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경제/사상과 성찰

cahiergris 2012. 12. 27. 10:20

올해 여름, 하자센터에서 주최한 자공공포럼에 '다른세상, 다른경제'라는 주제로 하승우, 김성훈 선생과 함께 청년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그 때 나눈 얘기를 녹취한 자료집을 낸다고 하여 셋을 대표하여 내가 쓴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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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가을. 내가 처음으로 프랑스에 갔을 때 나를 데리러 나온 분이 자랑스럽게 빠리를 구경시켜 주느라 샤를드골 공항을 나와 샹젤리제로 향했다. 그 가을 밤, 고풍스러운 건물들은 아래로부터 비추는 조명을 받아 더 없이 근엄해보였고, 심지어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위풍당당해보였다. 가로수마다 드리워진 장식조명으로 그 거리 전체는 마치 제국 여왕의 왕관처럼 화려했으며, 사람들 발길이 끊어진 밤이어서 그런지 그 곳의 풍경은 마치 일부러 꾸며 놓은 세트장 같았다.

그러나 차로 한바퀴 빙 돌고나서 내 눈에 들어 온 건 인적이 끊어진 지하철 주변 환기통 주변에 모여있는 노숙자들이었다. 저마다 1프랑이든 식권이든 뭐든 좋다고 매직으로 쓴 종이팻말을 옆에 두고 그들은 그 도시의 밤을 그렇게 동반견에 의지한 채 살아있는 듯 죽은 듯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부러워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요즘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세상엔 볼 것, 입을 것, 먹을 것들이 넘쳐나는데 그것은 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쇼윈도우에 있다. 인터넷과 손전화가 있어 뭐든 다 접할 수 있는 듯하지만 그건 그냥 보기만 하고 알기만 해야 하는 다른세계일 뿐이다. 자신의 결핍만 자각하게 되고 계속 부러워하며 살아야 한다. 꿈이 있지만 꿈을 쫓아가기엔 넘어가야 할 고개가 너무 많아 버겁다. 힘이 들 때 의지하고픈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다들 경쟁하라고 한다. 이해가 잘 안된다.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렇게 살아야 하나?

그들과 함께 사는 선배로서, 그들이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들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임했다. 지금의 세상이 지옥이니 천국을 상상하며 참고 살라고 말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살기도 버거운데 무조건 저항하라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대학을 다니며 저항을 했고 사회에 나와서는 건설을 위해 살았다. 지역 풀뿌리단체의 활동을 지원하며 사회적기업을 만들고, 주민들이 결사하는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도우거나 운영해왔다. 학교 다닐 때 별로 공부를 하지 않은 터라 사상과 철학의 빈곤을 느껴 뒤늦게 공부하며 부단히 성찰하고 뜻을 세우며 실천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다. 어떠한 저항도 창조와 건설의 전망없이는 힘을 낼 수 없고 미움과 증오로 자신만 망가지고 사회는 분열된다는 것을. 그리고 어떠한 뜻을 세워도 살림이 지켜주지 못하면 주저하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고, 결국 뿔뿔이 흩어져 홀로 남게 된다는 것을. 그러기에 우리는 먼저 서로서로의 살림을 챙기며 자신과 친구들의 생존기반을 만들고, 그 힘을 바탕으로 다른 삶, 다른 세상을 만들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이 자리는 함께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 세상은 다가갈 수도, 접할 수도 없는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 너가 만나 일상을 살아가며 엮어나가는 관계의 세상이다. 그 세상은 경쟁과 배제로 전쟁터 같기도 하고, 폭력과 위계로 자유를 짓누르는 거대한 기계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세상의 곳곳에서는 비화폐적 방식으로 거래하며 돈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가 있고, 사회에서 배제된 이들이 다시 사회에 뭔가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기 위해 사회적기업을 만드는 시도가 있고, 몰락해가는 지역을 살리고자 협동하는 시도가 있고, 그들을 지원하는 연대금융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북부국가의 소비자들이 조직되어 남부국가의 노동자와 생산자들의 생존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해 공정무역을 하며 지역불평등을 넘어 공존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이 도처에 있다. 제도적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하여 보다 자유로운 활동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활동에 자신의 시간을 바칠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하고, 최저소득보장 운동으로 모두가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하면서 자유로운 노동을 기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다. 지역 차원에서는 식량의 자급과 주민의 자치를 위해 노력하는 활동이 있고, 전국적으로는 그 것의 반향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연대와 네트웍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경제의 위기가 사회의 위기를 초래한 이때, 우리는 무엇부터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와 떨어지지 않았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기에 나 혼자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사회를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은 지금, 여기, 나와 함께 있는 너와 만나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얘기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며, 나와 너의 관계가 다른 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다른세상은 나와 너가 만나 함께 일구는 살림이 확장되고 그렇게 서로의 자유가 확장될 때 가능하다. 그것이 다른경제의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