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적을 만나는 사람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진리의 복음으로(갈 2장1-5절)

댓글 0

**복음·갈라디아서

2020. 12. 8.

 

갈라디아서 2장1-5절, 진리의 복음으로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의 여러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른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마땅히 알곡만 있어야 할 곳에, 가라지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렇게 경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8-30절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을 세우고,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하수인들인, 유대주의자들이 그곳으로 와서, 

마치, 가라지와 같이, 잘못된 가르침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로 잡아,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굳게 서도록 만들기 위해서,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의 신적 권위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이 전한 복음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온전히, 동일(identical) 한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23절의 말씀을 보면, 유대에 있는 교회들 사이에는, 

이런 소문이 나돌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바울이 전에는, 사도들이 전하던 믿음을, 박해하고 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바로, 그 믿음을 전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은,

같은 내용이라는, 사실이 입증된 셈입니다.   

이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하겠습니다.

첫째, 바울이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함(1-2절).

둘째,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게 하지 않았음(3절).

셋째,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게 하지 않은 이유(4-5절).

그러면 이 세 대지에 따라서 본문의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바울이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내용을 살펴봅니다.

1절 말씀입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십사 년 후에.” 

십사 년의 기점을, 언제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를, 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또 하나는, 그가 갈라디아서 1장18절에 기록된 대로, 

제1차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를, 기점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어느 견해를 취하든지 간에,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도, 자기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말하는, 십사 년의 기간 동안,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바로 이때,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이, 세워진 것입니다. 

바울은 그 동안, 자기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과, 아무런 접촉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복음을 받았기에, 

그가 받은 복음을 그대로, 이방인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번에 예루살렘에 갈 때는, 그와 동행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나바와 디도였습니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나바의 본래 이름은, 요셉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6-37절 말씀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선지자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선지자는, 백성을 위로하는 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권위자” 곧 “위로자”라고 번역이 된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의 핍박을 피해서, 예루살렘에 왔을 때였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바울의 제자 됨을, 믿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바울을 변호해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27절 말씀입니다.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바울은 예루살렘에 15일을 머물다가, 다시금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고서, 

자기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갔습니다.

그러던 중 안디옥 교회가, 놀랍도록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서,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파송했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길리기아 다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바울을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두 사람은 함께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1장 25-26절 말씀입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뒤에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 이 두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제1차 선교여행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1-3절 말씀입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선교여행을 한 내용은, 사도행전 13장과 1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돌아와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행하신 일과,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보고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7-28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그때 유대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사역을 하고 있는, 

안디옥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잘못된 가르침으로, 혼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1-2절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 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이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포함한, 몇 사람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은, 계시를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일 때문에, 시간을 뺏기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갔던 것입니다.

그런 뒤에, 어떻게 했습니까?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제시하되.” 

바울이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15장1절에 기록된 것처럼,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는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누구에게 제시했습니까?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여기에 “그들”이 나오고, 또 “유력한 자들”이 나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면, '그들'과 '유력한 자들'을,

서로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아마도 바울은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자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을, 

사사로이 제시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자들은, 갈라디아서 2장9절에, 그 이름들이 나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적으로 말하기에 앞서서, 먼저 사적으로 이들에게,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고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먼저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뒤에 열릴 공의회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조치한 셈입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을 때,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앞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다시금 보고를 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을 읽어보면, 그때 예루살렘 공의회의 일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4-1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는, 바울이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에 대해서,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잘못 전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것처럼, 믿음 한 가지만으로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고, 율법도 지켜야만 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서 전한 복음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런 후에, 주의 형제 야고보가,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도행전 15장13절과 19-21절 말씀입니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결국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의 손을 확실하게 들어주었습니다. 

아울러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린 것을 공적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먼저 유력한 자들에게 사적으로, 

또, 그 후에는,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적으로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한 복음을, 

제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절, 끝 부분입니다.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하다는 자들이나 또는 전체 공의회에서,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수용하거나, 바울이 전한 복음과 절충을 시킨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고 맙니까? 

순수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달음질은, 완전히 헛된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는 자기가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그 누구에 의해서, 인정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지금 교리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자기가 전한 복음을, 기꺼이 사람들 앞에 제시했던 것입니다.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비록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독립적으로 받은 것이지만, 

그 내용은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동일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반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왜곡하는, 

사단의 속임인 것도,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은, 속히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돌이켜서, 

바울이 전한 복음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을, 받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순종해서 간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발걸음은 형통했고, 그 결과도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도 무슨 일을 하든지,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고 결정합시다. 

급한 마음에, 기도하지 않고 행하니까,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먼저 깊이 기도합시다. 그런 후에, 아멘하고 순종합시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우리 자신이 앞서지 않고, 하나님을 앞세우면, 실수나 실패가 없습니다.

이것을 기억에 남도록, 비유적으로 설명을 해봅시다. 

여기에 두 숫자 0과 1이 있습니다. 인간은 무능하니까, 0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1로 봅니다. 

우리가 앞서고 하나님이 뒤에 서면, 0.1이 됩니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가 앞서면, 0.01이 됩니다. 

우리가 한번 더 앞설 때마다, 그 수는 0.001, 0.0001로 점차 적어집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자꾸 보잘것없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을 앞세우고, 우리가 뒤로 물러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수는 1.0이 됩니다. 하나님을 앞세울 때마다, 그 수는 점점 커집니다. 

11.0, 111.0 등으로 그 수는, 점차로 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 하나님을 앞세우면, 우리의 능력은 무한하게 커지게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자신이 앞서지 말고, 언제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디도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오, 그의 전도의 열매였습니다. 

뒤에 디도가, 그레데 교회를 돌보고 있을 때, 바울이 그에게 보낸 서신이, 

바로 디도서입니다. 

디도서 1장 4-5절 말씀입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장3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디도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고서, 구원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우리의 전도의 열매인, 디도가 꼭 있기를 바랍니다. 

이 디도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자입니다. 

바로 이 디도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공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의도적으로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말하자면, 디도는 하나의 test case가, 된 셈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방인인 디도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할례와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바울은 디도를 할례 받지 않은 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공의회가, 디도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예루살렘 공의회는, 디도를 그대로 받아주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내린 결정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장19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무슨 뜻입니까? 

디도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요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루살렘 공의회가, 이방인인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으라고 요구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루살렘 공의회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수용하는 셈입니다. 

그러면 은혜의 복음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고, 바울의 달음질도 헛된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도, 사도들도,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디도에게 할례를 받으라, 고 강요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결국, 무엇을 뜻합니까? 

바울의 주장대로, 할례와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한 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여기서 궁극적으로, 의도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디도가 예루살렘에서, 억지로 할례를 받는 일이 없음을 밝힘으로써, 

갈라디아 교인들도, 율법주의자들의 그릇된 주장에, 미혹이 되어서, 

억지로 할례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할례를 받거나 율법을 지키는 등, 인간의 행위로 얻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디도를 억지로 할례 받게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4절, 말씀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바울이 디도로 하여금,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했던 이유는, 어떤 사람들, 

때문이었습니까?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때문이라.” 

바로 거짓 형제들, 때문이었습니다. 

거짓 형제는 바로 율법주의자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알곡이 아닌, 가라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서, “거짓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형제의 탈을 쓰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형제가 아니라, 는 뜻입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1장6절에 사용된, “다른 복음”이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전혀 복음이 아닌 것과, 동일한 이치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군대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들어오다,” “엿보다,” “종으로 삼다” 등 이런 용어들은, 

상대방의 진지에 보낸, 정탐꾼들이 침투해서 행하는, 행위를 설명하는 용어들입니다. 

바울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율법주의자들은 겉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탈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정체는, 사단이 보낸, 하수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 아니라, 

사단의 도구가 되어서, 교회를 파괴하려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거짓 형제라 일컫는,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궁극적인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4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 8장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요한 8장36절에서, 다시 한번 반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 우리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몇 가지만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사람이 독을 마시더라도, 해독제만 가지고 있으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해독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얼른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 1장9절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처럼 우리는 죄에게, 매여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사망에서, 자유함도 얻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따라서 죄에 매여 있는 자들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로마서 8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는 죄에서뿐만 아니라, 사망에서도 해방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망을 향하여, 이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고전 15장55절 말씀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은 우리를 이기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합니다. 

영생을 얻은 우리는,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율법에서도,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10절 말씀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율법의 저주 아래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모든 행위들을, 온전히 지킬 육체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13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율법의 규정을 지키지 못해서 얻게 되는, 모든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죄로부터, 사망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은, 믿음이 연약한 이방인들을 미혹해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과 같은, 이방인들을 율법의 종으로 만들어, 

죄와 사망의 법에, 얽매이게 만들고자 하는, 사단의 간계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단의 간계를 간파했기 때문에, 디도의 할례를 일부러,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5절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16장 1-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내용이,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것은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은 후, 얼마 안 되어서입니다.

“바울이 더 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은 디도에게는,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했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상반된 태도를 취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고전 9장22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은 디모데와 함께, 전도여행을 다닐 때,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러서,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었지만,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할례만 받으면, 얼마든지 유대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함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을, 미리 제거했던 것입니다. 

할례는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지만, 

할례를 받는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받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디도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디도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헬라인 이었습니다. 

디도는 완전한, 이방인이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이러한 디도가,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할례가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디도에게는 할례를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는, 한 치의 양보나,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철저한, 신앙관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바쳐, 

순교했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갈 5장 1-4 말씀을 한번 읽고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완전한 구원에, 인간적인 것을, 보태거나 감하면, 

예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에도 이상한 감언이설로, 우리를 미혹하려는, 이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속아 넘어가지 말고,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복음·갈라디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의 진리를 따라  (0) 2020.12.18
또한, 내게 역사하사  (0) 2020.12.12
진리의 복음으로(갈 2장1-5절)  (0) 2020.12.08
하나님께 영광을(갈 1장18-24절)  (0) 2020.12.06
내가 전한 복음(2)  (0) 2020.12.04
내가 전한 복음(1)  (0) 2020.1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