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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의 친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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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5. 31.

 

2021. 5. 30. 나해_성삼위일체주일

이사 6:1-9 / 시편 29 / 로마 8:12-17 / 요한 3:1-17

 

 

 

진리와의 친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채야고보 신부 / artist, 성공회 사제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히브 1:3)

 

 

오늘 본문 말씀들은 하나같이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없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인간의 언어와 말로, 인간의 상상과 지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계. 그렇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세계에 대한 표현을 읽고 이해하는 데서 오는 우리의 한계. 우리 언어와 말이 가진 표현의 한계, 우리 경험의 한계, 우리 인지능력의 한계를 깨닫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이사 6:5)

 

 

구약시대에는 하느님을 자는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한계를 이렇게 역설적으로 대비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역설은 하느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인간 표현의 다른 이름입니다. 역설(영어: paradox, 逆說) 모순된 가지를 통하여 어떤 것을 표현하거나 논리를 전개할 사용하는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영광은 인간이 가진 가장 소중한 생명과 비견될 있고, 이는 결국 죽음이란 역설로 영광을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상 하느님의 영광을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 (이사 6:1-2)

 

이사야가 환상은 세상에서는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는 기이한 현상입니다. 그러한 현상을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데에는 표현의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가 표현할 있는 하느님의 영광은 스랍들이 날고, 그분의 옷자락이 성소를 덮는다는 이미지였습니다. 이미지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인지하는 인간의 강력한 능력입니다. 이사야는 이미지를 통해 사실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영광에 대해 고백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가 현상에 대한 사실관계는 무의미합니다. ‘고백적 진실 언제나 사실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물활론적(hylozoistic)’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활론은 세상의 모든 생명과 만물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대자연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표현됩니다.

 

주님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뛰게 하신다. (시편 29:5-6)

 

 

모든 자연현상이 하느님의 영광을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삼라만상 모든 현상들이 주님의 섭리와 영광을 담고 있습니다. 대지진도, 번개도, 천둥도, 비와 바람도, 바다와 파도도 모두 주님의 목소리에 반응합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입니다. 모두가 인간 언어와 말의 표현적 한계에서이미지 드러난 역설적 표현들입니다.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 3:4)

 

오늘 복음서에서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한다는 주님의 역설적인 표현에 그는 자신의 경험과 인식의 한계 속에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의 이해하고 표현할 인간의 말이나, 그것을 인지할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느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이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요한 3:12)

 

“τὰ ἐπουράνια 에푸라니아, 하늘의 것들 그대로 우리의 이해와 인지능력을 넘어선 세계입니다. 초월과 내재의 간극은 하늘과 땅이 것처럼 우리의 인식 속에서 커다란 간극을 만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표현할, ‘하늘의 표현할 적절한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말과 이미지로 이를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소쇠르가파롤 parole’이라 규정했던 것과 유사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표현할랑그 langue’ 같이 합의되고 체계적이고 보편적인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에는 처음부터 역설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하늘의 표현한 중에 삼위일체만큼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교회의 고백적 진술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교회의고백적 진실 의존합니다. 성서 어디에도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부, 성자, 성령을 역할에 따라양태론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분이신데 역할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각각 활동하신다는 말입니다. 마치 불이 열과 빛과 에너지를 갖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는 삼위일체를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하려는 데서 오해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삼위일체를 three substanses one essence 3개의 실체에 하나의 본질 또는 three individual existances sharing one essence 하나의 본질에 3개의 개별적 존재로 설명해왔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 표현의 한계를 여실이 담고 있습니다.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은 하느님과 아들과 성령에 대해 무수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는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면서도, 성령에 대해서는 역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요한은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나아간다고 있습니다.

 

“말씀은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요한 1:2)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말씀으로 창세 전부터 선재하셨음을 요한복음 1로고스 찬가에서 선포합니다. 그런 하느님과 예수의 관계를 관계론적으로도 설명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요한 17:21b)

 

그리고 성령을 그러한 성부와 성자의 친교 속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협조자, 파라클레토스 παράκλητος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요한 14: 16)

 

이미 이러한 친교는 이상 존재론적 담론에 묶이지 않습니다. 이러한친교적 관계성 지지울러스는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라는 말을 사용하여 설명한 있습니다. 휘포스타시스는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말인데, 위격 또는 인격이라 번역될 있습니다. 사막 교부들의 오랜 경험과 묵상 그리고 고행 속에서 터득된 통찰은 단순한 신학적, 교리적 진술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우리 인간 언어와 말의 한계, 인간 인식과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명상과 신비 그리고 체험을 통해 터득된고백적 진실입니다. 결국 삼위일체의 관계성은 교회가 그동안 논의해왔던 삼위일체의 존재론이 확정적이고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에이비스의 표현대로, 관계적이며 잠정적임을 알게 합니다. 이제있음 어떤 실체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친교 이끕니다. 존재가 친교가 있음을 우리는휘포스타시스라는 말속에서 가능성을 발견합니다.인격과 존재 구분이 사라지고, “진리와 친교 하나가 있음이 우리에게 희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께서 성부 안에, 우리가 성자 안에,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초월과 내재의 친교의 관계성이 삼위일체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성의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다 하여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아버지, 이제는 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십시오.” (요한 17:4-5a)

 

결국 삼위일체의 친교적 관계성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구약성서의 많은 기자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한계를 넘어, 우리는 영광을 표현하는 새로운 길이 삼위일체 속에 있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자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하심으로 이미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고 이를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을 우리가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니지만, 부활과 승천의 증인들로부터 물려받은 진술이진실임을 우리가 믿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존재론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하려 해도 마치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공허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친교의 관계성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일상 속에서 찾았으면 합니다. 요한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삼위일체의 친교 속에 놓이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5:9, 12)

 

크리스천에게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너무도 자주 듣는 . “서로 사랑하여라.” 알면서도 사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약한 의지를 도우십니다. 삼위일체주일. 구약시대에 하느님의 영광을 표현할 길이 없었던 이스라엘보다 삼위일체의 관계성을 가진 우리가 복됨을 새삼 느낍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가 삼위일체적 친교 속에서 서로를 사랑할 우리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증명됩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단순한 신학적, 교리적 용어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 속에 드러나는 사랑의 친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삼위일체의 친교의 은총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삼위일체주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찬송 받으실 삼위일체 하느님, 주님께서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지극한 영광과 권능을 경배하며 찬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사 6:1-9

1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2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다녔다(스랍은 천상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천신 가운데 하나로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의미). 3 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     만군의 야훼,

.     그의 영광이 땅에 가득하시다.”

4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5 내가 부르짖었다.

.   큰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여 살면서

.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6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가지고 날아와서 7 그것을 입에 대고 말하였다.

.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8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것인가?”

.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9 주께서 이르셨다.

.   너는 가서 백성에게 일러라.

.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마라.’ 마라대신에못하리라 옮길 수도 있음

 

 

시편 29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영광과 권능을

.     주님께 돌려 드려라.

2     이름이 지니는 영광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거룩한 두르신

.     주님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주님의 목소리가

.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     영광의 하느님께서

.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4    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     목소리는 힘차시고
.     목소리는 장엄하시다.

5    주님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뛰게 하신다.

7,8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     광야가 흔들거린다.
.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린다.

9    주님의 목소리에,

.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     숲들은 벌거숭이가 된다.

.     모두 주님의 성전에 모여
.     한결같이 영광을 기린다.

10  주께서 거센 물결 위에

.     옥좌를 잡으시고
.     영원히

.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주님의 백성들아,

.     그에게서 힘을 얻고
.     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로마 8:12-17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빚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에 빚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요한 3:1-17

1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사람이었는데 2 어느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 그러자 예수께서는정말 들어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또는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4 니고데모는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5 “정말 들어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9 니고데모는 다시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0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11 정말 들어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너희는 내가 세상 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