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야고보의 창문

초월 transcendence과 내재 immanence, 성 sacred과 속 profane, 그 경계에 창문 하나 달기...

사람의 아들: 희망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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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4. 28.

2021.1.17. 연중2주일

안토니오 (이집트 은수자, 수도원장, 356)

 

사무상 3:1-20_ 시편 139:1-6, 13-18_ 1고린 6:12-20_ 요한 1:43-51

 

 

 

 

사람의 아들 : 희망의 다른 이름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성서를 읽으며 제가 의문을 가졌던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셨을까? 그는 태어나고 자라면서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있었을까? 살고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그는 실존에 대한 고민을 했을까? 많은 신학 서적을 뒤지고 고민을 해봐도 시원한 답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결국 복음서로 돌아가 생략된 행간을 읽고 묵상하는 과정을 통해 이러한 답을 찾아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신성과 인성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인식했다는 교회의 전통적 진술은 복음서의 내용과 분명히 대치되는 부분이 있는 같습니다. 복음서는 이러한 것에는 차라리 침묵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예수 이후 교회의 전승 자료로 소급되며 교회의 고백이라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정체성이 공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을공현(公現, Epiphany)’이라 부릅니다. ‘주님의 탄생’, ‘주님의 세례’, ‘주의 변모등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역사적 예수에게 까지 소급되는지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공현 예수 자신이 정체성을 깨달은 사건의 기록이라고 바꿔서 가정할 경우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질 있습니다. 사건들이 교회의 고백으로 소급되지 않고,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될 경우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의 숨겨진 행간에서 예수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고민을 엿볼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에는 예수의 정체와 관련된 다양한 명칭들이 나옵니다. 모두 나타나엘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입니다. ‘라삐(선생,Rabbi)’, ‘하느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 그리고 예수의 입에서 발설된사람의 아들등입니다. 요한복음은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예수의 정체에 대한 선포로 시작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1 1절에서 처음 말씀이 계셨다는 선포 1 마지막 절의사람의 아들 대한 예수의 선포는 서로액자 이루며 상호 관계성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로고스가 이제  사람의 아들에까지 연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의 결론입니다. 오늘 언급된 예수의 정체성과 관련된 말들을 살피기에는 권의 책으로도 설명을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예수의 입에서만 발설된 것으로 여겨지는사람의 아들 우선 집중해보고자 합니다.

 

사람의 아들’ὁ υἱός τοῦ ἀνθρώπου 헬라어 문화권에서는 흔한 말이 아닙니다. 이는 아람어바르 에나샤( bar ‘enasa)’ 문자적 번역입니다. 아람어는 예수께서 사용하시던 말입니다. 뜻인즉 집합 단수로서 관사를 사용하면 사람이고, 관사가 생략되면 사람 또는 어떤 사람(a man)’이란 뜻입니다. 1인칭 나타내는 데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아람어 원어를 생각할 바르 에냐샤라는 관용적 표현에아들이란 말이 나중에 전승과정에서 덧붙여졌음을 추측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냥바르 에나샤라고 발설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사람의 아들 예수께로 소급이 되는지에 대해 연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하나의 협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에서 용어의 사용이 무척 많은데, 중복 인용된 것을 생략해도 무려 51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만 13번이 나옵니다. 그리고 모두가 오직 예수의 입에서만 발설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외에 우리는 초대 전승의 신앙고백이나 어떠한 교회 전승 자료에서도사람의 아들이란 표현을 찾아볼 없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로도 용어를 알았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들이란 표현을 빼고 아람어의 뜻에 가장 가까운사람ὁ ἀνθρώπου’만을 사용했습니다. (2 디모데 2:5 참조) 여기에서 우리가 짐작할 있는 것은사람의 아들이란 칭호가 초기 전승부터 뿌리가 깊어 결코 예수와 분리해서 사용할 없었던 모종의신성불가침(sacrosanct)’ 있었을 가능성입니다.(J. 예레미야스)

 

예수는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3인칭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를 보고벨하우젠이나불트만같은 학자들은 예수가 본인이 아닌 제삼자인어떤 구원자 상정한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럴 경우 예수가 다른 구원자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데, 이것은 복음서의 전체 문맥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것이 예수의 실존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현재의인간 예수 부활과 승천 이후의영광의 예수사이의 실존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정할 있습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깨달은 인간 실존의 한계에서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실존의 한계는 연장되어 십자가까지 이어집니다. 예수는 인간 실존의 한계를 십자가까지 연장시킬 소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이 실존의 한계 너머의 부활과 승천입니다. 지점이 바로 유대교 묵시문학에 뿌리를 사람의 아들 대한 정확한 이해일 겁니다. 

 

다니엘서 7 13절을 비롯하여에티오피아 에녹의 유사등과 같은 유대교 묵시문학에서는사람의 아들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사람이 하늘 보좌로부터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내려와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을 심판하고, 고통받고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의인들을 불러내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의 주인이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통해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했지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 자신에게 까지 소급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의 성취는 육신의 한계와 인간 실존의 한계에 놓여 있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 십자가의 수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획득하는 바로 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미래에 성취될 자신의 다른 실존을 분명 인지하셨을 겁니다. 미래는 현재에서는 은폐됐습니다.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고, 죽음이 없으면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지나야 가운데로 드러날 실존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미래의 자신의 실존에 대해사람의 아들이라 칭한 이유입니다. 역사적 예수는 아직 다니엘이 봤던 비전 속의사람의 아들이란 실존을 자신 안에 은폐했습니다. 고난의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야 그러한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철저히 미래의 자신을 현재와 구분하여사람의 아들이라 표현하신 것입니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하나씩 벗기듯 여기에서 단계 우리는 나아갈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 바로 사람또는 관사를 생략하면사람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뒤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비전 또한 제시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깨달은 인간 실존의 한계는 정확하게 우리의 실존의 한계입니다. 우리가 속에서 한계점에 이점을 기억하라는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사람의 아들이란 칭호를 제자들에게 주로 사용하셨다는 점은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특히 마가복음의 전승에서는 마가복음 8 27 베드로의 고백 이후 이러한 점이 강조됩니다. 아마도 초대 전승에 근거한 것일 텐데, 마르코는사람의 아들이란 호칭을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은밀한 가르침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의미인 ,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십자가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절개 없고 많은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르 8: 35)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사람의 아들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 24:13 비교) 이것이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은밀한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선포에서사람의 아들 철저히 3인칭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인간도 아닌 드러날 새로운 인간, 실존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 하느님의 영광 자체인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타락 이전의 하느님의 형상을 지닌 최초의 인간으로의승귀(昇貴, Exaltation)’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영광의 날을 우리와 함께 기다리길 원하셨습니다.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초대 교회가 버틸 있었던 것은 사람 대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적 예수에 집중하지 않고 십자가 이후의 부활과 승귀의 영광에 집중했습니다. 실존의 한계에 다다르지 않으면 그다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픔과 고통에 놓인 인간이 절망하지 않고 실존의 한계를 넘어서는 방법은 희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들을 기만한 죄로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야 했던시지프스 Σίσυφος’처럼, 우리 인간은 다시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매일 위로 바위를 굴려야 하는 실존을 살아가지만, 그것에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절망하기도 했지만, 우리 인간은 무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실존의 기다란 끈을 여전히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실존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죽음뿐입니다. 절망의 끝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권세는사망입니다. 그리고 사망의 권세를 끝낸 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 실존을 완전히 반전시킵니다. 절망의 상징인 십자가가 이제 희망의 상징이 됐기 때문입니다. ‘사망 권세가 사형선고를 받고, ‘희망 하느님의 영광과 함께 세상의 모든 권세를 받았습니다. ‘사람의 아들 바로 그러한 희망의 다른 이름입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다니엘 7:14) 그러므로사람의 아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실존의 한계를 인식하셨고, 너머의 비전을 동시에 보셨습니다. 인간 예수의 실존은 한계와 은폐된 희망 사이를 잇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와 같았습니다. 세례는 시작이고 십자가는 그의 실존의 끝입니다. 여기에 예수의 삶에 대한미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 존재합니다. 그의 침묵과 그의 비유들, 그의 비하(卑下, Humiliation) 그의 승귀(昇貴, Exaltation), 그의 권위와 그의 죽음을 잇는 유일한 연결 고리는 미스테리온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이고, 철학과 다른 믿음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예수에게 닿아 있는 지점은 역사적 진실보다는 이러한 미스테리온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역사적 진실을 초월합니다. 그것이 인간 실존의 비밀이고 이성보다 무서운 사랑의 힘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희망에서 빚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시대 이후로 끊임없이 미래는 우리의 현재로 침투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간처럼 현재가 미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로 침투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마태오 11:12) 말씀처럼 인간의 실존을 표현한 말이 있을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를 찾고자 절규하는 자들, 간절히 원하는 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현재로 문이 열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작은 세례자 요한의 때부터입니다. 초월이 드디어 내재를 향해 문을 것입니다. 성육신의 미스테리온이 바로 이러한 반전의 시작이었습니다.

 

역사적 예수와사람의 아들’. 둘의 간극은 인간 삶에 놓인 하나의 역설입니다. 현재가 미래를 미래가 현재를 서로 상관합니다. 현재가 지나가고 내일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나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사이의 불균형도 이러한 긴장감 속에 존재합니다. 미래의 현재로 침투해 들어옵니다. 이미 침투했어도 은폐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그냥 지나칩니다. 신앙생활에서 이러한 긴장이 존재합니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 싶지만, 우리는 현재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기 힘들어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유도 나름 매우 타당하게 있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긴장감이 없이도 우리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 입니다.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고 숱한 시련이 오면 모든 것이 흔들리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는 든든한 바위 위에 우리의 신앙의 터를 잡고 든든한 집을 짓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마태 7:21-29 비교) 한계 상황을 대비해서 많은 훈련을 하는 군인들처럼, 우리의 현재가, 우리의 작은 노력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노력으로 채워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의 현재로 침투하고 현재에 은폐된 미래가 우리의 가운데 드러나길 바랍니다. 우리가 바라는 미래가 내일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속에 매일 반영되도록 말입니다. 역사적 예수가 바라보았던하느님의 아들이란 종말론적인 비전이 우리의 현재적 비전, 우리의 현재적 희망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비전을 가난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 나누셨던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절망의 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연중2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삼아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성령의 은총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상 3:1-20

1 소년 사무엘은 엘리 밑에서 야훼를 섬기고 있었다. 때는 야훼께서 말씀도 자주 들려주시지 않았고 계시를 보여주시는 일도 드물었다.

2 엘리는 이미 눈이 어두워 앞을 보지 못했다. 하루는 그가 자기의 자리에 누워 있고 3 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야훼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하느님의 등불이 꺼지기 전에 4 야훼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사무엘은.” 하고 대답하면서 5 엘리에게 뛰어가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너를 부른 일이 없다. 가서 자거라.” 엘리의 말을 듣고 사무엘은 돌아와 자리에 누웠는데 6 야훼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엘리는사무엘아, 나는 너를 부른 일이 없다. 가서 자거라.” 하고 대답하였다. 7 야훼께서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적이 없으셨고 사무엘은 아직 야훼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8 야훼께서 번째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제야 엘리는 야훼께서 소년 사무엘을 부르시는 알아차리고 9 사무엘에게가서 누워 있어라. 그리고 다시 부르는 소리가 나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사무엘은 돌아와 자기 자리에 누워 있었다.

10 그러자 야훼께서 거기에 나타나 서시어 아까처럼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야훼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1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들어라. 내가 이제 이스라엘에서 무슨 일을 터인데, 듣는 사람마다 가슴이 내려앉으리라. 12 날이 오면, 내가 엘리와 집안을 두고 말한 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루어지리라. 13 너에게 알려주거니와, 나는 엘리의 가문을 심판하여 끝내 벌하고야 말겠다. 그것은 자식들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을 알면서도 바로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14 그러므로 나는 엘리의 집안을 두고, 제물이나 예물을 소홀히 다룬 죄는 영영 용서해 주지 않으리라고 맹세하였다.”

15 사무엘은 아침까지 누워 있다가 야훼의 성전 문들을 열었으나, 감히 밤에 보고 들은 것을 엘리에게 고하지 못하였다. 16 그러는데 엘리가, 사무엘아!” 하고 불렀다. 사무엘이!” 하고 대답하자 17 엘리가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나에게 숨기지 말고 말해 다오. 너에게 하신 말씀을 한마디라도 숨긴다면, 하느님께서는 너에게도 나에게 내리시는 못지않은 벌을 내리실 것이다.” 하고 다그쳤다. 18 그래서 사무엘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말을 듣고 엘리는 중얼거렸다. “야훼께서 하시는 , 어련하시랴!”

19 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야훼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말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셨다. 20 그리하여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야훼께서 세우신 예언자로 받들게 되었다. 21 야훼께서는 실로에서 당신을 거듭 나타내 보이셨다. 야훼께서는 곳에서 사무엘에게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

 

 

시편 139:1-6, 13-18

1,2 주여,
.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시니
.     내가 앉아도 아시고,
.     있어도 아십니다.
.     멀리 있어도, 당신은 생각을 꿰뚫어 보십니다.

3    걸어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4    내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     무슨 소리 할지, 주께서는 아십니다.

5    앞뒤를 막으시고
.     당신의 위에 있습니다.

6     지식은 놀라와 미치지 않고
.     높으심 아득하여 엄두도 아니 납니다.

13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 주시고
.     어머니 뱃속에 나를 빚어 주셨으니

14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     당신은 몸을 속속들이 아십니다.

15  은밀한 곳에서 내가 만들어질 ,
.     깊은 땅속에서 내가 꾸며질
.     마디마디 당신께 숨겨진 , 하나도 없었습니다.

16   형상이 생기기 전부터 당신 눈은 보고 계셨으며,
.     됨됨이를 모두 당신 책에 기록하셨고
.     나의 나날은 하루가 시작하기도 전에
.     하루하루가 기록되고 정해졌습니다.

17  하느님, 당신의 생각은 너무 깊어 미칠 없고,
.     너무 많아 이루 헤아릴 없습니다.

18  세어 보면 모래보다 많고
.     세었다 생각하면 있습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6:12-20

12 누구나나는 무슨 일이든지 자유가 있다.” 말할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서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과연 나는 무슨 일이든지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무엇에게도 얽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 말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몸은 음행을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몸을 돌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14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살리셨으니 우리도 당신의 권능으로 다시 살려주실 것입니다. 15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의 부분을 떼어서 창녀의 몸의 지체로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없습니다. 16 창녀와 관계를 하는 사람은 창녀와 몸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하느님께서 사람이 몸이 되리라 2:24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17 그러나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18 그러니 음행을 물리치십시오. 인간이 짓는 모든 죄는 자기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음행하는 자는 몸에다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20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기 몸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시오.

 

 

요한 1:43-51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래아로 떠나가시려던 참에 필립보를 만나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44 필립보는 베싸이다 출신으로 안드레아와 베드로와 고향 사람이다. 45 그가 나타나엘을 찾아가서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그분은 요셉의 아들 예수인데 나자렛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 46 그러나 그는[A]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있겠소?” 하고 물었다. 그래서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권하였다.

47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시고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48 나타나엘이 예수께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필립보가 너를 찾아가기 전에 네가 [B]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49 나타나엘은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50 예수께서는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는 그보다 일을 보게 것이다.” 하시고 51정말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창세 28:12 보게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A]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 마을의 이름은 무척 경멸받았습니다. 마을 주민 상당수가 이교인이었고 거기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가능성이 전혀 없어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도 니고데모에게 ‘성서를 샅샅이 뒤져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요7: 52)’라고 했던 것입니다.
[B] “무화과 나무 아래”는 랍비들이 토라를 연구하는 장소를 뜻하는 별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