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적을 만나는 사람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스크랩] 칼빈의 5대교리 두번째 /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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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

2015.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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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5대교리 두번째 /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E)신학에 관한 글
keeper77 | 조회 59 |추천 0 |2004.10.09. 16:08 http://cafe.daum.net/keeper77/AWW/10 

 

 

 

개혁주의 성경공부

제 2 강

칼빈주의 5대 교리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1.도입

 

  절대적 타자(他者)로서의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 방식은 죄로 인해 전적타락과 부패와 무능에 빠진 인간을 가장 자연스럽게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며 자비며 긍휼의 일환으로 작용합니다.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인간의 영적 실존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하여 자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비참한 지경 곧 영적 사망으로 인한 일체의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단절된 파산자(破産者)인 사실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외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무능한 범죄자임을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이런 사실은 자연히 외부적 절대 타자(他者)에 의한 구원에로의 선택교리를 요청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성경의 요구이며 증언이지 상황전개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하게 나와진 즉흥적(卽興的) 요구만은 아닙니다.

 

   절대 타자로서 하나님에 의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소위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에 대한 반증으로 나온 성경적 대응이며 해명입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나 능력이 범죄로 인해 완전히 타락했거나 부패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인간 스스로의 자의적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의 허구성(虛構性)은 이미 지난번 전적타락 교리에 의한 성경의 자체 증언을 통해 충분히 밝힌바 있습니다. 결코 성경은 인간 스스로의 자력 구원의 가능성을 추호라도 용납하지 않음을 살펴봤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용인될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그 신적 기원에 따른 본질적 의미가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적 복음주의의 실체를 폭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절대성과 충족성을 이렇게 변호합니다.“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3:21). 그렇습니다. 인간의 구원사역에 사람편의 의지적 행위는 절대불가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율법을 타락한 인간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능력이란 전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오히려 생각하고 행하는 것마다 불의함과 죄악뿐임을 증거합니다(창6:5, 사64:6, 렘17:9). 인간의 본성이 죄로 오염되고 부패됐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절대 타자(他者)로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무조건적 선택교리와 관련해서 흔히 사용되는 몇 몇 용어에 대한 사전 이해가 필요할 줄 압니다.
  
   먼저 작정(作定)이라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란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만물의 조성과 만사의 진행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총괄적 계획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고 할 때 이는 창세 전에 미리 작정하신 계획대로 피조세계 속에서 만물과 만사를 그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서 보존, 관리, 통치하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11:36)고 증언하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해서 나온 변증(辨證)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만물과 만사가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경영된다고 할 때 세상에 우연의 산물은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배후에 존재하셔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바로 이런 계시적 사실의 터 위에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섭리 의존적 신앙의 교리적 정립을 가능케 합니다. 그러므로 작정이란 전 우주적 역사를 그 분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섭리해 가시는 포괄적(包括的)인 계획을 가리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다음으로 예정(豫定)이란 용어를 들 수 있습니다. 예정은 작정의 일부입니다. 작정이 우주만물과 관련된 하나님의 영원하신 보편적(普遍的)인 사전계획이라면 예정은 우주만물 중 특별히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과 결부된 교리에 특별히 국한시켜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작정이 내용상 포괄적이고 광의적이며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면 예정은 지엽적이고 협의적이며 특별한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정은 구원과 관련된 인간의 종말론적 운명을 얘기할 때 주로 사용되기에 말입니다. 다시 말해 타락한 사람들 중에서 얼마를 개인적으로 특별히 선택해서 구원해 주실 것을 창세 전에 미리 정(定)한 사실을 가리켜 예정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예정 속에는 선택교리와 함께 자연히 유기(遺棄)교리까지도 포함되게 됩니다. 다수 중에 일부가 선택됐다면 나머지는 자연히 버려진 바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공평할 수 없음은 인간은 본성상 죄값으로 심판에 처해 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진 자들로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전적타락과 부패).

 

   그러나 내용이 담고 있는 범위와 성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정은 보다 큰 범위의 작정 안에 포함돼 있다는 사실로 인해 때로는 예정을 작정으로 대체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작정의 의미는 항상 예정의 내용과 성격인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제한적으로 가리키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정과 관련해서 고전적(古典的) 성경 본문인 엡1:4-5입니다. 여기서 선택과 예정은 분명히 사람의 구원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돼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행13;48에서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누가는 이를 설명하면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작정이란 다름 아닌 구원을 받기로 예정된 자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성경은 예정과 작정을 혼용해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내용이 가리키는 바 구원의 의미나 성격이 달라지거나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2.전개

 

   무조건적 선택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시된 성경적 교리입니다. 저들은 인간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기에 얼마든지 자의적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자정(自淨)능력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남은 의지적 선택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전능성에 의해 이를 미래지향적으로 내다보시고(예지) 구원에로 선택하셨다(예정)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는 도르트 회의에 의해 그 부당성이 이미 지적되고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성경의 증언에 근거한 무조건적 선택교리로 이미 무효화된 구시대적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범죄는 인간을 전인적(지정의)으로 부패케 만듦으로 하나님을 향한 지정의의 기능을 근원적으로 상실한 나머지 자력(自力)으로는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도, 더듬어 찾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영적 사망자가 됐다고 선고합니다. 따라서 이런 상태에서 인간의 구원의 기회란 전적으로 외부적 절대 타자에 의하지 않고서는 절대 불가능하게 돼 버린 셈입니다.   

 

예지-예정론의 허구성

 

   오늘날 예지-예정론에 근거한 선택교리는 비단 알미니안적 사고방식에 동조하는 교단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일부 장로교 교단에서조차 이를 수용해서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지-예정론이란 알미니안파들이 주장하는 ‘조건적 선택’교리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성경적 논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당신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복음에 반응하는 인간의 의지적 결단을 당신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창세 전에 예지(豫知)하시고 이에 근거해 그 사람을 구원에로 예정(豫定)하셨다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면 서기2000년 8월25일에 어느 한 사람이 서울의 모교회의 전도집회에서 복음을 듣고 믿음을 발휘해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창세 전에 하나님의 전지 전능성을 통해 내다보시고(예지) 그를 선택해 구원하시기로 예정했기에 그가 복음을 받아드리게 됐다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이런 교리적 논리 하에서는 구원의 주체가 복음을 자의지적으로 받아들인 그 사람 곧 인간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가 복음을 자원해서 의지적으로 받아들였기에 조건적으로 그를 구원하셨다는 논리적 귀결입니다. 그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란 주장입니다.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만한 선한 능력이 남아 있기에 얼마든지 그 남은 선(善)을 발동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자력으로 취득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한편 이런 조건적 선택교리 곧 예지-예정론을 수용하는 측에서는 이 교리를 정당화시키는 증거본문으로 대부분 롬8:29을 제시합니다. 29절 한 절만을 보면 틀림없이 ‘미리 아신(예지)자’와 ‘미리 정하셨다’(예정)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순서는 예지-예정의 단계로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롬8장 전체를 문맥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주관에 빠진 자의적(自意的) 해석이며 따라서 허구(虛構)인지를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롬8:1-2에서는 성도들의 죄로부터의 해방이, 곧 성도의 구원이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한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았음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더욱 3절에서는 육신이 죄성으로 인해 연약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들을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통해 이제는 성령의 내주하시는 역사로 얼마든지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음을 변증합니다. 나아가 7절에서는 옛 사람의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굴복할 수도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기에 육신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절대로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아울러 고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과 이 사실에 대한 확증은 오직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과 내주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할 뿐입니다(16절). 그렇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옛사람의 타락하고 부패하고 무능한 자의지적 능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일말의 자각(自覺)도 불가능합니다(26절). 허물과 죄로 죽어버린 영적 사망자로 판정 받았기에 말입니다(엡2:1).

 

   이렇게 롬8장 자체 문맥만을 검토하더라도 29절의 예지란 인간의 자력(自力)적 선택을 미리 보아 알고 계시다는 의미의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라(예지-예정),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역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구원시킬 자를 예정하셨기에 그들이 누구이며 또한 누가 복음을 수용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계신다(예지)라는 사실임을 확인하게 됩니다(예정-예지). 이 뿐만이 아닙니다. 관련 주제를 다룬 다른 본문에서는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도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임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증거합니다. 요15: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본(本)절에서 사도 요한은 주님의 제자를 선택한 주체가 제자들 스스로가 아닌 주님 자신임을 분명히 천명(闡明)합니다. 앞에서 잠깐 살펴봤던 행13:48에서도 주님을 믿는 주체가 사람이기 이전에 ‘영생을 주시기로 이미 하나님에 의해 작정된 자들’로 제한돼 있음을 봅니다. 다시 말해 믿음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함’임을 분명히 보아 알 수 있습니다. 행16:14을 보십시오. 여기서도 자주장사 루디아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게 됐을 때 그녀가 복음을 청종하게 되는 과정이 소개됩니다. 그러나 이때도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주체가 루디아의 자의적 선택이 아닌 주님으로 분명히 소개됩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님께서 루디아의 전적으로 타락하여 죽어버린 바 된 영혼을 거듭나게 하셔서 그녀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이게 하셨다는 지적입니다. 요3:3입니다.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전12:3입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상의 일련의 성경의 증언들을 통해 인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하나님을 더듬어 찾거나 믿을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설령 성경 어느 한 구절의 내용 속에서 선택과 믿음의 주체가 사람으로 설명된다 할지라도 앞 뒤 문맥과 성경 전체의 구속사적 맥락에서 접근하면 결코 사람에 의해 임의대로 선택과 구원이 좌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1:12에서는 주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의 특권이 인간의 자의적 선택과 신앙적 고백의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 같이 설명돼 있습니다. 그러나 13절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이어서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자녀 된 근본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과 고백의 대가와 보상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창세 전 선(先) 선택과 예정으로 말미암음임을 분명히 시사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의 의지로 말미암았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발견되는 구원교리의 실상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선택적 구원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이미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영적 사망자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자로 선고됐습니다. 아담의 범죄와 이로 인한 원죄의 생득적 전가로 말입니다(롬3:23, 5:12). 따라서 인간의 자력으로는 어떤 방식을 취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택적 구원을 임의(任意)로 획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를 힘입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이러 이유로 해서 인간에 의한 하나님의 조건적 선택과 관련해 예지-예정론의 논리적 허구성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선택

 

   그렇다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의 구원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는 이미 전(前) 강의에서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영적 실존의 비참함을 살펴봤습니다. 영적 사망자와 파산자로서 인간의 전인격적 기관은 하나님을 향해 이미 그 총체적 기능을 상실했음을 확인했습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인 사실을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됐습니다(마8:21-22).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구원이란 자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할 뿐입니다. 외부적 타자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외부인이라 할지라도 같은 인간의 수준에서는 또한 불가합니다. 그도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아야 할 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 없는 절대 외부적 타자(他者)의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됩니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당사자는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만이 타락한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사1:18, 44:22, 시103:12, 행4:12). 하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에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곧 창조주와 절대자로서의 그 분의 절대 주권 안에서 말입니다.

 

   롬9:10-13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본문에서 이삭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들 두 아들이 쌍둥이로 태중에 있을 때 이미 이들의 나중 형편을 선택적으로 예정하셨습니다. ‘큰 자(에서)가 작은 자(야곱)를 섬길 것’을 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했을 때부터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공평하게 여겨질 수도 있는 사전결정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란 말인가요. 본문은 이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에서 찾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창조자적 절대 주권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 좀 더 원색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 마음대로’란 의미입니다. 로마서 기자는 이런 사실에 대한 독자들의 반발과 이의(異意)제기를 예감하고 얘기를 계속 전개시킵니다. 14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고 변론합니다. 창조자로서의 절대 주권과 권능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인간은 할 말을 잊게 될 뿐이며 그 분의 행하시는 처사는 어느 것 하나도 불의함과 불공평함이 있을 수 없다는 지적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상 말입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저자는 노파심(老婆心)을 발동시킨 나머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토기장이와 한 덩어리의 진흙의 비유를 들어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접근을 시도합니다(롬9:20-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임의대로 만들 수 있듯이 하나님도 창조자의 권능과 주권으로 택자를 임의선택 할 수 있다는 논리적 변증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본질적으로 타락한 죄인인 이상 구원을 위해 선택해 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항의할 명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찌했든지 아담 안에서 범죄한 불의한 죄인들로 이미 정죄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롬1:29-31)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定)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1:32). 지금 저자는 본문들을 통해 철저히 부패하여 타락한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 중에 일부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을 좇아서 구원에로 선택하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 크신 일을 이루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이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 속에 우리의 구원이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직 나지도 않았을 때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말입니다. 성경적 은혜의 실질과 본질이 이런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선행이나 공적이 호리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개입된다면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退色)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적 구원의 은혜에 인간의 역할과 기능은 전무할 뿐입니다. 은혜는 오직 하나님만이 무상으로 베푸실 수 있는 전폭적인 사랑의 호의이기에 말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성도의 구원이 하나님의 창세 전 선택에 근거하고 있는 바 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행하시는 예정에 의한 것임을 에베소 기자는 선포합니다(엡1:5). 여기서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창조자적 주권을 가리킵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시는 자’, ‘오게 하시는 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요6:37, 39, 44, 65). 이는 결국 같은 의미의 다른 설명일 뿐입니다. 내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시종일관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쯤해서 우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합니다. 그렇다면 왜 다수 중에 일부를 주권적으로 임의(任意) 선택했느냐 하는 문제 말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스스로 답변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근거해서 선택적 구원동기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속사를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해 가실 때 필요한 자들을 선택적으로 부르셔서 계시의 도구로 선용(善用)하십니다. 이 때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원하심을 따라 되는 창조자적 주권에 따라서 소명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 오직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이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성취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롬9:11). 그렇다고 이런 하나님의 부르심을 상황에 따른 임시조처라고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필요에 따라 임시변통(臨時變通)적으로 선택하는 즉흥적 발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필요에 따른 임기응변(臨機應變)식의 임의적 결정같이 보일지라도 창세 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先) 주권적 선택에 따른 후(後) 성취의 일환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절대자적 주권이 한낱 창조자의 횡포와 전횡(專橫)으로 오해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으시고 무분별하고 소견에 좋을 대로 사사로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민23:19). 창세 전에 세우신 작정과 계획에 근거해서 만물과 만사를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일점 일획의 착오와 차질 없이 세상역사 속에서 섭리적으로 경영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적 말씀을 신앙과 생명과 삶의 도리로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음이 이런 계시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그렇다면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빛도 이름도 없는 우리인가요. 왜 막강한 열국 중에 작고 미약하며 보잘 것 없는 이스라엘인가요. 하나님께서는 세상가운데서 택자(擇者)를 부르시는 창조자의 주권적 선택의 동기를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發露)라고 말씀하십니다. 신7:7-8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본문에서 신명기 저자는 이스라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각별한 선택의 배경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첫째로 열국 중에 이스라엘을 선택해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도구로 사용하시는 데는 이스라엘의 외부적인 열악한 여건과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배려’가 그들에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지적입니다. 둘째로 이 사랑의 선택에 근거해서 이스라엘의 열조들과 맺은 언약의 신실한 성취를 위해 애굽으로부터 구출해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선행과 공과가 인정되었기에 그에 상응하는 보상으로 선택과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열국에 비해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과 사랑이 동기가 돼서 베푸시는 무조건적인 은혜의 하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됐다는 내용입니다.

 

   요3:16과 엡1:4과 2:8, 롬5:8과 요일4:10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택과 속죄와 구원의 동기가 하나님께서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으로 하사(下賜)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의 결과임을 분명히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속량하시기 위해 대속적 죽음을 자원해서 담당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죄악 중에 구원해 주셨을까요. 성경은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선포합니다(고전1:29, 엡2:9, 1:6, 눅17:10). 이런 사실에 근거해서 성경은 성도의 신앙적 본분을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 분을 즐거워하는 삶이라고 강력히 피력(披瀝)합니다(전12:13, 고전10:31, 롬14:8, 엡5:10). 그렇다면 이런 삶의 구체적 내용과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롬12:2을 통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새로운 가치관을 수립해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모든 지상적 삶의 성격과 방향성을 집중시켜 나가라는 엄숙한 명령입니다. 우리는 왜 삽니까?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 결국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요.

 

   우리는 본 강의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교리의 성격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 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근거해서 택자들에게만 베풀어주시는 선택적 은혜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차별적으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 와 택자들의 행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인간의 행위가 철저히 배제된 선택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해서 세 번째로 살펴 볼 문제는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에 근거한 선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의 부분입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전혀 아무런 영향도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미치지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이미 전(前) 강의(전적타락)에서 지적한대로 인간의 영적 상태가 스스로 선을 행하거나 하나님을 더듬어 찾을 수 있는 영적 기능과 능력을 본질적으로 상실했기에 독자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신앙적 반응을 전혀 보일 수 없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불신앙자는 비록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나 방불함을 가리킴에 다름 아닙니다(마8:22). 사람의 본분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통해 찾아지는 바(전12:13) 피조자로서 창조자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고 그 분의 말씀을 생명의 원리로 삼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과는 무관한자로서 곧 영적 사망자란 지적입니다. 따라서 이런 자의 구원은 외부의 절대적 타자(他者)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전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사실상 이런 영적 사망자(불신자)에 의해 시도되는 어떤 행위도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 죄인 됨의 전제하에서는 결코 선(善)과 의(義)로 평가될 수 없음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는 일을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역설적으로 선포합니다(롬1:28-32).

 

   인간관계 속에서 행해지는 상대적(相對的) 선은 하나님의 절대적(絶對的) 선의 요구를 결코 만족시킬 수 없기에 상대적으로 극한 선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한낱 더러운 누더기 옷과 다를 바 없음이 성경이 보는 해석적 관점입니다(사64:6). 그러기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다고 성경은 전 인류를 향해 감히 선포하는 것입니다(롬3:11-12). 왜 그렇습니까. 오직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느 사람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죄인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만 인간의 죄는 사면될 수 있습니다(행4:12).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원수 된 죄(원죄, 자범죄, 불신죄 등) 문제를 깨끗이 탕감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성격은 자연히 인간의 행위를 철저히 배제시킨 하나님의 독자적인 주권과 무한하신 사랑의 발로를 통해서 베푸신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하나님의 선택에 일조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행위는 그 본연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적 진노만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롬9:11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한 구약의 사건기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두 자녀인 에서와 야곱이 쌍둥이로서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한 일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적 뜻에 따라서 야곱을 택하여 아비 이삭의 뒤를 이을 언약의 계승자로 택정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태어난 이후의 에서나 야곱의 생애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 드릴만한 특별한 사건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에서는 매사에 적극적이었으나 지극히 육신적이었으며 무책임했습니다. 반면 야곱은 소극적이지만 이기적이었으며 교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평가가 내려졌다면 야곱은 형 에서에 비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상대적으로 독차지 할만한 인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선악의 행위와 무관하게 그가 태어나기도 전 아직 리브가의 태중에 있을 때에 그를 에서보다 사랑하여 언약의 당사자로 선택하신 사실을 성경은 소상하게 기록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사역에 인간의 행위는 전혀 무용지물입니다. 무관합니다. 적극적으로 배제됩니다. 만일에 호리만큼이라도 인간의 행위와 공적이 참작(參酌)된다면 이는 인간의 전적타락교리를 성경스스로가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은 자연히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선택의 성격이 오직 무조건적인 은혜의 선택이어야 함을 강력히 시사함에 다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에 기준으로 작용한다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 과연 몇이나 될는지요.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일는지요. 하나님의 선택적 구속이 우리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덮어 주셨습니다. 이 크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다(행2:11).

 

3.결론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최선의  방편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은혜 됨의 비밀이 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긍휼을 베풀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며 강퍅(剛愎)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하십니다(롬9:18, 11:32). 만일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이 되었다면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은 택정 함을 입은 자들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무상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가운데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와 그 분의 선하신 뜻을 감당하는 일에 남은 생애를 불사르게 만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무조건적 선택교리는 선택을 입은 자의 생애를 계속해서 섭리적으로 간섭하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일에 선용하신다는 사실을 신앙과 생명으로 붙잡고 살아가게 하는 바 섭리 의존적 신앙관을 확립시킵니다.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신앙관을 촉발시킵니다. 이런 신앙관의 확립은 흑암의 세력이 주관하는 세상 가운데서도 늘 승리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성도의 진정한 기쁨이 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천하 만민 중에 천지의 창조자이시며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선택을 받은 행복한자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으로 우리의 마음이 늘 풍성히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베푸신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 개개인을 사랑하십니다.

출처 : 생명나무 쉼터
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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