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야고보의 창문

초월 transcendence과 내재 immanence, 성 sacred과 속 profane, 그 경계에 창문 하나 달기...

시간의 틈에서 스며 나오는 빛. 2020.12. 최선 작가 작품집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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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ice/alrim

2021. 1. 15.

 

시간의 틈에서 스며 나오는 빛

 

 

급박하게 움직이고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한 개인은 늘 외딴섬에 고립된 듯 세상과 동떨어진 자신의 자아를 종종 발견하고 당황합니다. 나 혼자만 세상에 뒤쳐진 듯하고, 나 혼자만 세상에서 소외된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각 개인 간에 소통이 더욱 원활해지는 것에 반비례하여 더욱더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고립감과 고독을 벗어나 자신의 참 자아를 찾으려는 개인들의 노력은 다양한 취미 활동뿐만 아니라 명상 프로그램 그리고 기존 종교를 벗어나 개인의 신념에 귀의하는 ‘유사 종교 활동’으로 자신들의 관심을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시스템에 반응하기를 꺼려합니다. 지구 주변 궤도를 계속 맴돌기만 하는  폐처분된 인공위성의 잔해물처럼 우리는 계속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우리의 공간을 부유물처럼 떠다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대인의 위기는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개인의 영혼을 잠식해 들어오는 이러한 ‘공허’와 ‘고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이 움직이고 내가 멈춰있는 시간과 세상이 멈춰 있고 내가 움직이는 시간이 바로 시간의 빈틈이며 나만의 시공간(時空間)입니다.
그것은 시공간의 적막한 오아시스입니다.“ (최선 작가의 노트 중에서)

 

최선 작가의 시간은 우리에게 익숙한 자연적 시간 흐름과 엇박자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두가 한 방향의 흐름을 지향할 때 본인은 전혀 다른 시간의 틈을 찾아 그곳을 비집고 자신의 ‘존재의 자리(Sitz des Seins)’를 그곳에 마련했습니다. 마치 절대자와의 깊은 교류를 위해 ‘광야’로 스며들었던 많은 구도자들을 연상시킵니다.  특히 ‘임박한 종말과 메시아의 출현’을 간절히 소망하던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추구하던 일반적인 시간을 뚫고 광야의 시간을 선택한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이 연상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갈망했던 물질적 풍요와 평안한 삶을 버리고 추위와 고독의 ‘영혼의 어두움 밤(St. John of the Cross)’을 찾아 광야로 나갔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그를 성서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공동번역 마태11:11) 그는 인간이 근접할 수 있는 실존의 한계를 발견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 만의 ‘시간의 틈’에서 세상이 갈망하던 시간과 다른 새로운 시간을 발견했습니다. 그 시간은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올 한 사람에 대한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던 한 젊은이를 그는 이 새로운 시간의 주인인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시간을 공유할 때 볼 수 없었던 것을 자신 만의 시간 속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최선 작가의 작품들은 이러한 시간의 틈에서  조금씩 새어 나오는 빛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빛은 작가가 바라보고 느껴왔던 기존의 모든 물질의 형태들을 변형시킵니다. 색채는 그 빛에 의해 단순화되고 형태마저 구상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화면에 칠해진 물감의 결은 작가 만이 경험한 그 시간들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시간의 결을 우리는 모두 볼 수 없지만, 최종적으로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빛은 화면 저너머로 우리의 시선을 이끕니다. 그래서 최선 작가의 작품은 일견에 그 깊이를 짐작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단순히 느낌 만으로 그림을 느낀다고 문제 될 것은 없지만, 단순한 시선으로는 시간의 틈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감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빛이 만들어내는 파장에 의해 우리의 가슴을 뒤흔드는 감흥이 있기까지는 작품을 여러 번 계속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최선 작가의 작품은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을 갖게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지식을 넘어 한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늘 인정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할 때 작가의 작품을 통해 보다 많은 감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최선 작가의 시선을 따라 그가 우리에게 비춰주는 그 빛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길 희망합니다. 모두의 닫힌 시선을 열어 우리에게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게 새로운 시간을 열었던 세례자 요한처럼 이제 최선 작가는 우리에게 열린 새로운 시간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시간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작가를 주시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우리에게 큰 행복이고 행운일 것입니다. 그것이 작가가 표현한 “시공간의 적막한 오아시스”가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에게도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올 것은 분명합니다.

 

채야고보 신부 (Artist / 성공회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