측천무후는 고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천후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실권은 사실상 측천무후에게 있었다. 

황태자를 책봉하는 일에서도 고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자신의 친아들이라도 죽이고야 말았다. 
 
황태자를 몇 번이나 갈아치운 끝에 여덟 번째 아들 단이 황제에 올랐다. 
측천무후는 황제가 된 아들의 성을 자신의 성으로 바꾸고, 
당나라 이름을 주나라로 바꾸며 자신이 최고 황제라고 선포했다.
측천무후는 냉철했다. 
 
그간 악명 높은 ‘악녀’들이 질투 등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해 움직였다면, 
이 여인은 철저하게 권력을 위해 움직였다. 
또한 측전무후는 인재등용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신분제도에 대하여 한(恨)이 서려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시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시도였을 것이다. 
 
역사는 그녀를 권력에 눈이 멀어, 친자식도 살해하는 
냉혹한 여인으로 기억하지만, 
비천한 궁녀가 황제에 오르기까지 겪었을 수 많은 역경에 대해서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다. 
측천무후는 신분차별,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가 만들어낸 폐해가 아닐까 싶다. 
 
신분제도가 없어진 지금 우리 사회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신분제도’ 가 얼굴만 바꾼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청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 서태후.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나 16세에 궁녀가 된 서태후는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함풍제의 눈에 들어 후궁으로 간택된 후부터 
그녀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함풍제의 본처 ‘동태후’가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함풍제가 죽은 뒤 서태후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는 동태후를 더 좋아했고 
황후 간택 문제에서 조차 동태후의 선택을 따랐다. 
서태후는 그 ‘억울함’을 사치스러운 생활로 보상받으려 했다. 
그녀의 사치스러움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이화원이다. 이화원의 인공호수는 바다를 연상케 할 만큼이니 동양의 ‘마리 앙투아네트’ 라는 칭호가 걸맞겠다. 이 여인은 오로지 자신의 ‘사치’를 위하여 청일 전쟁 중에 함대를 만들 돈을 빼돌리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고, 국고를 탕진하여 청나라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이 뿐만 아니라, 나라는 몰락하건 말건 외간 남자를 궁에 들여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곧바로 죽여버렸다. 결정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정책으로 청나라를 궁지에 빠지게 하면서 역사는 그녀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서태후에 대한 평가는 중국 내에서도 극과 극을 달린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를 비극적인 삶을 살아온 ‘외로운 여인’ 으로 보기도 하지만,
청나라를 망친 장본인으로 악녀의 화신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한 나라를 좌지우지 했지만, 
녹록하지 않았을 이 여인의 개인적인 삶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날마다 진수성찬을 즐기고 값비싼 옷을 입었지만,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외로웠을 수도 있겠다. 
역사의 평가가 때로는 너무나 잔혹하다


참고
http://cafe.daum.net/eomks40
http://en.wikipedia.org/wiki/History
http://en.wikipedia.org/wiki/File:Gyzis_006_(%CE%97istoria).jpeg
http://ko.wikipedia.org/wiki/%EC%97%AD%EC%82%AC

http://zh.wikipedia.org/wiki/%E7%8E%8B%E6%98%AD%E5%90%9B

http://ko.wikipedia.org/wiki/%EC%99%95%EC%86%8C%EA%B5%B0

http://zh.wikipedia.org/wiki/%E8%B2%82%E8%9D%89

http://ko.wikipedia.org/wiki/%EC%B4%88%EC%84%A0

http://en.wikipedia.org/wiki/Wu_Zetian


태풍에 몸건강하세요
아... 제주에 태풍인가요?...
워낙 날씨에 민감할 일'이 없다보니...
여름을 못느끼고 넘어갑니다....

자청비님의 8월이 안전과 평안으로 이여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