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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빵 다섯 개와 열두 광주리 - 성찬례의 영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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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7. 24.

2021. 7.25. 나해_연중17주일

사도 () 야고보 (7/26 옮겨 지킨다)

사무하 11:1-15 / 시편 14 / 에페 3:14-21 / 요한 6:1-21

 

 

보리빵 다섯 개와 열두 광주리

성찬례의 영성 1

 

채야고보 신부 / 제주 한일우정 교회, Artisti

 

지난주 연중 16주일 전례독서가오병이어 위를 걸으신 예수님 이야기 생략하고 도입부와 요약문으로만 구성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봤습니다. 그러면 이번 주에는 본론 부분인 오병이어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전례독서가마르코복음에서요한복음으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전례독서는 오늘부터 연중 21주일까지, 앞으로 5주간을 요한복음 6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특별절기도 아닌데 갑자기 요한복음을 읽는 것도 특이하지만, 유독 요한복음 6장을 5주간에 걸쳐 읽는 것은 더욱 특이해 보입니다. 전례독서에 따라 설교를 준비하다 보면 이러한 흐름에 매우 민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5주간의 말씀을 상관성을 찾고 묵상하며 준비하고자 합니다. 8 8 연중 19주일을주의 변모 축일 지킨다면 하루가 빠지는 4주의 시리즈 설교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요한복음 6장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기적을 이해하는 필요한 가장 중요한 단어는세메이온 σημεῖον’이란 단어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예수의 기적을이란 뜻의 ‘δύναμις 두나미스 칭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세메이온표징이란 의미인데, 이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어떤 사건을 미래에 성취될 일과 연결시켜 설명할 사용되던징표 가장 가까운 의미입니다. 이는 쉽게 말해서교통표지판처럼 어떤 것의 실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실체를 가리키는 것과 관련됩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러한세메이온 일곱 나옵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에 번이 나오는데 바로오병이어 위를 걸으심 표징입니다. 요한이 예수의 많은 기적 사화 일곱 개만 선택하여 소개한 것은 ‘7’ 갖는 완전 수의 의미가 강합니다. 일곱 가지 표징만으로도 예수의 실체를 설명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표징들이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해보길 바랍니다. 시간과 지면 관계상오병이어 이야기 집중하려고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논란이 많은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어떻게 다섯 개로 남자만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은 것이 열두 광주리나 되는가? 무슨 요술을 부린 것일까?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들 각자가 가져온 음식이 원래 있었는데,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누지 않고 있다가 어린아이가 자신이 가져온 도시락을 내놓은 것을 보고 감동해서 십시일반 내어놓은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H.E.G. 파울루스). 어떤 이는 이를 실제적 사실이 아니라 나눔을 강조한 상징적인 이야기일 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이야기가 담고 있는 의미적 진실을 살피는 것이 나을 같습니다. 분명 요한도 이러한 세메이온이 가리키는 의미를 전하고자 이야기를 전개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오병이어 이야기를 성만찬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초대교회의 성만찬의 모습을 먼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로가 기록한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1장은 성만찬에 대한 원시 기독 교회의 최초 기록이라 합니다. 이를 보면 원시 기독교 교회의 성만찬과 성찬례에 대한 단서를 얻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여서 나누는 식사는 주님의 성찬을 나누는 것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여서 음식을 먹을 때에 각각 자기가 가져온 것을 먼저 먹어치우고 따라서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는가 하면 술에 만취하는 사람도 생기니 말입니다.” (1고린 11:20-21)

 

 

초대교회는 모여서 주님의 성찬을 나눴습니다. 그러나 요즘과 차이가 있다면 애찬과 성찬이 완전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모여서 가져온 음식을 먹을 ,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하셨던 것처럼, 사제가 일어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빵을 떼어 나눠줬던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고린토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각자 자신이 가져온 것을 먼저 먹어치우는 바람에 다른 사람과 나눌 있는 것이 부족해졌습니다. 때론 취한 자도 나오곤 했습니다. 결국 음식을 가져오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굶는 일까지 발생했습니다. 성찬이 지닌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의미는 퇴색되고 그래도 자신의 욕심대로 먹고 마시는 일반적 연회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로는 그들의 인색함과 욕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린토 교인들을 책망합니다.

 

“각각 자기 집이 없어서 거기에서 먹고 마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창피를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까?” (1고린 11:22)

 

믿는 사람들의 모임인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사라지고 먹고 마시는 일로 주님의 성찬이 더럽혀졌습니다. ‘모여서 감사하고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주님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에클레시아의 사랑과 나눔의 식탁이 사라진 것입니다. 거기에는그리스도의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오병이어 이야기를 읽을 고린토 교인들처럼 실제적인 빵에 집중하게 되면 배를 채우는 양적인 빵의 증가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먹고 마시는 ’, 육신을 만족시키는 것이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섯 개로 어떻게 남자만 5 명이 먹고도 남는지 이유를 궁금해합니다. 이야기가 지닌세메이온, 표징 가리키는 것은 보지 않고, 오직 표징 자체에만 집중한 결과입니다. 도로표지판이 아무리 만들어지고 아름다워도 표지판의 기능은 방향을 지시하는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도로 표지판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않고 표지판 쳐다보다가는 낭패를 당할 있습니다. 이럴 경우 주님의 성찬이 고린토 교인들에게 연회의 의미로 변질된 것같이 오병이어 이야기도 양적인 증가와 허기를 채우는 일반적인 식사 이야기로 의미가 변질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두어라(진실로 진실로 말한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표징)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 6:26)

 

표지판 자체만 쳐다보다가 결국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의 의미를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말씀을 다음 구절에 집중에서 살펴보길 바랍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주시고 다시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누어주셨다. (요한 6: 11)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동작에 주목해 봅니다.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쪼개어) 나누어주시다입니다. ‘쪼개다 말이 본문에 빠져 있지만, 나누어주기 위해서는 쪼개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에 말에는 쪼갬도 포함된다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의최후의 만찬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를 동시에 연상시키는 동작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이를성찬제정사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고린 11: 23b-24)

 

 

들고, 기도하고, 떼고(쪼개고), 나누다 가지 기본 동작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E.셀리어스). 이를 통해 우리가 있는 것은 요한복음이 써진 요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오병이어 이야기를 들으며 주님의 최후의 만찬과 자신들이 드리는 성찬례를 동시에 생각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 후부터 원시 기독교 교회에서는 이러한 주의 만찬을 기념하는 전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례로 자리매김하는 단계의 모습을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편지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오늘날과 같은 성찬례의 모습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의미와 동작은 초기부터 이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오병이어 이야기가 지닌삶의 자리입니다. 그것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성만찬의 모습을 가리키는 세메이온이라 있습니다. 

 

잠시 오늘 본문 앞에 제시된 요한복음 6 4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유다인들의 명절인 과월절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요한복음은 오병이어 기적이 발생한 때를 유월절 전으로 특정하고 있습니다. 보통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가정의 가장은 자녀들에게 누룩이 없는 빵을 먹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이를 기억하도록 자녀들에게 가르칩니다. 그런 설명 후에는 가장이  빵을들어 기도하고 쪼개서자녀들에게나누어줍니다’. 이러한 행위 빵을 들어 기도하고 쪼개고 나누는 동작 이미 유대인들에게 너무 익숙한 동작이었습니다. 그러한 동작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는 인지 못해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금방 있었을 겁니다. 그러한 동작은 유월절 밤마다 모든 유대인들이 경험하는 동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주님께서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쪼개시고 나누어주신 동작을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있는 동작이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유월절에 문설주에 발랐던 희생양의 피를 연상시켰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느님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말은 예수 자신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 임을 모두에게 암시한 동작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9장은 예수의 희생을 유월절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어야만 하느님의 구속사가 이루어짐을 미리 보여주신 표징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오병이어 이야기 당시에 자리에 있었던 대중보다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당시에도 기적의 의미를 몰라 자신의 배만 채운 것에 만족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표징은 깨닫는 자의 몫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주님께서 행하신 가지 동작의 의미를 살펴봐야 합니다. 동작은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성육신 하신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친히 십자가에 들리시어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자신의 몸을 찢어 우리 모두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언어유희 같지만, 마디의 성찬기도 동작은 정확히 십자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병이어의 표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죽음을 당하실 것인지 그리고 자신이 많은 이들에게 나눠질 생명의 빵임을 분명히 암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몸이들려지시고, 쪼개어져서, 나뉠 바로 보리 다섯 개가 열두 광주리가 되는 기적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분명히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고기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의 빵이고 주님의 몸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섯과 열둘에 집중해 봅니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숫자에 민감한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이 12이고, 이스라엘 지파가 12이며, 예수의 제자도 12입니다. 12 완전함을 뜻하며 동시에 축복의 의미도 포함됩니다. 이보다 적은 수이지만 유사한 의미의 숫자가 3 7입니다. 또한 완전함과 신비를 담고 있는 숫자입니다. 그러나 다섯 개의 빵과 마리의 물고기는 이미 숫자에서 불완전함을 보여줍니다. (물론 5 인간의 수인 4에서 하나를 더해은혜 나타낸다고도 하지만 여기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같습니다.) 만약 일곱 개의 빵과 마리의 물고기였다면 12 광주리라는 표현은 필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일곱 개와 물고기 이야기 마르코와 마태오가 전하고 있지만, 또한 일곱은 명확하지만, 물고기의 숫자에 대해서 불분명한 수를 제시합니다. 그러므로다섯 개의 빵과 마리의 물고기 일곱 개와 물고기 마리 물질의 완전하지 않은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찬례에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가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그냥 음식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물질이들고, 축복하고, 쪼개고, 나누는기도의 동작을 통해 완전함에 이르러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몸이 십자가에서 쪼개지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신성의 영광을 덧입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할 불완전한 다섯 개와 마리의 물고기는 열두 광주리라는 완전함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배불리 먹고 마시는 빵과 물고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몸을 먹고 마시는 은총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면 되는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몸을 함께 먹고 피를 마심으로 그분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찬례가 지닌 신비입니다. 이런 이유로 원시 기독교 교회는 로마나 이방인들로부터식인 식사 하는 밀교로 오해와 핍박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표징이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고 표징 자체에 집중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입니다. 영적인 것이 가시적인 것으로 드러날 그것은 오직 상징을 통해서만 가능함이 여기에서도 증명됩니다. 그러나 상징과 실체는 결코 본질적으로 같지 않다는 전제가 여기에서 요구됩니다. 그래야 우상숭배의 위험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이들리고, 쪼개지고, 나눠져야우리와 함께 하실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남음 열두 광주리는 바로 그의 은총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이고, 우리 교회를 각각 상징함을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와 성육신의 의미를 아는 남은 자들이기 때문이고, 그분의 몸을 나눠먹어 주님과 몸을 이룬 에클레시아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들고, 기도하고, 쪼개고, 나누는기도의 행위가 곧바로 자신의 십자가를 가리키는 표징이듯이 이는 우리에게 이러한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도시락을 아낌없이 내어놓은 어린아이의 행동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가 성만찬에 가져왔던 음식 나눔의 유비類比입니다. 성만찬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많이 가져왔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은 빈손으로 왔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누가 많이 내고 적게 내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찬례를 통해 어느 누구도 부족함이 없이 모두 만족하게 먹고 마실 있었다는 점입니다. 남은 것이열두 광주리였습니다.

 

들고, 기도(감사)하고, 쪼개고, 나누는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고린토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로의 책망은 이러한 사랑이 없음에 대한 책망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욕되게 하고 분열의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결국은희생과 나눔이란 말을 우리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더럽혀놔서, 신비를 가려버렸지만, 우리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표징은 정확히 이러한 신비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달라는 대로 나누어 줬다.”라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넘치게 주시는 분이심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한계가 없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총을 넘치도록 받고 있지만, ‘열두 광주리 담긴 것을 이웃에게 나눠주기에는 너무 인색해진 같습니다. 매주일 감사성찬례를 드리면서 우리가 받은 은총 남은열두 광주리 어디에 나누어줄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나눌수록오병이어처럼 더욱 차고 넘치는 법입니다. 이것이 오병이어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신비이고, 매주일 우리가 드리는 감사성찬례의 희생과 나눔의 정신입니다. 이러한 표징을 마음에 담고 주님의 뜻을 따르고자 결심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염없는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연중17주일(나해)_전례독서

 

본기도

은혜로우신 하느님, 우리들에게 생명의 말씀과 진리를 갈망하는 마음을 주셨나이다. 비오니,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의 양식임을 깨닫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하 11:1-15

1 해가 바뀌는 때가 왕들이 싸움을 일으키는 때였다.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에게 자기 부하 장교들과 이스라엘 전군을 맡겨 내보냈다. 그들은 암몬을 무찌르고 마침내 라빠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2  어느 저녁에 다윗은 침대에서 일어나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여인을 보게 되었다.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3 다윗이 사령을 보내어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니, 사령은 돌아와서 여인은 엘리암의 바쎄바인데 남편은 사람 우리야라고 보고하였다. 4 다윗은 사령을 보내어 여인을 데려다가 정을 통하고는 돌려 보냈다. 여인은 마침 부정을 씻고 몸이 정결한 때였다. 5 바쎄바의 몸에 태기가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자기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렸다.

6 그러자 다윗은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어 사람 우리야를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였다. 요압이 우리야를 다윗에게 보냈다. 7 우리야가 당도하자 다윗은 요압과 병사들의 안부를 묻고 싸움터의 형편도 알아보고 나서 8 집에 돌아가 쉬라고 하였다. 우리야가 어전에서 물러나올 왕은 술상까지 딸려 보냈다. 9 그러나 우리야는 집으로 가지 아니하고 대궐 문간에서 근위병들과 함께 잤다.

10 다음날 다윗은 우리야가 집에 돌아가 자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우리야에게 물었다. “그대는 길에서 돌아온 몸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하여 집에 내려가 보지 않았는가?” 11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 이스라엘 군과 유다 군이 야영 중입니다. 법궤도 거기에 있습니다. 상관 요압 장군이나 임금님의 부하들도 들판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집에 가서 편히 쉬며 먹고 마시고 아내와 더불어 밤을 지내다니, 도저히 그렇게는 없습니다.” 12 다윗은그럼 오늘은 여기에서 지내도록 하오.” 하며 우리야에게 내일은 돌아가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우리야는 날도 예루살렘에서 묵었다. 13 다음날 다윗은 우리야를 불러들여 식탁에서 먹고 마시게 하여 그를 흠뻑 취하게 만들었다. 우리야는 저녁에도 어전에서 물러나와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근위병들과 함께 잤다.

14 날이 밝자 다윗은 요압 앞으로 편지를 써서 우리야에게 주어 보냈다. 15 다윗은 편지에 이렇게 썼다. “우리야를 가장 전투가 심한 곳에 앞세워 내보내고 너희는 뒤로 물러나서 그를 맞아죽게 하여라.”

 

 

시편 14

1    어리석은 자들, 속으로 이르기를
.   “하느님은 어디 있느냐?” 말들 하면서,

  썩은 , 추한 일에 모두 빠져서
.     착한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2    주여, 하늘에서 세상 굽어보시며

.     혹시나 슬기로운 사람 있는지
.     하느님 찾는 혹시라도 있는지 두루 살피지만

3    모두들 찾아 벗어나서

.     한결같이 썩은 일에 마음 모두어
.     착한 하는 사람 하나 없구나.

4    언제나 깨달으랴 악한들.
.     먹듯 백성 집어 삼키며,

.     주님은 부르지도 않는구나.

5    하느님께서 옳게 사는 이들과 함께 계시니
.     저자들은 겁에 질려 소스라치리라.

6    비천한 자들 생각을, 너희가 비웃지만
.     주께서 그들을 감싸주신다.

7    이스라엘의 구원은 시온에서 오리니,

.     잡혀 당신 백성을 주께서 데려 오실 ,
.     야곱은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은 기쁘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에페 3:14-21

14-15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 드립니다. 16 넘쳐 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우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17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있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감으로써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19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20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면서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풍성하게 베풀어주실 있는 분이십니다. 21 하느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세세무궁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요한 6:1-21

1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사람들이 떼를 지어 예수를 따라갔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신 기적을 보았던 것이다. 3 예수께서는 산등성이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자리잡고 앉으셨다. 4 유다인들의 명절인 과월절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5 예수께서는 군중이 자기에게 몰려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사람들을 먹일 만한 빵을 우리가 어디서 사올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것은 단지 필립보의 속을 떠보려고 하신 말씀이었고 예수께서는 하실 일을 이미 마음속에 작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7 필립보는 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이라도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8 제자 중의 하나이며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안드레아는 9여기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되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0 예수께서 그들에게사람들을 모두 앉혀라.” 하고 분부하셨다. 마침 곳에는 풀이 많았는데 거기에 앉은 사람은 남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다. 11 예수께서는 손에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달라는 대로 나누어주시고 다시 물고기도 그와 같이 하여 나누어주셨다. 12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조금도 버리지 말고 남은 조각을 모아들여라.” 하고 이르셨다. 13 그래서 보리빵 다섯 개를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제자들이 모았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14 예수께서 베푸신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이분이야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예언자이시다.” 하고 저마다 말하였다. 15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

16 저녁때 제자들은 호숫가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저편에 있는 가파르나움으로 저어갔다. 예수께서는 어둠이 이미 짙어졌는데도 그들에게 돌아오지 않으셨다. 18 거센 바람이 불고 바다 물결은 사나워졌다. 19 그런데 들이 배를 저어 십여 리쯤 갔을 예수께서 위를 걸어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셨다. 광경을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 2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나다, 두려워할 없다.” 하시자 21 제자들은 예수를 안에 모셔 들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배는 어느새 그들의 목적지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