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야고보의 창문

초월 transcendence과 내재 immanence, 성 sacred과 속 profane, 그 경계에 창문 하나 달기...

실존의 한계에서 희망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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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4. 28.

예수 세례_ 1304-1306년, 지오토 디 본도네

 

2021.1.10. 나해_주님의 세례 주일

 

창세 1:1-5_시편 29_사도 19:1-7_마르 1:4-11

 

 

 

실존의 한계에서 희망을 보다.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먼저 이야기 하나를 들려드리면서 오늘 설교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사방이 적막한 어둠에 잠겼다. 간간히 부는 바람이 축축한 대지의 습기를 날라다 주었다. 바위틈에서 밤을 지새우며 기도하는 동안 그는 습한 한기로 모든 관절이 굳어있음을 느꼈다 . 한몸뚱이 의지할 있는 바위를 지붕 삼아 이슬을 피할 있었지만, 차가운 기운은 그의 영혼의 깊은 곳까지 고통으로 스며들었다. 맨발에 느껴지는 습기의 서늘함이 그의 새끼발가락의 갈라진 틈을 통해 몸에 전해졌다. 그러한 통증과 한기를 몸에서 털어내듯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내 몸을 일으켜 굳은 관절을 손으로 주무르며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동이 트기 전에 가능하면 베뢰아의 베다니에 있는카드슬라여울까지 도착해야 했다. 아마도 벌써부터 많은 사람들이 추위를 뚫고 새벽부터 세례를 받기 위해 그곳에 모여들고 있을 것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손바닥만한 덩어리를 지주들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이 사람들, 세금을 감당할 없어 정든 고향을 떠나 모든 포기하고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 병든 가족의 치료 때문에 전재산을 잃었지만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온 사람들, 속죄를 위해 비둘기 제물을 바칠 형편도 되지 않아 종교적 구원조차 포기한 사람들, 사제들과 율법사들 그리고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죄인으로 버림받고 갖은 비방과 천대를 감내하며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사회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구원받을 희망을 잃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 희망이 필요했고, 숨이 붙어 있는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세례를 받기 위해 사람들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추위에 갈라져 곪기 시작한 자신의 발가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세네파 사람들도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지만, 가혹한 삶에 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욕의 짐을 더했다. 그것은 쓰러져 가는 사람들에게 짐을 지워주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세례는 사람들에게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고 방향을 전환하라고 강조하며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것이어야 했다. 희망은 그들이 받아온 서러움에서 조금이라도 해방의 기쁨을 주는 것이어야 했다. 어제 가증스러운 율법사들에게 그가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칠 , 절망에 놓인 그들의 잿빛 눈에 빛이 감도는 것을 느낄 있었다. ‘누가 우리를 비난하던 자들에게 우리를 대신해서 저런 비난을 해주었던가?’ 선택받은 백성이고, 모세의 후손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그들에게 저런 모욕적인 말을 하는 자를 그들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통쾌함은 그들의 한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눈빛을 생각하면 요한의 마음은 요동쳤다. 그는 더욱 발길을 재촉했다. 습기에 젖은 바위에 발이 미끄러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그의 지팡이로 겨우 균형을 잡을 있었다. 그나마 며칠 사이 비가 내리지 않아 요단강의 유속이 빠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어떤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올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시기를... 아멘.

 

요한이 카드슬라 여울에 다다랐을 , 사방이 푸른빛으로 가득하여 이제 세상이 모두 그의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날씨에도 빠른 걸음을 재촉했더니 어느덧 그의 얼굴은 땀과 대지의 습기로 뒤범벅이 되었다. 여울가에 도착해서 요한은 자신의 발을 물에 담그며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물이 차지가 않아 다행이다. 감사했다. 멀리서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고 벌써부터 사람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새벽의 축축한 물향기에 뒤섞인 그들의 땀냄새는 때와 피와 고통이 뒤범벅된 절망의 향이었다. 그는 그들에게서 같은 인간으로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들의 실존에 대한 연민과 아픔이 뒤섞인 고통이었다. 하느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셨다는 세상이 저들에게 이토록 고통인 건지? 이러한 부조리한 악과 모순이 가득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구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광야에서 여러 여러 해를 고행하며 묻고 물었었다. 그리고 오랜 고행 끝에 그가 깨달은 것은 율법과 인간의 노력으로는 실존의 한계를 절대 넘어설 없다는 것이다. 절망의 끝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실존의 한계를 넘어설, 실존의 한계를 끝낼회개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회개한 자들을 이스라엘 중에 모으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달았다. 사제 에제키엘은 오래전 이렇게 외쳤다. “내가 너희를 민족 가운데서 데려 나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주고, 마음을 넣어주며 기운을 불어넣어 주리라.”(에제36:24~26) 그의 세례는 회개한 하느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실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어야 했다. 이미 심판의 도끼는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도끼를 내리칠 찰나의 기회밖에 그들에게 남은 시간이 없다. 그래서 그는 수만 있다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원했다. 

 

간단히 설교를 마치고, 스무 정도의 사람들을 먼저 넓이 정도의 간격으로 앞뒤로 물속에 서게 했다. 오늘따라 유독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들어왔다. 좌측 끝에 낯익은 얼굴도 보였다. 그는 세레자 요한의 사촌 동생인 예수였다. 그를 본지가 오래되어 매우 반갑기도 해서 가벼운 눈인사를 나눴다. 요한은 이제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새로운 해방과 자유에 대해서도 말을 했다. 이전과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라고 그들에게 외쳤다. 그리고 오늘 물속에 잠김으로 이제까지의 절망의 삶을 여기서 끝내라고 외쳤다. 세례의 시간, 요한의 외침에 따라 그들은 일제히 숨을 참으며 머리가 물에 잠길 정도로 물속으로 몸을 구부렸다. 몇몇은 물속에 몸이 잠기지 않아 애를 먹기도 했다. 그리고 잠시 하나둘씩 밖으로 솟아올랐다. 몇몇은 회개의 은총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고, 몇몇은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로 그때 요한은 하늘 구름 사이로하늘이 쪼개지며밝은 빛이 비추는 것을 보았다. 빛이 자신의 사촌 예수의 머리 위로 하늘거리며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음성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속에서도 요한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각색해 보았습니다. 복음서와 당시의 역사적 자료들을 참조하여 가장 타당한 장면을 연출해보려 했습니다. 이러한 상상은 복음서의 생략된 행간을 읽는 방법 하나입니다. 그것은 어느 정도 해석학적인 위험부담을 가지는 것이지만, 상상이 검증된 사실을 기초로 성서 텍스트에 생기를 불어넣는 기능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에게 단독으로 세례를 베푸는 장면을 그림을 통해 자주 봐와서 집단 세례를 받으셨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습니다. 복음서에도 그러한 내용은 생략됐지만, 침례의 경우는 집단으로 강에서 행해지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홀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실존의 한계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 가운데 그들과 함께 서계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의 모습과 일치하는 진술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무척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가 요한의 제자라는 소문도 있었고, 예수와 세례자 요한을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담 속에서도 예수의 세례 이야기를 모든 복음서가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이야기는 역사적 진실에 가깝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세례 이야기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의 딜레마였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같은 다른 묘한 긴장감을 갖게 만듭니다. 회개의 선포와 세례, 그리고 기존 기득권에 대한 비판은 무척 유사한 점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선포와 물세례에 머물렀다면, 예수는하느님 나라 대한 선포로 나아갔고, 성령의 세례를 약속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매우 금욕적이었던 반해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과 먹고 마시고 함께 하여먹보요 술꾼’ (마태11:19비교)이라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오늘 예수의 세례를 통해 하늘과 땅만큼 확연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세례 이야기를 단순히 예수의 존재에 대한공현(公現) 사건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이야기의 진실의 부분만 드러낼 뿐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복음서의 핵심 구절입니다.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마르코는 이를 이사야 42 1절에서 인용한 같습니다. 이를 시편 2 7 (“너는 아들, 오늘 너를 낳았노라.”) 포함해서복합 인용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사야 42 1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보면 마르코의 의도를 조금은 이해할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주는 ,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만약 이사야가 여기까지만 기록을 했다면 이는 주의 종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에 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다음 후반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더해집니다.  그는 나의 받아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주리라.” 말씀은 주의 종의 실존적 비전을 드러냅니다.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종이 하느님의 영과 함께 하느님의 뜻대로 모든 민족을 하느님께로 이끌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르코가 이사야 42 1절을축약 인용했다고 말할 있습니다.(J. 예레미아스 / 유대교의 전통에 의하면 말씀을 인용할 전체를 인용하기보다 인용구의 앞부분을축약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의 말씀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존재론적 공현(公現) 드러내는 사건이기보다는 예수의 인간적 실존인소명의 사건으로 보는 것도 타당한 해석이라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은 이유를 유추할 있게 됩니다. 사람 중에 요한보다 자가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세례자 요한은 인간이 도달할 있는 실존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기나긴 수행과 금욕, 기도와 절제를 통해 인간이 다다를 있는 한계가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인간은 그의 한계를 결코 넘어설 없습니다. 그리고 한계점에서 세례자 요한이 깨달은 것이 바로회개이고 세례입니다. 이러한 실존의 한계는사도 바울로 깨달은 지점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사람은 것이다.”(로마 1:17) 율법의 준수나 인간의 행위로는 결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없습니다.(비교 갈라 2:16) 성육신하신 예수께서는 이러한 실존의 한계에 인간과 똑같이 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간적 실존은 거기에만 머무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이 제시한 실존의 한계 너머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소명이었습니다. 소명의 증거로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그와 함께 계심이공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성령의공현 목격한 유일한 증인이 됩니다. 요한이 실존의 한계를 깨달은 지점이 바로  예수의 소명의 시작입니다. 그는 실존의 한계를 십자가까지 연장시킵니다. 그리고 그다음 이야기는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한 사람을 불러 모아 주님의 길을 예비했지만, 이제 예수는하느님 나라 선포함으로 인간 실존의 한계 너머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분기점에 오늘의 세례 이야기가 놓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절망과 부조리한 세상에서 하나의 희망의 빛이 됩니다. 인간은 결코 절망하는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시계수리공처럼 인간의 실존에 무감각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한 사실을 우리와 같은 실존을 직접 체험하신 예수께서 몸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요즘 같으면 세상이 너무 야속하고 원망스럽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코로나 19 이제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희망은 있을지? 예전과 같은 시간은 다실 올지? 모두가 경제적 어려움과 미래의 암울함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제 우리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모든 인류 공동체로서 인간 실존의 한계를 함께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고통을 겪는다는 생각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힘든 만큼 다른 사람들도 지금 똑같이 힘들다는 생각으로 서로서로 이웃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위기를 이겨갔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주님께서 받으셨던 세례와 동일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고, 그의 은총에 따라 하느님의 성령을 약속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희망 고문이 아님을 예수께서 친히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고, 우리 교회의 역사가 이를 보증하고 있습니다. 모두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희망이 함께하시길 빕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주님의 세례 / 연중1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께서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보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세례의 언약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또는

 

사랑의 하느님, 의로우신 성자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어 우리 죄인들과 같이 세례를 받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창세 1:1-5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위에 뒤덮여 있었고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4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5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 하루가 지났다.

1,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시던 한처음이었다.”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2, “기운바람”, “”, “”, “이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시편 29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영광과 권능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2     이름이 지니는 영광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거룩한 두르신

.     주님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주님의 목소리가

.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     영광의 하느님께서

.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4    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     목소리는 힘차시고
.     목소리는 장엄하시다.

5    주님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뛰게 하신다.

7,8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     광야가 흔들거린다.
.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린다.

9    주님의 목소리에,

.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     숲들은 벌거숭이가 된다.

.     모두 주님의 성전에 모여
.     한결같이 영광을 기린다.

10  주께서 거센 물결 위에

.     옥좌를 잡으시고
.     영원히

.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주님의 백성들아,

.     그에게서 힘을 얻고
.     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사도 19:1-7

1 아폴로가 고린토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바울로는 북부 지방을 거쳐 에페소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몇몇 신도들을 만나 2당신들이 신도가 되었을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들은우리는 성령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 바울로가그러면 당신들은 어떤 세례를 받았습니까?” 하고 다시 묻자 그들은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일러주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한 표시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실 예수를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5 그들은 말을 듣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6 바울로가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러자 그들은 이상한 언어로 말을 하고 예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7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마르 1:4-11

4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하고 선포하였다. 5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와서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 7 그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나보다 훌륭한 분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9 무렵에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셨다. 10 [A]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실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에게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1 [B] 하늘에서너는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A] 마르1:10-11은 마르 15:38-39과 함께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10 절에서 “갈라지며”의 원래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σχῐ́ζω(찢어지다, 갈라지다)로, 15:38(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에서도 쓰였습니다.

[B]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15:39에서 백인대장의 입을 빌려 반복됩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이처럼, 세례와 십자가는 예수의 복음의 시작과 끝입니다.

주의 세례 축일은 공현일 후 연중시기의 첫 주일로, 1월 7일에서 13일 사이에 있습니다. 공현일이 주일이면 주의 세례 축일은 월요일로 옮겨서 지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