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기적을 만나는 사람들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또한, 내게 역사하사

댓글 0

**복음·갈라디아서

2020. 12. 12.

 

또한, 내게 역사하사 (갈라디아서 2:6-10절)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 여러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하나님의 교회가, 부흥하는 것을 시기합니다. 

그래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교회의 성장을 방해하곤 합니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알곡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는, 것입니다. 

가라지들이 많이 생기면, 곡식들은 절로, 손상을 입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에도, 바로 이같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에, 율법주의자들이 슬그머니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하수인 입니다. 마치 곡식을 해치는, 가라지들과 같습니다. 

복음이 아닌, 이단 사상으로, 순진한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기 시작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바울의 사도직을 부인하며, 바울의 가르침도,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되려면, 예수님을 따르면서, 직접 가르치심을, 받아야 하는데, 

바울은 예수님을 따라다닌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에 , 사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가 전한 복음도,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그의 사 도권과, 그가 전한 복음의, 신적 기원을, 밝혔습니다. 

그런 후에, 갈라디아서 2장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포함한, 예루살렘 공의회가, 

그가 전한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바울과 함께 간, 헬라인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대로, 할례와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그 연속입니다.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둘째,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사도권도, 인정을 했습니다.

셋째,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에게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의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여기서 “유력하다는 이들” 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9절 상반부에서는,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유력하다는 이들” 이나 “기둥 같이 여기는 자들” 이나, 똑같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9절에는, 그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예수님의 제자 요한 등, 세 명입니다.

아마도 여기에 사용된 용어들, 곧 “유력하다는 이들” 이라든지 또는, 

“기둥 같이 여기는 자들” 이라는 용어들은, 주로 율법주의자들이 사용하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유력한 자들이요, 기둥 같이 여기는 자들이라고, 치켜서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비해, 바울은 무명한 자요, 보잘것없는 자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기 위한, 술책이었던 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사용하던 용어를, 그대로 빌려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고 있던, 예루살렘의 사도들, 

소위 말하는 “유력하다는 이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습니까? 

6절 끝 부분을, 다시 보겠습니다.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무슨 뜻입니까? 

아마도 율법주의자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이렇게 말해주기를, 

기대했을 것

“바울 선생,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맞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율법을 무시하면 되겠소? 

그러니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시키시오. 그리고 율법도, 지키라고 말하시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에, 아무것도, 더하여 준 것이 없었습니다. 

할례를 더하지도 않았고, 율법을 더하지도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나,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이나,

전혀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셈입니다. 

결국 바울의 가르침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가르침과는 같지 않다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으로 판명이 난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괄호 속에,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바울은 여기서,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자기에게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무시해서 하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을 존경했습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 2장2절 말씀에 있는 대로, 그는 계시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그들에게 사사로이, 그가 이방 가운데 전파하는 복음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이, 자기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비교하면서, 차별을 두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강하게 변호하기 위해서, 본래 어떤 이들도, 자기에게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력한 자들에 의해서, 사도로 임명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그를 사도로 세우신 분도, 

역시 하나님이셨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들에게서 복음을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받은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의 사도들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람에게라도 자기의 사도직이나, 

사역에 대해서,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라고 말하는 것이지, 

예루살렘 사도들을 무시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이 말씀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원리가 되는 말씀인 동시에, 

늘 명심하면서, 살아가야 할, 참으로 귀중한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베드로는, 세 번에 걸친 환상을 보고, 또 고넬료의 가정에서, 

된 일을 보고서야, 이 같은 사실을, 깨달았던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 34-35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주의자들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례와 무할례를 따졌습니다. 또 유명한 자와 무명한 자를 구분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의 외모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결코 할례와 같은 외모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못 박았던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따지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나 다 귀하게 쓰십니다. 

야고보는 야고보대로,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요한은 요한대로 귀하게 쓰시며, 

바울은 바울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조연, 즉, 엑스트라가 없습니다, 모두가 주인공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많이 배웠느냐, 아니면 조금 밖에 배우지 못했느냐, 

또는 우리가 가진 것이 많으냐, 적으냐, 이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 

우리는 그저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외모를 보시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의 외모를 취하려,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외모를, 취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보다 나은 사람 앞에서는, 비굴해지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우리 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는,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 무시하면,

우리도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서, 똑같이 무시당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두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려 들지 말고,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주께 대하는 심정으로, 대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기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에, 

더하여 준 것이 없이, 그대로, 인정했음을 밝혔습니다. 

바울은 이제 7-9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신의 사 도권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둘째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한 사실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7절 말씀입니다.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에게, 더하여 준 것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보게 된 사실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처럼,

바울은, 무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무할례자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헬라어를 잘 했습니다. 

또한, 이방 문화에도, 익숙해 있고, 로마의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어부로 있던 중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그가 이방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면, 통역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자연히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적합한 인물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사역을 하는 지역과 대상은, 서로 다르더라도,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전혀 다르지 않고,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게 되었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았겠습니까?  

갈라디아서 1장23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그들은 바울에 대한 소문을 듣고서, 자기들이 전하는 복음과, 똑같은 복음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갈라디아서 2장2절 말씀입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또한 바울이, 자기들에게 제시한 복음과, 그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들으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그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는, 간증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예루살렘 사도들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택함을 받은 사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8절 말씀은, 7절과 9절 사이에, 삽입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7절은 문맥상 9절과 바로 연결이 됩니다,

그리고  8절은, 바울이 7절에서 9절로 넘어가기에 앞서 잠시, 

자신의 확신을 피력하고 있는, 말씀으로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7절과 9절을 연결하고, 그다음에 8절을 놓고,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7절 끝에 보면 “보았고”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9절 상반부에는 “알므로”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보기도 하고, 알기도 함으로써,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아울러, 8절에서는, 바울 자신도, 그 사실에 대한, 강한 믿음과 확신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맥의 편의를 위해, 9절 말씀부터,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이, 180도로, 완전히 변화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는 본래 유대교에 열심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멸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가 전에 박해하던, 그 믿음을, 도리어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여러 곳에, 교회도 세워졌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이,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로, 된 일들이었습니다.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같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7절에 기록된 바대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게 된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8절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바울의 삶과 사역에, 베푸신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자연스러운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도, 예루살렘 공의회가 끝난 뒤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하는, 동역자의 관계인 것을, 확인하는 악수를, 나누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들 사이에, 한 가지 합의된 사항이 있었음을,

바울은 9절 하반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바나바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로 가고,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은,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에게로 가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역할 대상과 장소를, 서로 간에, 구별하기로 합의를 본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 전파에, 효율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서 복음을 전하든지, 그 내용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맡겨주신 분도, 그들에게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분도,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도, 같은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그들이 친교의 악수를 함으로써,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그 대부분인 21권을, 기록한 사람들이, 서로 굳게, 손을 잡은 셈이 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신약성경, 야고보서를 기록했습니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후서를, 기록했습니다.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13권의 신약성경을 기록했습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21권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 후에, 단 한 번도, 교리적인 문제로,

바울과 논쟁을 벌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뒤에, 베드로는, 벧후 3장 15-16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바울을 사랑하는 형제로, 지혜로운 형제로, 높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쓴 편지들을, 다른 성경들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 가운데, 대표자인 베드로가, 그의 서신에서,

바울의 사 도권을, 분명히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로서, 바울은 사도가 아니요, 그의 가르침은 잘못이라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거짓으로, 들어 나고 만 것입니다.  

 

이제 다시금, 8절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이는 바울의 강한, 확신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것처럼,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신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서, 바울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자기에게도, 역시 역사하신 것을, 

들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갈리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살아가던 어부로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베드로였지만, 그가 한번 설교를 함으로써, 유대인들이 삼천 명이나, 회개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또한, 병도 고치게 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리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40-42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하나님의 역사는, 베드로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도, 똑같이,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전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들도, 많이 세워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병든 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 또한, 죽은 자도, 다시 살렸습니다. 

사도행전 20장 9-12절 말씀입니다.

“유두고 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 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바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귀한 사명을 맡기실 때는,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도, 반드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우리의 순종이요, 우리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작은 일에 충성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일을, 맡기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그 일을 감당하기에 필요한, 모든 것들도, 풍성하게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6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자신의 복음을, 그대로 인정했음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7-9절에서는, 그들이 바울의 사도 됨을, 인정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마지막, 10절에서는, 바울에게, 오직 한 가지를, 부탁했는데, 

그것은, 전혀 교리와는 상관이 없는, 실천적인, 문제였습니다.

 

셋째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했던 것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비롯한,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의 복음과 그의 사 도권을, 

인정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서로 간에 합의된 사항은, 사역지를 서로 다르게, 

구별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로 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무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기로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서, 서로 간에 합의한 사항이,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합의라기보다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과 바나바에게, 부탁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써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루살렘 교회는, 급속히, 부흥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여 명의 성도들에 의해서, 복음 전파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수는 3천 명으로, 또 5천 명으로, 계속해서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에 대한, 유대교의 핍박이 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신앙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이들의 문제를, 책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4-45절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그러나 믿는 이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니까, 예루살렘 교회의 재정이, 

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비교적 넉넉한, 이방 교회들과 관련을, 맺고 있는, 바울과 바나바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도와줄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은, 교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실천적인 문제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점에 대해서도, 바울의 입장은, 어떠했습니까?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그들의 부탁이 따로 없더라도, 바울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구제하는 일은, 

본래부터, 힘써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기가 예루살렘 공의회와는, 교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까지도,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던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7-3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때는,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리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중에 아가 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부탁하기도 전에, 이미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기 위한, 구제헌금을, 전달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후에도, 구제에 힘썼습니다. 

 

바울의 서신에는, 구제에 대한 교훈이 많습니다. 몇 구절만 찾아보겠습니다. 

로마서 12장13절,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에베소서 4장28절,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딤전 6장18절,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특별히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그에게 부탁한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15장 25-2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 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 고전 16장 1-4절 말씀입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바울이, 구제하는 일을, 힘써 행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형편이 되는대로, 이웃을 돕는 일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에게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셨던 것처럼, 바울에게 역사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필히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똑같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해서, 그들을 구원받게 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복음·갈라디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신득의(以信得義),  (0) 2021.02.05
복음의 진리를 따라  (0) 2020.12.18
또한, 내게 역사하사  (0) 2020.12.12
진리의 복음으로(갈 2장1-5절)  (0) 2020.12.08
하나님께 영광을(갈 1장18-24절)  (0) 2020.12.06
내가 전한 복음(2)  (0) 2020.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