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야고보의 창문

초월 transcendence과 내재 immanence, 성 sacred과 속 profane, 그 경계에 창문 하나 달기...

덜어내고, 비우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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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5. 16.

 

2021. 3. 7.  나해_사순 3주일_감사성찬례

출애 20:1-17_ 시편 19_ 1고린 1:18-25_ 요한 2:13-22

 

 

 

덜어내고, 비우기” (1)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그림을 그리는 그림에 뭔가를 그리고 더하고 꾸미는 일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숙련된 기술과 요령을 터득하면 언젠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화가들의 표현대로 말하면, ‘덜어내고, 비우기입니다.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핵심적인 부분은 남기고 나머지는 생략하며, 의미와 표현의 과잉을 피해 생각을 덜어내고, 표현을 최대한으로 절제해 가는 . 이것이 작품에서 뭔가를덜어내고 비우는과정입니다. 이는 요령이나 기술이 아닌 오랜 창작의 경험과 타고난 감각에 의해 터득되는 기술입니다. 무엇을 더하기보다 무엇을 빼는 것은 정말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본성이 자신이 가진 것을빼기보다는더하기, 자신이 가진 것을나누기보다는곱하기 집착하기 때문이죠.

 

과유불급(過猶不及).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

모두가 아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삶에서 이를 실천하고 내려놓을 때를 분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림도 끝나는 시점에 정확히 붓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결국 그림을 망치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한치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덜어내고, 비우기우리는 무엇을 덜어내고, 비워야 할까요?

 

오늘 복음서 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지혜를 보여줍니다. 바로과잉에 대한 경계입니다. 예수의성전 정화 사건 예수가 죽음으로 이르는 가장 확실한 죄명이 되었던 사건으로 아마도 이는 역사적 예수에게로 소급되는 사건일 겁니다. 그러나 사건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봐야 것은 예수께서 그렇게 행동하셨을까?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이에 대해 비유와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다양한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를과잉 관점에서 풀어가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근 각처에서 예루살렘에 제사를 지내려 오려면 실제로 양과 염소, 비둘기들을 가지고 성전까지 여행을 하는 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마리를 데리고 황량한 사막과 높은 산과 계곡을 지나는 순례의 여행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도적을 만나거나, 잃어버릴 염려도 많았습니다. 여행하는 동안에 가축이 다치거나 병이 수도 있고, 도적을 만날 수도 있으며, 다른 많은 변수들이 발생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쩔 없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물을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전에서 제물을 사고파는 행위는 매우 필요한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중의 신심에는 이를 이용하는 세력의 탐욕이 침투할 여지가 있는 법입니다. 성전의 장사꾼들은 성전 기득권 세력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허가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득을 최대로 하기 위해 독과점을 실시했을 겁니다. 그래서 초과 이득을 위해 탐욕을 극대화시키게 마련입니다. 이러한독과점 결국 자연스럽게 신앙보다는 기득권의 이득만을 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제사 제물에 대한 독과점뿐만 아니라 화폐의 독점도 있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만 통용되던 화폐는 은으로 만든티로의 은전이었습니다. 이유는티로 세켈 은의 순도가 가장 높았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 금지 규정으로 인해 통치자의 초상이 새겨진 로마 동전도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이 가져온 여러 동전들은 성전에서 반드시 환전을 해야만 사용 가능했습니다. 이러한거룩함의 과잉 결국 터무니없는 화폐의 독점을 낳은 것입니다. 탐욕은 결코 무엇으로도 채울 없는 인간 본질의 갈증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전 예배에 필요한 정당한 상거래를 넘어서는 이러한 기득권의탐욕의 과잉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너무 과하면 부족한 것보다 나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바라보셨던 성전은 어떤 성전입니까? 성전은 솔로몬에 의해 지어졌다가 바빌론에 의해 파괴됐었고, 페르시아에 의해 재건되었던 2성전이었습니다. 이를 에돔(이두메) 출신의 헤롯 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19년부터 10년간 증축을 했던 성전이었습니다. 바로 성전은 70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는 운명을 맞이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유대교의 사상적,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역사적 중심에 계셨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자이신 하느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은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대체했던 신앙의 중심이었고 유대인 역사와 모든 정신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의 기득권을 가진 자들: 사두가이파, 제사장들, 서기관들은 이러한 유대민족의 중심이 되는 곳을 이용해서 선량한 민중을 기만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특권이 가능했던 것은 로마에 합당한 세금만 지불하면, 로마는 성전에 대한 독과점과 제의도 모두 용인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십일조와 성전세, 제물과 환전의 이익으로 그들은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의 종교적 상징성을 파괴하는 행위는 비단 예수님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유대민족의 타락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성전 대문에 서서 유대인들의 타락을 고발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찾아와 나의 앞에 나서서 살려주셔서 고맙다고 하고는 또 갖가지 역겨운 짓을 그대로 하고 있으니,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너희가 하는 짓을 나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내 말이니 잘 들어라.”(예레 7: 10-11)

 

예레미야서 7장은성전 설교 유명한 구절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몰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분명히 예레미야를 연상했을 것입니다. “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예수의 외침은 바로 예레미야의 외침과 맥을 같이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상상하고 예배할 있는 유일한 곳이 성전입니다. 성전의 제물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은총으로 교환하는신령한 가치 지닌 곳이었습니다. 예배의 제물은 그들의 마음이었고, 그들의 성전에 대한 믿음은 바로 하느님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기득권 세력은 이러한신령한 교환가치 전도시켜 단순히 상업적소비가치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성전 제물에 대한 그들의 독과점은 모든 사람을 신앙의 소비자로 만들어버린 거죠. 제물을 사려면티로 은전으로 환전을 후에 사야만 했으니 다른 곳에서 오거나 가져온 제물은 성전에서 인정받기 힘들었습니다. 오직 성전에서 판매하는 선별된 제물만 유효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순진한 유대인들의 신앙심을 이용한 이러한 장사를 성전의 중심 세력들은 하느님의 전에서 자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가 십분 이해가 됩니다.

 

성전 정화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서 모두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마태오, 루가, 마르코가성전 정화 사건 예수의예루살렘 입성뒤에 배치한 것에 비해, 오늘 복음서인 요한은가나의 혼인 잔치이후에 이를 배치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시간적 순서를 염두에 뒀던 마태오, 루가 , 마르코와 달리 요한은 주제를 중심으로 이를 배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앞부분에 배치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예루살렘 입성 12장에서향유를 부은 마리아이야기 다음에나 나옵니다. 화려한 예루살렘 입성은 그의 죽음에 대한 서막을 알리는 역할을 것입니다. 요한은 성전 정화 이야기를 앞에 배치하면서 이야기에서 자신의 복음서의 주제를 완전히 드러냅니다. 이는 그가 인용한 성서 구절에서 확인할 있습니다. 

 

“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요한 2: 16)

 

이는 즈카리야 14: 21 연관됩니다. “ 날이 오면, 다시는 만군의 야훼의 전에 장사꾼이 있지 못하리라.” 마지막 하느님의 성전에서 오직 야훼 하느님만 예배 가운데 영광 받게 종말론적 환상이 그대로 요한복음에도 전해집니다. 그리고양과 소를 쫓아내고”, “환전상의 상을 둘러엎은 성전의 제사가 양이나 소나 비둘기의 죽음으로 이뤄지던 예배가 이제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대치됨을 상징합니다. 참된 예배의 모습. 그리고 성전을 대체하는 그리스도의 . 이는 요한이 제시하는 종말론적 성취의 모습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이제 새로운 예배와 성전이 제시되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되는 성전으로서의 그의 몸입니다.  새로운 성전은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만들어질 성전입니다. 그래서 중세 성당을 지을 때는 제단 밑에 순교자의 유골이나 유품을 묻고 위에 성당을 지었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성당은 순교 희생의 위에 세워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희생 없는 성전과 성당은 그리스도 없는 건축물에 불과할 뿐입니다.

 

물질에 대한 과잉은 탐욕을 낳습니다. 자존감의 과잉은 과대망상을 부릅니다. 신앙의 과잉은 맹신을 부르며, 사랑의 과잉은 집착을 부릅니다. 성공회는 비아 메디아’(via media)라는 정신을 추구합니다. 이러한 비아 메디아는 양극단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양극단을 포용하는 비아 메디아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양극단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닌 우유부단함으로 비칠 있는 것이 또한 비아 메디아입니다. 그럼 어떻게 비아 메디아는 가능할까요? 그것은 오직 희생 의해서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넘쳐나는 탐욕과 맹신의 과잉에 대해 자신의 몸을 내어줌으로 새로운 성전을 약속하셨습니다. 희생 앞에 탐욕도, 과대망상도, 집착도, 맹신도 무너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희생의 정신이 죽어버린 빈껍데기 성전을 향해 무너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 9:22 개역)

 

희생이 없은즉 성당도 그리스도교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 위에 세워진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희생 없는 신앙은 단순히 신앙을 소비하는 것일 뿐입니다. 희생이 분명 자기 비하는 아닐 겁니다. 그것은 부활을 전제로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희생 없는 사랑은 집착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 새로운 성전은 그러한 토대 위에서만 세워질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인류가 직면한 모든 문제들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결국과잉이란 말로 귀결이 되는 같습니다. 한정된 자원의 사용에 대한 과잉. 우리가 이미 목격하고 있는 대로 환경의 재앙으로 다가왔습니다. ‘편리의 과잉 1회용 폐기물의 과잉 사용을 불러왔습니다. 코로나 19 펜데믹이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이제플라스틱 펜데믹 걱정해야 하는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단지 과잉이 자원이나 쓰레기의 문제뿐일까요? 한쪽으로 치우친 모든 것은 결국 과잉을 불러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전을 비우고 덜어내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삶에서덜어내고 비워야 무엇인지 생각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일의 과잉은 결국 우리의 건강의 소진을 가져올 것이고, 게으름의 과잉은 우리를 나태의 질퍽한 늪으로 빠지게 것입니다. 덜어내고, 비우는 우리를 조금은 불편하게 만들고, 조금은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것입니다. 사순 3주일을 보내며 우리가 매주일 참회의 연도를 반복해서 바치면서 얼마나 우리 자신이 기도문 대로 결단을 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참회 연도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불충하고 교만하고 위선적이었으며, 참을성이 없었고, 자신의 욕망대로 살며 사리사욕만을 위해 살았나이다.” 

 

그리고 우리는아멘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나이다.”  

 

우리의 회개가 매일 반복적인 입술의 고백에만 머문다면 우리는 발짝도 주님 앞으로 내디딜 없습니다. 많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소소한 것에서부터 우리를 비우고 덜어내는 첫발을 디뎠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의 시간과 사순절이 그동안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참다운 회개의 기회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사순3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살아계신 하느님,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계명을 새겨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십자가의 능력과 지혜를 따라 헛된 욕심을 버리고,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으로 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출애 20:1-17

1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너희 하느님은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낸 하느님이다. 3 너희는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위에 있는 것이나, 아래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후손 대에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7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안에 머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12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것이다.

13 살인하지 못한다.

14 간음하지 못한다.

15 도둑질하지 못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시편 19

1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창공은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2    낮은 낮에게 말을 전하고
.     밤은 밤에게 일을 알려 줍니다.

3     이야기도 말소리도
.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세상 끝까지 번져 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주시니,

.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끝에서 나와

     하늘 끝으로 돌아가고
.     뜨거움을 벗어날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주님의 법도는 변함 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 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주님의 법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좋고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있어 허물을 알리이까?
.     모르고 짓는 죄일랑 말끔히 씻어 주소서.

13  일부러 지을세라 막아 주시고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지켜 주소서.

.     그제야 몸은 대역죄 씻고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바위요, 구원자이신 주여,
.     생각과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1:18 - 25

18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성서에도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버리고 똑똑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이사 29:14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20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21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 . 24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요한 2:13-22

13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14 그리고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버리며 상을 둘러엎으셨다. 16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이것들을 거두어가라. 다시는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꾸짖으셨다. 17 광경을 제자들의 머리에는하느님이시여, 하느님의 집을 아끼는 열정이 나를 불사르리이다. 시편 69:9하신 성서의 말씀이 떠올랐다. 18 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이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주겠소?” 하고 예수께 대들었다. 19 예수께서는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들이 예수께 성전을 짓는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21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