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우계 성혼(牛溪 成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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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론

2013.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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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서원에서 화석정, 조선성리학의 절정. 우계에서 율곡까지

 

장파리와 임진강 사이에는 37번 국도가 곧게 뚫려서 도로위에서도 임진강을 감상할 수 있다. 강변도로는 임진리까지 쭉 이어지는데 눌로천이 합류하는 교량위에서는 석벽을 따라 화석정까지 길게 흘러내리는 물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물처럼 역사는 쉼 없이 강을 타고 흘러간다. 사람들이 들어온 이후로 임진강은 역사의 한순간, 한때를 놓치지 않고 꼬박꼬박 짚어서 흘러왔다. 전곡에서 선사인을, 칠중성에서 삼국을, 장단나루에서 고려를 만난 임진강은 눌노천이 합류하는 언저리에서 조선의 거학 두 사람을 만난다.

 

16세기 중반 어느 날 임진강에 작은 배 한 척이 떴다. 서울과 개성 두 도읍을 잇는 임진나루 근처였다. 문득 작은 배가 물결에 흔들린다. 한 사람은 놀라 당황하고 또 한사람은 태연히 시를 읊었다. "어찌 변화에 대처하는 도리도 듣지 못하였단 말인가?" 흔들리는 배를 바로 잡으려던 사람이 질책했다. 시를 읊던 이가 대꾸했다. "우리 두 사람이 어찌 익사할 리 있겠는가." 잠시 후 풍랑은 가라앉았다.

 

임진강의 유별난 풍치를 보여주던 현무암 석벽은 임진나루를 앞두고 자취를 감춘다. 내소정 임진강 팔경시는 이 마지막 경치를 적벽 뱃놀이로 읊는다. 고려팔경은 이곳을 박연폭포와 나란히 놓았다. 정선, 김홍도 같은 이는 석벽을 그림으로 그렸다. 배 위의 두 사람은 이곳의 선경에 빠져보려 했을 것이다. 우연히 닥친 위험에 한사람은 신속히 대처하려 했고 다른 사람은 모른 척 태연했다. 태연한 사람은 임진나루 위 화석정의 주인 율곡이고, 신속한 이는 이웃 파산의 우계였다. 조선을 대표하는 거학이 임진강에 이웃해 있었다.

 

단지 이웃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조선 성리학을 구분하는 일대 논쟁을 펼치며 교우했다. 철학사는 이를 '우율논변'으로 정리한다. 율곡 37, 우계 38세인 1572년에 펼쳐진 이들의 논쟁은 아홉 차례 서신을 주고받으며 일 년 간 진행됐다. 논쟁은 우계가 율곡에게 사단칠정에 대해 묻는 편지에서 발단이 된다.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으며, 무슨 힘으로 움직이는가? 그 속에 사람은 어떻게 관여하는가? 하는 우주의 근원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우계는 퇴계의 학설을 따랐고 율곡은 자신의 사유를 통해 얻은 결론을 설득했다. 아홉 번의 서신을 통해 두 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다듬었고 일부는 수정하기도 했다.

 

우율의 철학사적 높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학설을 현재에서 바라보는 일은 길고도 지루한 과정을 동반한다. 다만 서로 다른 이들의 견해는 벼슬에 나아가는 데도 영향을 미쳐 율곡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나선데 비해 우계는 물러나 학문에 전념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율곡은 우계가 벼슬하기를 바랐고 그를 적극 추천한다. 우계는 율곡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져 학문을 세우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율곡과 파산 사이 6킬로미터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둘은 열아홉, 스물에 만나 평생을 함께 한 벗이자 도반이었다. 논쟁의 바탕에는 학문보다 깊은 우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올해도 저물어 온 산엔 눈 내리는데

들길은 가느다랗게 숲 사이를 가른다.

소를 타고 어깨 들썩이며 어디로 가나

우계 가에 그리운 벗을 찾아 간다네.

저물녘 사립문 두드려 맑은 벗과 인사하고

작은 방에 털옷 입고 이불까지 덮었네

긴 밤 고요한데 마주 앉아 잠 못 이루니

홑벽엔 등불만 깜빡깜빡 잦아든다.

아 슬퍼라 반평생에 이별도 많구나

다시 생각나네 온산에 험난했던 길

이야기하며 뒤척이는데 새벽닭 울고

고개 드니 창문 가득 서릿 달만 시리네."

 

눈오는 날 율곡은 마을을 떠났다.

율곡이 우계와 이별하며 읊은 시다. 율곡은 눈 오는 날 소를 타고 우계를 찾아갔다. 둘은 기약 없는 이별에 잠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인다. 험난했던 길이 떠오르고 담소는 깊어진다. 율곡이 세상을 뜬 지 몇 해 후 우계는 마치 이 날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한 글을 한편 남긴다.

 

"율곡이 10년 전 나를 찾아와 시냇가 집에서 함께 잤습니다. 그때는 가을이어서 창 밖 귀뚜라미들이 울고 있었습니다. 수천 마리가 떼를 이루어 경쟁하여 울며 잠시도 쉬질 않았고 새벽종이 울릴 무렵에 그 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내가 탄식하기를 "미물도 오히려 그 직분을 다함이 이에 이르는 것입니까?" 했더니 율곡이 탄식하기를 "알고 깨닫는 것이 많은 사람들은 이해관계를 깊이 따져 이익을 택하고 편안한 것에 나아가고 게을러서 매일 안일을 탐하는 까닭에 그 천성을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틀은 절로 움직여 거짓으로 되질 않고 그 천연의 직분을 다하기 때문에 미물로부터도 그것이 나타나는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그때 내가 율곡의 뛰어난 식견을 기뻐하며 잊지를 못했습니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새벽까지도 감회에 젖어 잠 못 들고 있는데 사방에서 벌레 소리가 들려와 완연히 그때 가을 같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목숨은 아직 죽지 않았으나 율곡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나는 어릿어릿하여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날마다 더욱 어둡고 고루하여져 저 미물에 부끄러워짐이 심해졌습니다."

 

이때가 1587년이니 율곡이 죽은 지 3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마치 소를 타고 찾았던 그날의 대화를 보는 듯한 정경이다. 한밤에 나눈 이야기에서는 이이가 전개한 인심도심론의 정수가 읽힌다. 우계는 논쟁을 벌이던 주제를 귀뚜라미 소리에서 발견하는 율곡의 식견에 놀라워한다. 또한 늘 돌이켜 자신을 살피던 우계의 면모도 나타난다. 율곡은 눈을 맞으며 왔고 이 날은 가을이었으니 실제로 같은 날의 정경은 아니지만 이들의 헤어짐은 늘 이런 식이었던 모양이다. 다른 이별시에서 율곡은 "열흘 비로 마주앉아 대화하지 못하고 헤어짐을 생각하자니 마음 쓰리네" 하며 만나지 못하고 떠남을 아쉬워한다.

 

그만큼 이들은 자주 만나고 헤어졌다. 우계는 율곡과 함께 시냇가에 나갔던 일을 "높은 나무 시냇가에 둘러 있으니 맑은 그늘 낚시터에 흩어지네. 한가로운 사람 손에 책을 펴 보며 서로 마주하여 돌아갈 줄 모르네" 하고 읊는다. 율곡 또한 우계와 소요산을 찾은 일을 시로 남긴다. "풀이 산 계곡에 우거지고 비가 다리를 무너뜨려 어느 곳이 소요산 가는 방향인 줄 모르겠네. 서로 만난 것이 일찍이 아는 이 같아 연기 덩굴로 끌어들여 달밤을 함께 하네"

 

율곡이 살던 율곡과 우계가 살던 우계는 실로 지척이다. 두 곳에는 지금도 화석정과 파산서원이 있어 거학들의 면모를 돌이켜 보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들의 묘소 또한 그만한 거리로 임진강의 지류인 동문천변 향양리와 자운서원에 자리해 있다. 실록에 의하면 1740년 영조는 개성을 향하던 길에 파주로 들어와서 성혼의 묘를 지나게 된다. 영조는 '묘를 향해 길가에서 교에 앉은 채로 경례하니 감개가 더욱 깊으오'라는 제문을 짓는다. 또한 화석정에 당도해 율곡을 생각하면서 '저 강물과 수목을 바라보니 저절로 슬픔이 깊으오'라는 말을 지어 올린다.

 

율곡은 소를 타고 밤나무골을 출발한다. 말미산 모퉁이를 돌아나와 매내개울을 건넌다. 빙곡동을 지나 섭절이, 장포까지 강을 거슬러 길이 이어진다. 파평산 자락이 임진강으로 흘러들면서 길은 고갯마루로 휘어 오른다.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한 산길이다. 주위는 눈으로 덮여있고 소가 걸을 때마다 율곡의 어깨도 들썩인다. 고개를 내려서면 새말이다. 멀리로 우계의 마을이 어림된다. 윤씨가 나왔다는 연못을 지나 소개로 이어지는 개천에 이르니 어느덧 저물녘이다.

 

우계는 지금의 눌노천이다. 고드내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윤관과 웅녀의 전설이 담긴 곰소를 이루고, 다시 흘러 샘내가 되었다가 소개 즉 우계에서 임진강으로 흘러든다. 우계를 배향한 파산서원은 파평면 눌노리 눌노천가 넓은 터에 조용하게 자리해 있다. 강학공간 없이 사당만 복원돼 있는데 앞쪽으로 느티나무 고사목이 있고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풍채 좋던 느티나무는 언제부턴가 시름시름 앓더니 온갖 수술과 주사에도 보람 없이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20년은 되었다는데 베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어 서원의 유별난 풍경이 됐다. 담장 없이 휑한 마당과 푸른 빛을 잃은 고사목은 세월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강학공간이 없는 서원은 실은 사당과 다를 바 없어서 죽은 듯 조용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그곳에 사람이 넘쳤을 때 폐단이 많아서 그들은 파당을 만들고 예산을 함부로 써 문제가 되었다. 대원군은 이를 혁파했는데 파산서원은 그때도 철폐되지 않고 유지됐다.

 

사위는 조용하고 풀벌레 소리는 세월을 넘어 지금도 요란하다. 고요한 마당에선 햇살에 고추가 말라가고 있다. 고요란 진공과 달라서 하나하나 소리를 더욱 또렷하게 들려준다. 고즈넉한 풍경 뒤에는 그러나 고단한 농민들의 노동이 있다. 고추가 빛깔 좋게 말라가기까지의 수고와 노력을 풍경은 보여주지 않는다. 율곡은 인간이 이해를 따져서 본성을 다하지 못하는데 비해 벌레들은 천기가 스스로 움직여 닦지 않아도 뜻을 드러낸다고 했지만 당시 백성들은 이익을 생각하기에 앞서 풀벌레처럼 밤새워 일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율곡의 성리학이 고작 한가로운 사유가 아니기 위해서 그의 발은 좀 더 백성들 가운데로 옮겨져야 한다. 파산서원과 개울 사이 경계로는 젊은 느티나무들이 풍성해서 한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서원의 분위기를 받쳐 주고 있다.

 

<임진강 기행 / 이재석>

 

 

묘소는 파주읍 향양리 산 8-1번지이고, 우계기념관은 향양리 390-57로 되어 있는데, 기념관 주소를 입력하고 찾아가는 것이 훨씬 편하다.

 

홍살문

 

우계사당

 

신도비: 김상헌이 글을 짓고 김집이 글씨를 썼다.

 

 

 

성수침과 파평윤씨의 묘.

 

 

 

 

우계 성혼 묘.

 

묘비: 김집이 글을 짓고 윤선거가 글씨를 썼다.

 

 

묘소 앞으로 선유공업단지가 내려다보인다.

 

 

 

 

 

 

 

제39강 사단칠정이란 무엇인가?

 

1. 七情

 

四端이라는 말은 孟子라는 책에서 온 것이다.

 

七情이라는 말은 中庸에서 온 것이다. 정확하게는 禮記에서 온 것이다. 七이라는 숫자는 사실 의미가 없다. 인간의 감정을 7개로 나누든, 10개로 나누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칠정이라는 표현이 처음 나타나는 곳은 《예기》, <예운>편으로 인간의 여러 감정들을 기쁨(희,喜), 노여움(노,怒), 슬픔(애,哀), 두려움(구,懼), 사랑(애,愛), 싫어함(오,惡), 바람(욕, 欲)의 일곱으로 묶어 나타내었다. 후대에서는 대개《중용》에서 말하는 기쁨(희,喜), 노여움(노,怒), 슬픔(애,哀), 즐거움(락,樂)을 가리켜 칠정이라 하였다.

 

七情이 中庸에서는 四情이 된다. 喜怒哀樂이 그것이다.

 

여기서 哀怒는 인간의 감정 가운데, 비극적 감정이고, 喜樂는 희극적 감정이다.

 

哀怒 : pessimistic sentiments(비극적 감정)

喜樂 : optimistic sentiments(희극적 감정)

 

동양 사람한테는 뇌라는 개념이 없다. 감정은 배(腹)에서 생긴다고 여겼다. 생명의 중추가 모두 복부에 있다고 여겼다. 臟器라는 말의 臟은 氣를 저장하는 곳이다. 臟에 藏하는 것이 바로 喜怒哀樂이라고 여겼다.

 

藏 : 감출 장, 간직한다는 뜻

臟 : organ(신체의 장기)

 

장기는 희노애락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뇌(Brain)의 명령체계만은 아니다.

 

몸을 중간으로 나누어, 위를 上焦라 하고, 아래를 下焦라 한다.

상초는 肺脾이고, 肝腎은 하초에 들어간다.(이제마)

 

腎을 피를 거르고, 오줌을 생산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데, 동양에서 말하는 腎은 인간의 성적 기능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腎(신)은 현대말의 신장(Kidney)가 아니라, 인간의 생식기능(Reproductive Function)과 하초의 기운 전체를 포괄하는 특수 개념이다.

 

한의사가 신장이 나쁘다는 말은 Kidney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서양의학과 개념이 다르다. 서양 사람한테 간은 피가 들어가서, 효소를 만들고, 영양소를 저장하고, 독소를 없애는 곳으로 여기며, 피를 우리 몸에 맞게 재조합하는 장소로 본다. 하지만 동양인의 간은 그런 것과 다르다. 간과 Liver는 다른 것이다. 현대에 와서 같이 쓰고 있는 것이다.

 

肝은 간(liver)이 아니다.

肝은 木氣의 저장소일 뿐이다.

 

肺도 마찬가지다. 폐는 호흡을 통해, CO2와 O2의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보는데, 동양인의 폐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개념이 전혀 다른 것이다

 

肺는 폐(Lung)가 아니다. 그것은 상초의 기운을 총체적으로 지칭한다. 金氣를 저장한다.

 

 

腎은 水氣을 저장한다. 脾는 土氣를 저장한다.

 

이런 臟器에 감정이 저장된다. 肺가 哀, 脾가 怒, 肝은 喜, 腎이 樂을 저장하고 있다.

 

上焦 : 肺 - 哀(事務)

         脾 - 怒(交遇)

下焦 : 肝 - 喜(黨與)

         腎 - 樂(居處)

李濟馬(1837-1900)

 

喜樂, 기쁘다와 즐겁다는 어떻게 다른가? 위의 구분에서 보듯이, 樂은 섹슈얼하게 즐거운 것이다. 喜는 黨與, 즉 사람을 사귀면서 즐거운 것이다. 간이 큰 사람이 사교성이 좋다.

 

밑에서부터 보면, 공간적으로 위로 갈수록 넓어진다.

 

신이 발달한 사람은 세계가 좁다. 폐가 발달한 사람이 세계가 넓다. 이상주의자들이다. 신이 발달하면, 色을 밝힌다. 자기 세계가 좁다. 간이 발달한 사람을 잘 먹는다. 상초가 발달한 사람들은 어깨가 떡 벌어져 있고, 이상주의자가 많고, 괴벽한 사람들이 많다. 매사에 슬퍼하길 잘 한다. 哀情이 발달한다. 비위가 좋은 사람들이 화를 잘 낸다. 이에 대한 재미있는 근거도 있다. 이것도 세계를 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런 것은 이제마 선생의 인간을 바라보는 위대한 방식이다.

 

七情은 감성의 세계이다.

 

2. 四端

 

四端은 仁義禮智를 말한다.

 

주리론자들은 인간을 사단 중심으로 보는 것이고, 주기론자는 인간을 칠정 중심으로 본다.

 

主理論者 : 인간은 四端 중심으로 본다.

主氣論者 : 인간은 七情 중심으로 본다.

 

四端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맹자에서 말하길, 惻隱之心은 仁之端也이라고 했다.

 

惻隱之心 仁之端也 (측은지심 인지단야)

羞惡之心 義之端也 (수오지심 의지단야)

辭讓之心 禮之端也 (사양지심 예지단야)

是非之心 智之端也 (시비지심 지지단야)

-맹자-

 

뒤쪽의 端이 4개라서 四端이라고 한다.

 

3. 心性

 

동양 사상을 논할 때, 心性이라는 말을 알아야 하는데, 心은 발현된 상태이다. 心은 이미 情의 세계이다. 性이 본체적인 세계이다.

 

心 : 발현된 현상적 측면

性 : 발현되기 전의 본체적 측면

 

性은 本性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本心은 내 감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心과 性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心은 氣의 차원이고, 性은 理의 차원이다.

 

4. 四七論爭의 단서

 

문제가 된 것은 사단과 칠정이 완전히 레벨이 달랐다면, 문제가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惻隱之心은 仁之端也이라고 했다. 즉 心이 端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仁은 端이 아니라는 것이다. 仁이 발현된 단초로서의 마음(心)이 된다.

 

四端의 端은 이미 性이 아닌, 心의 차원이다.

그것은 이미 발현된 마음이요, 감정일 뿐이다.

 

맹자의 논리적 구조로 보면, 四端도 이렇게 七情이 된다. 心이 된다. 情感이 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갈 때, 발현되는 마음이 측은지심이다. 그것은 이미 감정이다. 그리고 그것은 仁이 발현된 단초이다.

 

예를 들어, 큰 빙산이 있다면, 물 밖으로 조금 나와 있는 것이 바로 端이다.

 

端 = Tip(끝, 단초)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측은지심이고, 물 속에 있는 큰 덩어리가 바로 仁이다.

즉 측은지심은 仁의 端이다.

 

사단과 칠정이 나누어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맹자 원문에 따르면, 四端이 모두 七情 속에 들어가 버린다. 측은지심은 인이 발현된 단초로서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측은지심은 性이 아닌 것이다. 측은지심은 理의 레벨이 아니고, 氣의 레벨이 되는 것이다.

 

기고봉이 편지를 써서, 이퇴계에게 틀렸다고 말하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퇴계는 ‘四端은 理之發이고, 七情은 氣之發’이라고 했지만, 기고봉은 그렇게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사단도 칠정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일종의 좋은 감정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다.

 

사단도 칠정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 기고봉-

 

기고봉은 사단을 칠정에서 분리할 길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확한 이야기였다. 사단칠정논쟁은 논리적으로 주기론자가 이기게 되어 있다.

 

四七論爭은 主氣論者가 논리적으로 우세한 틀 속에서 출발한 것이다.

 

만일, 맹자의 문장 자체가 惻隱之德은 仁也라고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惻隱之心이라고 했으며, 성리학적 논쟁에서 心(마음)은 性에 비해 한 단계 아래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기고봉은 첫 편지에서, 未發 상태가 四端이고 理이며, 발현되면 그것이 七情이고 氣라고 말하고 있다.

 

人心未發則謂之性

己發則謂之情

- 기고봉

 

사단과 칠정은 논리적으로 구분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5. 퇴계의 생각

 

우리말에 꼴린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인간의 欲이라는 것이다. 꼴린다는 말에는 지향성이 있다. 움직이는 것이다. 명예, 돈, 色에도 꼴린다. 주기론자의 명제는 ‘꼴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꼴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주기론자의 제1명제-

 

주리론자는 주체 없이 아무것에나 다 꼴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꼴리는 것을 주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의 도덕적 주체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주기론자는 중용에서 말하듯이, 상황에 맞게 제대로 꼴리면, 그것이 바로 도덕이라고 보는 것이다.

 

퇴계는 상황에 맞게 꼴릴 때, 제대로 꼴렸다고 해도, 그렇게 상황에 따라 변조되는 도덕은 불안하다고 보았다. 마음대로 해석이 되는 도덕이므로, 그런 말초적인 도덕을 理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논쟁거리가 된다. 아주 치밀한 논쟁이 일어난다.

그런데 왜 우리 조상들은 몇 백년간 이런 논쟁을 했을까?

 

요즘의 심리학, 철학의 모든 문제는 우리 조상들이 논쟁한 학문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우리의 과거 문화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그들은 이미 20세기, 21세기 학문을 모든 섭렵했다. 이 모두가 조선조의 건국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이다.

 

사단과 칠정 모두 꼴리는 것이다. 측은지심은 이미 심(마음)이기 때문에 꼴린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꼴린 것이다. 색에 꼴리면 인간 악의 근원이 된다. 우리가 악이라 부르는 것은 전부 꼴리는 것이다. 돈, 여자 등에 꼴리는 것이다.

정치가가 잘못 꼴려서 우리나라가 망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단칠정논쟁과 현재의 사회 논쟁은 똑같은 것이다.

 

퇴계는 사단과 칠정이 모두 꼴리는 건데, 사단이 도덕적 꼴림이고, 칠정이 감정적인 꼴림이라면, 그렇게 꼴리게 하는 근원인 어떠한 마음의 원천이 서로 다른 모양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을 所從來라고 하였다.

 

四端 ----->本然之性(理)

       (所從來)

七情 ----->氣質之性(氣)

 

사단은 純善으로 순수하게 선한 것이고, 칠정은 雜스러워서 때론 도덕적으로 꼴릴 수도 있지만, 이것은 雜하기 때문에 잘못 꼴릴 위험성이 많다는 것이다.

 

四端 : 純(순수하다)

七情 : 雜(잡스럽다)

 

인간에서 칠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사단의 순수한 뿌리가 있어야, 비로소 인간은 도덕적인 주체가 된다고 보았다.

 

6. 의미와 과제

 

조선초기부터 사대부 질서가 형성되었다. 하루아침에 과거를 통해 벼슬을 얻게 되는데, 조선조에서 볼만한 관직은 약 200개정도였다. 과거에 급제를 해도, 제대로 된 포스트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 자리를 놓고 서로 싸웠다.

 

사대부 양반 관료 체제를 성립함에 있어서, 문제가 된 것은 이 사람들의 도덕적인 질서와 기강에 대한 것이었다. 즉 관료의 도덕적인 질서와 기강을 어떤 식을 잡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四七논쟁은 기본적으로 조선조 士大夫들의 도덕적 기강에 관한 것이다.

 

전라도 광주는 奇高鄭朴氏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퇴계는 영남 사람이었다. 이 사단칠정론은 묘하게도 우리나라의 영호남의 대립과 연결된다. 신라, 백제부터 이어온 다툼이 조선조까지 연결된다.

 

경상도 쪽의 안동권, 안동김씨 등 도학자들을 보면, 철저하게 아직도 종법 사상에 빠져있다. 전라도 쪽은 그래도 융통성이 있다. 전라도는 예술적이다. 판소리꾼도 경상도에서 나오지 않는다. 경상도 시집살이가 더 힘들다.

 

전라도 사람들은 주기론적 성향이 강하고

경상도 사람들은 주리론적 성향이 강하다.

 

주리론자들은 본래 이념적인 인간에게는 순수한, 꼴림에 좌우되지 않는, 본연적인 도덕질서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이 맹자가 말한 성선의 본이며, 그것이 없으면 금수라고 여겼다.

 

주기론자들은 감정이 제대로만 돌아가면, 만사가 다 잘 된다고 보았다.

 

이 둘은 살아가는 인생 스타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퇴계는 四端의 所從來로서의 理를 독자적으로 확보함으로써 孟子의 性善의 의미를 완성했다고 믿었다.

 

내용적으로 보면, 나이 많은 퇴계는 여당이고, 젊은 기고봉은 야당 성향이 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도덕적인 질서로 억누르려고 하는 것에 대응한 싸움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퇴계는 현실 관료 정치에서 물러나 있는 사람이었으며, 기고봉은 서울에서 관직에 몸 담고 있었다. 따라서 어떤 의미로 보면, 기고봉이 여당일 수 있다. 현직 관료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자고 하는 말일 수 있다. 퇴계는 야당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선비로서의 도덕적인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하며, 상황적인 윤리로 처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퇴계가 무서운 야당일 수 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主理 : 여(?) 야(?)

主氣 : 야(?) 여(?)

 

이 사람들의 계급 배경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당시 조선조는 사족 간 여러 분파가 생겨났다. 이런 분파가 나중에 당쟁이 된다. 이 사람들이 어떤 입장이고, 무엇을 대변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바로 조선사를 규명하는 열쇠이다.

 

이것은 나중에 젊은 사람들이 진실하게 따져 봐야할 문제이다.

퇴계의 입장과 기고봉의 입장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주기론과 주리론은 사회체제론까지 연결된다.

 

 

7. 퇴계의 理氣互發設(이기호발설)

 

 

우리는 주리론자인 이퇴계를 정통 주자학자로 생각하기 쉽다. 주기론자인 기고봉은 그 정통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깊게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이퇴계를 朱子學의 적통으로 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주자학의 이단이다.

 

주자는 太極動而生陽이라고 했다. 태극에는 動하게 하는 理만 있고, 태극 자체는 작위가 없고, 철저하게 무위라고 했다. 작위가 있으면 그 자체가 꼴리는 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氣에 종속이 된다. 純하지 않고, 雜하게 된다.

 

太極動而生陽 - 주렴계 -

 

태극에 動性을 부여할 수 없다.

태극은 수구한 理며, 作爲가 없으며, 無爲다.

- 주자 -

 

作爲 : 꼴림

 

주자의 입장은 태극에 動性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퇴계가 말하길, 四端은 理之發이라고 했다. 즉 리가 꼴린다는 말이다.

 

주자 : 理는 꼴리지 않는다 : 정통

퇴계 : 理는 꼴린다 : 이단

 

퇴계의 理之發은 기고봉에게 지독한 비판을 받는다. 기고봉이 논리적으로 절대로 꿇리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보면, 기고봉이 맞다. 그런데 퇴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억지를 쓰고 있다. 칠정으로 사단이 결코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뭔가 사단의 뿌리는 다르게 설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퇴계는 기고봉의 비판에 따라 나중에 주장을 바꾼다. ‘四端은 理가 발현되고, 氣가 거기에 따라가고, 七情은 氣가 발현되고, 理가 그것을 탄다는’ 이야기를 한다.

 

‘탄다’은 말을 타는 것과 같다. 말은 꼴리는 놈이고, 말을 탄 사람은 말을 조정한다. 그 조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성이다. 말 자체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꼴리는 것이다.

 

四端 : 理發而氣隨之

七情 : 氣發而理乘之

 

이것을 퇴계의 理氣互發設(이기호발설)이라 한다.

 

퇴계는 이기호발설로 기고봉의 주장에 대답을 한다. 그 후에도 기고봉이 집요하게 논쟁을 이끌자,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무리하게 말하는 게 아니고, 다 받아주고, 최종적으로 여기는 내가 양보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8. 사칠논쟁의 영향

 

퇴계는 理를 움직이는 주체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주자학에 대한 최대의 이단이다. 주자에 따르면, 理는 작위가 없고, 무위이므로 발하면 안 된다. 그런데 퇴계는 기고봉과의 싸움에서, 理는 소극적인 도덕성이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는 적극적인 도덕의 주체이며, 그것이 발현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도덕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理가 발현된 것이라고 말한다.

 

나중에 이퇴계를 이율곡이 부정한다.

 

@ 이율곡(李栗谷, 1536~1584)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장, 퇴계의 이기호발설을 부정했다.

 

그 이율곡을 이어가는 것이 노론파인 우암 송시열이다.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이율곡의 학동을 잇고, 이퇴계를 이단으로 배격했다. 老論의 거장

 

이런 논쟁은 복잡하게 이어지며, 당쟁과 연결이 된다.

나중에 효종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복상문제를 가지고 싸우는데, 이것 역시 이 논쟁과 연결이 된다.

 

기해예송(己亥禮訟)때 朞年服(1년만에 복상)을 주장하여 南人들을 거세하였다.

 

조선의 법제 문제까지 모두 이 논쟁과 관련이 있다. 사칠논쟁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理의 작위를 인정하지 않고, 순수한 원리로 인정을 하고, 氣發만 인정하게 되면, 왕권을 억제하기가 더 쉽다. 체제론으로 가서, 왕은 추상적인 원리로 남겨두고, 왕은 움직이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 왕은 꼴리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꼴리는 건 밑에 있는 관료라고 말한다. 즉 관료가 백성을 지배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면 귀족정치가 되는 것이다.

 

suggestion : 암시

 

이건 하나의 암시일 뿐이다. 실제로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사실 우암 송시열의 노론파 입장은 이런 것이었다. 그래서 노론은 리발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퇴계를 비판한다.

 

이퇴계라고 하면 조선 왕조에서 하나의 주류파처럼 여겨지지만, 실은 역사의 철저한 야당일 수 있다.

 

우리의 선인들은 주자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자신들이 살려는 세계를 어떻게 구성해야 되고, 자신의 이론적 입장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 그리고 우리 후손들을 어떠한 가치관에 의해 길러내야 할지 매일매일 노심초사 고심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예전 유생들은 그냥저냥 책이나 읽으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적 깊이가 있는 훌륭한 선인들의 후손이다.

    

<출처: http://cafe.daum.net/gihaegijik/G1b4/39?docid=1QZlN|G1b4|39|20121105202941&q=%BB%E7%B4%DC%C4%A5%C1%A4&svc=top3

                                                                             

 

 

 

 

여섯째, [논어]와 [맹자]의 예를 들어 뜻을 헤아리며 차분히 읽고, 바르게 생각하는 독서방법을 통하여 스스로 깨닿는 체험을 중시하라.

일곱째, 반복하여 독서하고 이로써 마음을 살펴보고, 글에 담긴 뜻을 착실하게 실천하라.

 

 

 

 

 

 

 

 

 

 

 

 

 

 

 

 

 

성혼(成渾, 1535625~ 159866)은 조선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본관은 창녕이다. 성수침의 아들이자 문하에서 수학하다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배웠다. 이때 이이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거듭 사퇴하였으나 이이의 권고로 출사했고, 이이 사후에 출사하여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다.

 

서인 영수로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복시(覆試)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할 뜻을 세웠다. 선조 때 여러 관직에 제수되고도 나가지 않았으나, 이이의 거듭된 추천으로 출사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심의겸이 몰락한 뒤 서인을 지도하였다. 그 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고,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최영경, 정개청을 구원하려다가 실패하면서 역으로 동인들로부터 그가 최영경, 정개청 등을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그를 돕고 평양에 올라가 선조를 만났으나, 왜란 초 선조가 피난할 때 행차하는 길목에 살면서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동인 이홍로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후 죽은 후에까지 동인들과 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윤선거의 외할아버지이자 윤증의 진외증조부이다.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이 이기일원론의 절충을 취하였으며, 학문 연구를 하다 생애 후반에는 관직에 투신하여 찬성(讚成)에 이르렀고, 서인의 당수로 활동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1594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어 취임했다. 그해에 좌찬성으로 승진했고 비변사 회의에 참여하여 시무 12조를 올렸다. 1594년 좌참찬으로 있을 때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한 일이 문제되어 매국노로 낙인찍혀 정계에서 은퇴한다. 율곡 이이, 송강 정철, 구봉 송익필과 친분이 깊었다. 조헌, 김덕령, 정철, 윤황, 황신, 이귀, 김자점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아버지 성수침과 휴암 백인걸의 문인.

 

출생과 생애 초기

 

우계 성혼은 1535년에 한성부 순화방(順和坊)태어났다. 아버지는 사후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된 성리학자 성수침(成守琛)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고려가 망하자 은거한 성여완(成汝完)의 후손으로, 함흥차사로 유명한 성석린(成石璘)의 종6대손이며 그의 동생인 예조판서 성석인(成石因)6대손이었다. 6대조 성석용은 성삼문과 성담수, 성담년의 증조부이며 이기의 외고조부였다. 5대조 성억은 좌찬성이었고, 고조부 성득식은 한성부 판윤을 지냈다. 증조부 충달은 현령을 지내고 사후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고, 할아버지 사숙공 성세순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버지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 성수침에게 학문을 배웠다. 1539(중종 34) 5세 때, 기묘사화 후 정세가 회복되기 어려움을 깨달은 아버지 성수침을 따라 경기도 파주 우계로 옮겨 살았으며 이후 파주에서 자랐다. 이후 파주 출신인 율곡 이이(李珥)를 만나 친구가 되어 그와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쌓게 된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일찍부터 그는 말을 삼가하였고, 성품이 독실하였고 민첩하였다. 청소년기가 되어서는 자신이 거주하는 집 이름을 묵암이라 하고, 이를 호로 삼아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 뒤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을 사숙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청소년기

 

1551(명종 6) 순천군수 신여량(申汝梁)의 딸과 결혼했다. 17세 때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그해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 뒤 감시 초시에 합격했으나 병으로 복시를 못 치러 과거를 포기하였다. 이후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다시 백인걸(白人傑; 그는 조광조, 김식, 김안국의 학통을 다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에게 전수하였다.)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백인걸에게서 그는 <상서(尙書)>를 배웠으며, 당시 같은 고을에 살던 이이와 본격적으로 나이를 초월한 도의지교를 맺었다.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생인 장포(長浦) 김행(金行) 역시 성수침의 문하와 백인걸의 문하에서 동시에 수학하였다. 장포(長浦) 김행은 그를 친아우처럼 아꼈고, 평생 그와 형제처럼 지냈다.

 

그 뒤 관직에 나가는 것 대신 학문 연구와 독서로 소일하며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등을 찾아가 세상과 사물의 이치를 논하기도 하였다.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인심, 도심에 대한 견해에 감격한 그는 그 뒤 이이와 '사단칠정 이기설'을 토론하고 새로운 학설을 주창하였다. 또한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이기일원론의 절충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이이의 이기일원론에 반대하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아버지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조광조의 학통을 이었다. 그는 관직에 욕심내지 않고 성리학 학문 연구와 제자들을 길러내는데 주력하였는데, 조헌(趙憲), 정철, 황신(黃愼), 윤황, 정엽(鄭曄), 이귀, 김자점 등이 그의 문하생들이었다. 이 중 팔송 윤황은 그의 사위이자, 후일 미촌 윤선거의 아버지이고, 명재 윤증의 할아버지이다. 이귀는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고,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의정부영의정까지 이르렀으나 효종의 북벌을 누설했다가 사형 당한다.

 

학문적 소양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의 문하에 배움을 청하러 오는 젊은이들이 찾아왔다. 그는 서실을 짓고 과거 응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소일하였다. 날로 문하생이 늘어나자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서실의 내규를 지어 제생들에게 행동 규범으로 삼게 하기도 했다.

 

정치 활동과 후학 양성

 

경기도관찰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특별히 전생서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는데, 이후 계속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으나 성혼은 이를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그 뒤 적성현감에 제수되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여러 번 관직이 내려졌으나 사양하였고 공조좌랑과 공조정랑을 잠시 지내고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 뒤 이이 등이 찾아와 그에게 관직에 투신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명종 말엽에 이량, 이기, 심통원, 윤원형 등의 외척 권신들이 몰락하고 사림파들이 정치에 등용되자 그 역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오래 머물러있지 않거나 사양하기를 반복했다.

 

1564년 아버지이자 첫 스승인 성수침의 상을 당하다. 부친이 병환에 위독할 때 그는 두 번이나 자신의 허벅다리 살을 베어 약에 타서 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소생없이 부친상을 당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인재를 초빙하는 정책을 펴, 선조 초년에 그는 학덕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로도 장원(掌苑), 조지서 사지, 주부, 판관, 첨정 등의 직책이 내려졌으나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을해당론 이후 심의겸, 정철 등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자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출사와 관료 생활 초반

 

선조 즉위 후 이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1568(선조 1)에는 이황을 만나 사물을 담론하였다. 이때 그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절충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 뒤로 1572년부터 7년간 이이와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기 논쟁을 한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 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1573년 공조좌랑·사헌부지평, 1575년 공조정랑,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어 내려가던 중 귀향을 허가받지 못하여 다시 한성으로 상경하였다. 그가 되돌아오자 왕이 직접 문병하고 약을 하사한 뒤 치도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치도의 방법으로 간단하게 '임금은 반드시 몸과 마음을 수습하여 마음과과 기운을 항상 맑게 하면 근본이 서서 의리가 밝게 드러날 것입니다.'라 하였고, '나라가 다스려지고 혼란해짐은 일정함이 없어서 오직 임금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어진 보필을 얻고 훌륭한 인재를 널리 수합하여 여러 지위에 두면 훌륭한 정치와 교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의견을 개진하였다.

 

선조가 오늘날 조정의 인재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그는 '몸을 용납하여 지위만 보전하려는 자가 많고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자가 적으니, 이는 우려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백성을 구제할 계책으로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주어야 하니, 이는 인심을 굳게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 뒤 물러 나와 상소로 지어 다시 이 내용을 강조하였다.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 :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 장령을 거쳐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이 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개혁안

 

이후 그는 경연시강관으로 항상 경연에 입시하였다. 우선 불필요하게 늘어난 지역 토산물 공물부터 줄일 것을 청하였다. 공물(貢物)을 바치기 위해 지역 농민들의 생계에 해가 간다는 것과, 최우수 상품을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 제도가 연산(燕山)에 의해서 온통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공물의 진상(進上)을 중하게 늘렸던 일이 아직껏 다 개혁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 변통하지 않는다면 좋은 정치를 이루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선조는 이 점을 상당히 난처하게 여겼다. 그 뒤에 인대(引對)하는 기회에 또다시 그 주장을 펼쳤었는데, 당시 이이의 뜻도 그와 합치되어 누차 이를 언급하곤 하였으나, 동인의 반대로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어느날 길에서 굶주려 죽은 걸인의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왕명으로 도성에 있을 때 녹봉(祿俸)을 받지 않았다. 선조가 이를 듣고 특별히 미두(米豆)를 하사하였는데, 그는 사양하였다. 사양을 하자, 선조는부족한 것을 도와줄 때는 받는 것이 옛날의 도이다.”하며 받으라 하자 마지못해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받은 곡물을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 뒤 풍처창수(豐儲倉守)를 거쳐 전설사수(典設司守)가 되었다. 그러나 한직(閑職)에 있으면서도 경연관을 겸하여 항상 경연에 입시하였다. 대신이 계청(啓請)하여 품계를 높여 주고 통정대부 경연참찬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이후 한직에 몸담으면서 특별히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 몇 차례나 상소를 올려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하면서 교외에 나가 명을 기다리자, 선조는 그를 소환한 뒤 인견(引見)하여 극력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가 더욱 간절하게 퇴직을 청하자 상이 비로소 우선 돌아가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 뒤 누차 사헌부 집의와 여러 시와 사 등의 정()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이이의 죽음과 은퇴

 

1581년 내섬시첨정을 사직하고 낙향했고 이후 여러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는다.

 

1583년 병조참지에 임명되어 한성부로 상경하고, 바로 이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특명으로 이조참판으로 승진했으나 이이가 병으로 죽자 사직소를 올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1585년 동지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받았으나 대부분 취임하지 않거나 사직상소를 올리고 곧 물러났다.

 

1584년 이이가 죽자 출사하여 서인의 영수가 되었고 이 때문에 동인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1589(선조 22) 겨울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왕으로부터 '국가에 큰 변고가 있으니, ()이 물러나 산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밀지를 받고 조정으로 달려갔다. 그 뒤 기축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동인을 일망타진하자는 데는 극구 반대하였다.

 

정여립의 옥사가 확대되어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원사(寃死)할 위험에 처했을 때 그는 정철(鄭澈)에게 구원해줄 것을 청하는 서간을 보내는 등 당파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러나 정철은 그의 부탁을 거절했고, 최영경을 위문하러 간 성혼의 아들과 측근을 최영경이 의심하면서, 최영경을 괘씸하게 본 성혼의 문하생들이 최영경을 탄핵, 그은 곤장을 맞던 중 장살된다. 그러나 최영경의 장살로 성혼에 대한 비난과 비판은 거세졌다.

 

이후부터 최영경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또한 정여립의 옥사를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라는 루머가 확산되면서 그가 뒤에서 흉모를 꾸미는 인물로 보고, 동인들의 공격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를 하며 1591(선조 24) 율곡집을 교열, 평정(評定)하였으며, 간행에 기여했다.

 

최영경의 옥사와 부정적인 시각

 

전라감사 홍여순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진주에 살고 있던 최영경을 길삼봉이라고 잡아들였다. 그러나 사실무근으로 판정되어 석방되었으나, 곧 두 사람이 친교가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최영경은 다시 잡혀와 국문을 받던 도중 의문사했다. 그는 최영경이 정여립과 사적인 친분은 있더라도 사악한 짓은 같이 하지 않을 사람이라며 변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과 친분이 있던 최영경을 적극 구원해줄 것을 탄원하였다. 그러나 최영경은 곤장을 맞고 죽게 되고, 시중에는 그가 최영경을 죽게 만든 게 아니냐는 의혹이 돌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성혼은 정철에게 최영경을 구원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선조에게도 상소를 보냈지만 간절한 상소에도 선조가 평범한 격례로 답하니 성혼은 사직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로 복귀한 성혼은 좌의정 정철과 '흉혼독철'(凶渾毒澈)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며, 동인의 화살이 그들에게 집중된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최영경, 정개청을 구원하려다가 실패하면서 역으로 동인들로부터 그가 최영경, 정개청 등을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중재와 수습의 실패

 

그러나 옥사의 후유증은 계속되었고, 귀양 가거나 폄출(貶黜)당한 자들 중에는 그의 친구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후 그는 조정에 적극 출사하여 경연에서 강론을 하는 한편 동서 양당 간의 화해와 화합을 주장하는 한편 동인들에게 기축옥사의 확대는 의도한 바가 아니었음을 설득하였다. 류성룡, 우성전 등은 그의 설득을 일부 수용하였으나 이산해는 그의 해명을 변명으로 간주하였다.

 

특히 동인 최영경(崔永慶)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동인 강경파들로부터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1591(선조 24) 동인은 정철을 실각시킨 뒤, 정철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는데 북인은 그 역시 옥사를 날조하는데 개입했다며 그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동인·서인간 분쟁 조정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동인의 정치공세와 선조의 의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몽양 소식을 들었으나 쉽게 가지 못하고 파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임진왜란을 당해 서쪽으로 피난을 떠날 때, 선조의 어가가 임진(臨津)에 이르러서 성혼의 집을 찾자 동인 이홍로(李弘老)가 가까운 대안(對岸)의 자그마한 촌락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면서 그의 집이라고 지목했다. 그러자 불쾌해한 선조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하며 역정을 내자 이홍로는 "이런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찾아와 뵈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 일 이후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성혼의 인격을 의심하게 되었다.

 

광해군이 급히 성천(成川)으로 옮기니, 그는 어렵사리 성천에 도착하여 광해군을 뵙고 광해군이 그를 배려하여 붙여준 경호 병사들과 함께 즉시 말을 타고 의주(義州)에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그가 분조(分朝)에서 행재(行在)로 달려오자 이홍로는 그가 행재소로 바로 오지 않고 광해군의 처소를 들렸다가 올라왔다며 비난하였다.

 

성혼이 이곳에 온 목적은 세자가 왕위를 이어받도록 도모하기 위해서입니다. ”

 

그 근거로 그가 바로 행재소로 달려오지 않고 광해군의 처소를 거쳐서 달려온 것을 근거로 들었다. 선조가 일단 그런 이야기를 누차 들어오다가 성혼이 도착하자 대노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하교를 하여 변란 초기의 일까지 소급해 거론하였는데 그 사지(辭旨)가 준열하고 엄하였다. 즉시 성혼을 파직해야 된다, 처벌해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났다.

 

그런데 김상헌이 찬한 신도비문에 의하면 왕의 피난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으나 쉽게 가지 못했던 것이라 한다. '상이 장차 서쪽으로 파천(播遷)하려 한다는 말씀을 듣고는 도성으로 들어가 국난(國難)에 달려가려 하였으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본래 산야에서 일어나 붕당을 한다는 죄목을 입어서 불원간에 장차 죄를 받을 것이니, 국가에 비록 위급한 일이 있으나 의리상 감히 가볍게 스스로 나아갈 수 없다. 대가가 만약 서쪽으로 행차하시게 되면 마땅히 길가에서 곡하며 맞이할 것이니, 만일 성상의 고문(顧問)을 입는다면 대가를 따라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오직 물러나 구학(溝壑)에서 죽을 뿐이다.’ 하였다.'는 것이다.

 

임진왜란과 정치 활동

 

즉시 상소문을 작성하여 바로 도성에 가지 못한 자신의 죄를 스스로 논열(論列)하여 대죄하고,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군량(軍糧)을 모으는 등의 계책을 아뢰었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적국(敵國)의 외환(外患)을 전적으로 천운의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옛날 제왕들은 변고를 만나면 혹 조서(詔書)를 내려 자책하여 존호(尊號)를 삭제하고 혹 나라를 그르친 신하들을 처벌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개과천선하는 뜻을 분명히 알게 해서 국가의 흥복(興復)을 도모하였습니다. 이제 마땅히 큰 뜻을 분발하시어 통렬히 자책하며,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이 뇌물을 주고받는 일과 궁인(宮人)들이 정사에 관여하는 단서를 끊고, 정직한 선비를 등용하여 이목(耳目)의 임무를 맡기신다면 인심이 크게 기뻐하고 복종하여 원수인 왜적을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왕을 호종한 신하들은 그의 상소를 변명으로 이해하여 그를 공격하려 들었다. 바로 의정부우참찬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다. 그 뒤 이천에 머무르던 광해 세자의 부름을 받아 의병장 김궤(金潰)를 돕고, 경기 지역의 의병장들을 도왔으며 곧이어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어 부임,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일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 영유(永柔), 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하였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호위하던 중 발병하여 파주로 다시 내려갔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을 거쳐 좌참찬이 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중 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1594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어 취임했다. 좌참찬으로 편의시무14를 올렸으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해에 좌찬성으로 승진했고 비변사 회의에 참여하여 시무 12조를 올렸다.

 

환도 후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맺을 것을 주장하였다가 동인 강경파를 비롯한 일부로부터 매국노로 규탄받자 관직을 사퇴, 연안의 각산(角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후 그는 유성룡, 이정암(李廷馣)의 화평론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은퇴와 최후

 

1594(선조 27)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은둔하였다.

15952월 고향인 경기도 파주로 내려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조광조의 학통을 계승한 인물로, 조광조-성수침과 백인걸의 학통과 이황의 학설을 이어받은 성리학의 대가로 이이와 함께 <사칠속편>을 완성하였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가 키워낸 문인들로는 조헌(趙憲), 정엽(鄭曄), 윤황, 이귀(李貴), 김자점, 김장생, 강황, 윤훤, 황신(黃愼), 김류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장군인 김덕령 역시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그가 임진왜란 초기 왕의 피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방에 시달렸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1598(선조 31) 여름에 병이 위독해지자 먼저 아들 문준(文濬)과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내가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은 몸으로 심사(心事)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옷은 포의(布衣)로 하고 염()은 지금(紙衾 종이 이불)으로 할 것이며, 띠풀을 엮어 관()을 덮고 소가 끄는 수레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그러면 충분하다. ”

 

그리고 장례는 간소하게 할 것과 성현의 말씀대로 행할 것을 주문한다. 또한 어가를 보고도 묵살했다는 주장은 참소임을 호소하였다. 그해 6월 경기도 파주 파산서실(坡山書室)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당시 그의 향년 63세였다. 죽은 후, 반대파들에 의해 관작을 빼앗겼다. 저서로는 우계집, 주문지결 (朱門旨訣), 위학지방 (爲學之方)등이 있다.

 

사후

 

경기도 파주목 주내면 항양리(현 파주시 파주읍 항양리 산 8-2)에 안장되었다. 1602(선조 35) 북인들에 의해 기축옥사와 정여립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삭탈관작 되었다가, 1623년 인조 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복권여론이 나와 인조 때인 1633(인조 11) 복직되고, 그 뒤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그 뒤 다시 의정부영의정으로 가증(加贈)되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임진왜란 당시 임금을 외면하였다고 꼬투리잡아 비난하였다. 1623년부터 서인계 유생들이 그를 문묘에 종향하려 하였고, 숙종 때 서인들이 집권한 경신환국 이후 이이와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으나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 때 출향되었고, 서인이 재집권한 갑술환국 때 다시 문묘에 복향되었다. 경기도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 소현서원(紹賢書院), 여산의 죽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후에 그의 묘소는 경기도기념물 제59호로 지정되었다.

 

평가와 비판

 

그의 실천과 적극성이 높이 평가받는다. 그의 오랜 친구인 이이는 그의 학문과 행적을 평가하여 "의리상 분명한 것은 내가 훌륭하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외손자 윤선거(尹宣擧)는 그가 '학문에 있어서 하나하나 실천한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동서 정쟁에서 중재적 역할을 하려 했던 점과, 이황과 이이의 사상을 절충하여 사상적인 소모전을 해결하려 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동시대인이자 친구인 율곡 이이는 그를 평하기를 "우계는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이다"라고 평했고, 자신과 비교함에 있어서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좀 나으나 수신과 학문의 힘씀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작품성에 있어서 청명 임창순은 "송익필의 초서는 기운이 넘쳐흐르고, 이이는 재기발랄하며, 성혼은 아버지 청송 성수침의 글씨를 이어받아 온화하면서 힘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부정적 평가

 

만년에는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동인들과 갈등하였다. '일찍이 은사(隱士)라는 명성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공명(功名)에 빠졌다.'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어가가 의주로 피난갈 때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인과 남인의 거듭된 비방에 시달려야 했는데, 어가 피난행렬을 알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 여부는 불확실하다.

 

기축옥사 때 이발(李潑이길(李洁), 백유양(白惟讓)의 옥사(獄事)를 구해주지 않았는데 그와 친분이 있던 최영경(崔永慶)이 옥사에 엮였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 하여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최영경의 석방을 청원하였고, 아들 성문준을 보내 위문하는 등, 논란의 소지가 있다.

 

출사관

 

그는 세상이 혼탁하고 시류가 부패한 이유는 올바른 도덕군자, 선비를 등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올바른 선비란 산림에서 학문을 닦아 도덕군자가 된 다음 임금이 예를 갖추어 벼슬길에 나와 주기를 청할 때 비로소 천하와 더불어 선()을 함께하고 백성에게 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단순한 재주만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사람됨됨이를 보지 않는 것이 곧 부패와 사회문제의 원인이라 보았다.

 

교육 철학

 

성혼은 서른일곱 살 때 자신의 교육관을 밝힌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서당의 벽에 걸어놓고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공부방에 온 사람은 새벽 일찍 일어나고 침구를 정리한다.

2.각자 비를 들고 공부방을 청소한다.

3.차례를 지켜 세수를 하고 의관을 바로 잡는다.

4.제각기 책을 정리하고 바르게 앉아 조용히 글을 읽는다. 잡담을 해서는 안 되고 마음대로 외출을 해서도 안 된다.

5.식당에서는 나이 순서로 앉아 조용히 식사를 한다.

6.식사 후에는 나이대로 나가 잠시 쉬다가 공부방에서 책을 보면서 공부를 준비한다.

7.틈이 나면 글을 정성들여 쓰고 토론, 논쟁을 한다. 결코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8.수업 후 독서를 하면서 의심나면 반드시 질문한다.

9.저녁식사 후에는 시냇가를 산책하고, 공부방에서 책을 보거나 글을 익힌다.

10.밤이 깊으면 등잔불을 켜고 책을 읽고 밤이 더 깊으면 잠자리에 든다.

11.잠자리에서는 손발을 가지런히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는다.

12.일상은 마음대로 행동하거나 게을러서는 안 된다.

13.말은 바르고 적절하게 해야 한다. 희롱하거나 우스갯소리를 하거나 요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14.자리에 앉을 때는 기대지 않는다. 앉거나 일어설 때는 정숙하고 단정하고 장중해야 한다.

15.출입을 할 때는 안정되고 정중하게 한다. 뛰거나 경솔해서는 안 된다.

16.출입을 할 때는 선배가 앞선다.

17.온순하고 겸손한 자세로 상대를 공경하는 태도를 갖는다.

18.계획 없이 외출해서는 안 된다.

19.모든 일은 겸손하게 하고 남을 함부로 무시하거나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20.아침저녁으로 학업을 점검하고, 마음과 행실을 다시 점검한다.

21.항상 부지런함과 삼가함을 생각한다.

22.어른이 공부방에 들어오면 어린 사람은 모두 일어선다.

 

문묘 종사 반대 논란

 

임진왜란 당시 그가 임금의 피난 행차를 못 봤는가, 보고도 가지 않았는가 여부는 그의 사후 200년간 논란거리가 되었다. 동인 이홍로는 그가 어가를 보고도 일부러 오지 않았다고 비판했고,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자신의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루게 하라고 했다.

 

후일 미수 허목, 고산 윤선도, 백호 윤휴가 이이와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면서 내세웠던 논리는 바로 이홍로가 그를 공격한 것, 일부러 어가를 보고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기타

 

서인 중에서도 이황의 학설을 인정, 수용하여 동인과 온건파 남인들로부터는 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 때 그의 위패를 이이의 위패와 함께 문묘에 모시는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문제를 야기했다.

 

임진왜란 때 전사한 중봉 조헌이나 김덕령 등도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사위이자 제자인 윤황의 손자가 윤증으로 소론의 영수가 된다. 그의 만년에 길러낸 제자 중에는 인조 때의 친청파 정치인 김자점도 있었다.

 

학문과 학맥

 

이이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 학파의 직계로서, 정암 조광조와 백인걸의 학통을 계승하여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광조-성수침-성혼, 성혼-정철, 조헌, 김자점, 윤황, 윤황-윤선거-윤증으로 이어지는 서인 학통과, 노론, 소론 분당 시에는 소론계 학파로 학통이 이어졌다.

 

친구인 이이와 함께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성혼은 백인걸외에도 아버지 성수침에게도 사사했는데, 백인걸과 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이들의 친구였던 노수신 역시 이연경의 문인으로, 이연경 역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학문 경향은 이이와 1572년부터 6년간에 걸쳐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한 왕복서신을 통해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했다. 이이와의 서신논쟁에서 그는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가 기를 지배해야 된다는 이황의 사상에 동조하여 이이와는 다소 차이를 보였다.

 

성혼의 문하에서는 안방준, 김자점 등이 배출되었고 인조반정의 공신 김류와 이귀 역시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문인들이다. 후일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들 중의 한명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 등이 배출되었고, 이이와 성혼은 후일 서인의 종주로서 추앙되었다. <위키백과>

 

 

출처 : 歸 田 園 居
글쓴이 : 白首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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