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경제/사상과 성찰

cahiergris 2013. 2. 8. 11:01

협동조합의 뿌리부터 줄기와 잎 모든 것을 다 얘기할 수 있는 글이 올라와 너무 반가운 마음에 덥석 받아안는다,

페친의 담벼락에서 발견한 박현이님의 출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협동조합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결사의 문제를 다각도로 볼 수 있는 꺼리를 제공해준다.

 

=== 아래 글은 박현이 님의 글  ====

 

여기저기 출자와 출자자 모집이 필요한 협동조합들의 협동의 목소리 아우성이다.

일이 되어가도록 하려는 즐거운 비명이기도 하나,

대부분 그 주머니가 그 주머니인 넉넉치 않은 사람들끼리 모인지라 우리집부터도 경제난국이다.

협동조합을 세우느라, 공동체를 세우느라 개인의 결단과 희생을 거름으로 커가는 과도기라는 생각도 들지만,

물적 심적 부담이 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가사노동을 경제적가치로 환원하는 꼼꼼한 계산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경제활동 없는 내가 목소리 내기는 어려우니 그저 몸 낮춰 탁발하는 마음으로 사는 처지로서 뭐 할말도 없다.

그럼에도 오래된 고민의 지점이 하나 있다.

민들레의료생협 설립 이후 한살림, 품앗이 생협 등의 조합원으로 참여하며 느끼는 출자 참여에 대한 단상 하나.

시민단체의 후원회비, 종교단체의 헌금과 보시보다

왜 협동조합의 출자금() 모집이 더 어려운가.

(문제 설정이 잘못됐을 수도 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거친 기억으로, 녹색연합 후원회원 한명보다 민들레 조합원 한명 인연맺기가 더 어려웠다.

북한동포 돕기에 몇백만원 이상 기부하는 도반에게도 3만원의 출자자로의 참여 독려는 쉽지 않았다.

시민단체 후원금이, 활동가들의 활동비 또는 활동자금이라는 쏙 와닿는 간단한 내용에 비해

출자금은 왜 협동조합인지,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이 사업을 왜 하는지, 조합원이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출자금으로 무얼 하는지 등 일단 얘기가 길어졌다. 그래서 이 모든 것에 끄덕끄덕 해야 비로소 주머니가 열렸다.

실은, 후원금과 보시금은 아예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이고,

출자금은 살짝만 돌려 생각하면 저축이나 매 한가지이다.

게다가 현금 이자는 아니지만, 참여과정에서 이미 삶의 공감, 이웃얻기, 안전한 사업소 이용 등 계산도 어려운 삶의 이자가 듬뿍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사람들은 조건없는 후원, 댓가없는 사랑에는 오히려 계산없이 마음이 열리고 있는 건 아닌지.

반면, 사업소가 있는 협동조합은 계산적으로(경제적 고려를 포함한) 깐깐히 참여 여부를 결정하느라 더 어려운 건 아닌지.

내가 병원을 얼마나 자주가게 될까, 한약은 지어먹게 될까, 물품은 몇번이나 주문배달을 하게 될까, 이 협동조합이 성공할까 등.

그래서 그 계산법에 맞추어 참여를 호소 해 보지만,

그만큼 만족과 신뢰를 주기엔 쉽지 않은 길이다.

 

이 즈음에 사회심리적인 들여다봄이 필요 해 보인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이익이 있어야 마음이 움직일 것 같은데,

당장 자기 이익과 상관없거나,

오히려 잘 따져보면 더 손해이기도 한데 움직이는 그 지점.

더불어, 마음가는 곳에 돈가는 그것.

 

몇백만원 북한돕기도 선뜻 되고,

백여만원짜리 삼성폰 업그레이드에도 계속 참여할 수 있는데,

언제든 찾을 수 있는 돈, 만원 이상 출자자로는 망설여지는 그 지점.

기부자와 소비자 중간의 출자자!

가장 합리적이고 참여가 쉬울텐데도 가장 모시기 어려운 그 자리에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을 모시고 있는가.

각개각투이지는 않는지. 개인기에 주로 의존하지는 않는지. 출자자를 가장한 기부자로 모시지는 않는지. 실험에 대한 투자비조로 걷지는 않는지.

이 모두가 나쁘지는 않지만, 연구와 정성이 그만큼 충분한가!

 

어제저녁 남편이 민들레500만원, 품앗이생협 500만원 증좌의 숙제를 받아오셨다.

이차저차 공동책임을 지기로 한 사연 있어 자연스레 오랫만에 내 고민이 된 주제다.

내가 출자자를 모시지 못하면 빚내어 1천만원 만들지도 모르니,

발등에 떨어진 불이자, 즐거운 숙제!

숙제하다 보면 절로 공부 되겠지.

 

숙제는 같이 도와가며 하는 거라고 어른들이 그러셨다. ㅋㅋ

 

 ============== 여기부터는 나의 생각 ===================================

  

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통제되는 사업체를 통하여 조합원 공통의 경제·사회·문화적 필요와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자율적인 결사체이다

 

1, 협동조합에서의 결사는 이익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명분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이 문제는 협동조합기본법이 제정된 후 마련된 여러 토론회나 교육의 공간에서 항상 제기된다. 만들려는 자는 이익을 생각하는데 협동조합이라는 것이 나 혼자 만드는 기업이 아니기에 나의 이익만 따져서 판단하면 제대로 만들 수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왜 만들려고 하는가에 대해 스스로 답하기 이전에 창업을 해야겠는데 개중 협동조합이 요즘 대세로 각광받고 있고, 그 건 즉 지원이 동반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태도는 협동조합 조합원(설립자의)경제적 필요를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이러한 추세에 반하여 협동조합에 대한 분홍빛 환상을 경계하고 제도적 지원이 불러 올 위험성(자율성 훼손, 협동조합의 존재이유에 대한 회의 등)을 들며 명분을 강조하는데, 이 때의 명분에서 좀 애석한 점은 분명 어떠한 조직은 대의명분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마음이 동해야 하는데, 그러한 점을 너무 가볍게 여기며 사회적인 역할만을 강조함으로써 일상의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현실적 고민을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2. 두 번 째는 결사와 희생, 보시, 자선 등과의 관계이다.

 

나는 이전에 무상과 공유에 대한 글을 올린 적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개인의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자유주의의 논리에 신봉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학이라면 그에 반한다는 많은 논조는

첫째. 공동의 목적을 명분으로 개인의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논리

둘째. 애초에 내것이라는 소유의식에 기반하지 않고 행해지는 관대함, 즉 측은지심의 발로에서 비롯된 보시

셋째, 나는 누릴만큼 누리는 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으니 불쌍한 마음으로 행하는 자선이나 시혜 등이 있다.

 

첫 번째 논리인 희생은 공동의 목적을 다수가 동의한 목적으로 여겨 소수자는 따라야 한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는 집단적인 결정이 있는 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이 경우 민주주의의 운영원리를 다수결의 원칙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며 토론과 숙의 등을 통한 조절이나 타협을 등한시하는 경우에 자주 발생한다. 이는 함께 가고자 하는 의지보다는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신속한 의사결정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소수에 속한 멤버는 의지와 무관하게 다수에 따라야 하기에 적극성과 자발성을 발휘하기 힘들게 된다. 물론 강력한 결사체에서는 이를 희생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많지만 대부분의 경우 낮은 수준의 결사체이므로 이 경우 불만이 누적되어 협동의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게 된다.

 

두 번째 보시는 종교성의 발로이다. 레미제라블에서 비엥브뉘주교는 장발장이 촛대를 훔치지 않고 준 것이라 했다. 이는 단지 그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물건은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니었고, 잠시 자기가 보관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자신보다는 장발장에게 그것이 더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비엥브뉘주교 또한 자신의 주교직 활동이 내 노동이니 그 결과 얻은 것을 내 것이라고만 사고하지 않는다. 모두의 삶이 연결되어 있기에 내노동의 결과는 나만의 소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내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 비슷한 예는 초기 사회적경제 선구자 중 푸리에의 공동체 시스템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각자의 노동에 따라,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노동을 통한 이익을 분배하는 대원칙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결사 정신이 높은 공동체에서는 보시와 같은 행위도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세 번째는 기부나 자선과 같은 행위이다. 박현이님이 말했듯 자신에게는 돌아 올 이익이 전혀 없는데 선뜻 기부하는 이들이 많은데 왜 돌려받을 수 있는 출자자를 모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느냐 하는 점은 아주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이는 단지 인간의 사회심리적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선 기부 중에는 보시와 가까운 동기가 있다. 나의 가진 것과 무관하게 피해자나 희생자에 대한 공감과 연민, 혹은 사회적 명분에 마음이 동하여 가진 것을 내어놓는 행위이다.

두 번째는 사회에 대한 부채의식이 작용한 것으로 내가 이만큼 누리게 해준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자신의 재산과 업적이 자신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아는 겸허한 자세를 가지고 있고,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공동체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단순한 자선이나 시혜적 행위로, ‘노블리스 오블리쥬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헌데 이 경우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차별 등 구조적인 문제는 외면하면서 기부를 가진자의 의무로 여기기에 공동체의식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와 내가 다르다는 것과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이루어지기에 기부행위는 그러한 체제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3. 기부, 보시, 자선이나 시혜, 이러한 행위와 출자는 어떻게 다른가?

 

기부나 후원금 등은 한시적이고 자신의 생계나 자산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그 행위를 통해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자신의 생활의 변화를 강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협동조합에 출자하는 행위는 결사를 요구하기에 지속적으로 삶에 영향을 미친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에 출자하면 그 곳의 물품을 이용해야 하기에 소비패턴과 기호의 변화를 요구한다. 신용협동조합에 조합원이 되면 다른 은행을 이용하지 않는게 좋다. 의료생협에 가입하면 멀어도 가야한다. 이처럼 생활태도의 변화 뿐 아니라 경영에 대한 통제를 위해 회의나 모임에도 참석하고, 교육도 받아야 하며, 경영상 어려울 땐 증좌도 해야 한다. 한마디로 뜻에 동의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생활이 변하고 다른이와 지속적으로 엮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행동이나 의식의 자유의 제한이나 구속으로 여기면 조합원이 될 수 없다. 비록 그 액수가 많지 않더라도 선뜻 조합원으로 나설 수 없는 것이다.

 

4.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박현이님이 각개각투라 표현한 점은 우리를 반성하게 한다. 공통, 공동, 함께, 민주라 하면서 실제 신규조합원을 모시는 과정은 조직적인 결사가 아닌 개인의 역량에 맡겨진다는 점이다. 결사체로서 협동조합은 단지 뜻에 동의하는 것으로 부족하며 낮은 수준일지라도 결사를 요구한다. 결사는 공동의 뜻을 세우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 나의 생각과 이익을 다 드러내어 공통의 것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러니 조합원을 모시는 과정은 그가 받을 이익을 앞세워 꼬시는 과정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과정도 아니다.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얘기하는 과정이고, 그것을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생각을 모으는 과정이다. 그러하기에 그것은 개인기를 발휘하여 달성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신뢰를 주고, 믿음을 주고, 서로 의지하며 상호침투하는 집단적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결사는 모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함께 만들고자 하는 그 무엇은 미래의 것으로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미래를 책임지지 못하기에 우리는 바로 옆에서 함께 하는 사람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결사는 관계이고 그것은 관계에 대한 믿음이다. 나와 너가 맺은 관계로 손해를 볼 수 있고 이익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관계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다.

또한 그 관계로 인하여 나의 행동에 제약이 올 수도 있지만, 나 혼자의 힘과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도모할 수 있으므로 나의 자유가 확장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결사는 사회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여성의 임금차별 문제를 나 혼자만의 저항으로 가능한가?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함께 저항할 때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하여 나의 차별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차별을 극복하는 과정이 된다. 결사함으로써 확장될 자유의 가능성, 그것에 대한 열망 없이는 함께 조합원이 되고 협동하기를 주저할 것이다.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 감수성을 건드리지 않고 이익만을 앞세우면 기대하는 이로 만들 뿐이며, 그럴 때 자벌적인 참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익과 손해사이에서 저울질 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할 그 무엇을 찾아가는 집단적 과정, 그리고 개인의 마음에 들어있는 사회적 감수성을 함께 찾아내고, 관계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 가는 과정, 그것이 협동조합에서의 결사이다. 결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협동으로 만날 수 없다.

 

제게 꼭 필요한 글 잘 읽었습니다. '1.결사는 이익에 따라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명분에 따라 이루어지는가'에서 이익은 협동조합의 설립을 통해 얻어질 외부적 지원이 아닌 '공동의 뜻을 세우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 나의 생각과 이익을 다 드러내어 공통의 것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에서 말하는 그 이익이 아닐런지? 그렇다면 그 자체로 이익과 명분은 확연히 분리되어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꼭 물질적인 것 뿐 아니라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나 명분 등도 개인의 이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 이익이란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interest)'가 맞는 표현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