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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의 여성 - 교회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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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8. 10.

빈첸츠 카츨러, <1583년 마녀 엘자 플라이나허의 화형>, 1880년께, 석판화, 출처: 울슈타인빌트 게티이미지(Ullstein Bild via Getty Images) 사진출처: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41028.html#csidxa4a29c8d06c3ca8aa1ecc657a6c4c3f 

 

* 이 글은 성공회 신학대학원 여성신학 발제로 작성된 글입니다.

 

중세교회의 여성

 

채야고보 / 2017.10.11

 

     우리는 예수 시대와 초대 교회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중세교회와는 달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린토 교회에서 여성들에게 이중적으로 처신했던 바울로 조차도 그의 서신서 곳곳에 여성 성직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있다. 교회의 제도가 차츰 남성중심적으로 개편되기 이전까지유다-그리스도교 패러다임고대 교회-헬레니즘 패러다임시대에서는 분명 여성은 교회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1)

 

    그런데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까? 한스 큉은 서방에서 5세기 이래로 형성된 번째 패러다임인중세-라틴 패러다임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그가 분석하기로 여성의 지위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요인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된다. 1)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 신학, 2) 중앙집권적 로마 교황권의 확립, 3) 게르만족의 새로운 신심 등이다. 

 

     이에 대해서 한스 큉의그리스도교 여성사 중심으로 요약하며 정황들을 살펴본다.  신비주의에 관해서, 특별히베긴회 대해서는 한스 큉이 간단히 다뤘기 때문에 다른 자료를 인용해서 설명을 보충했다. 

**대부분 한스 큉의 [그리스도교 여성사]를 요약한 것으로 출처를 위한 각주는 생략한다. 또한 “베긴회”에 대한 자료는 김재현의 [메히트힐트를 중심으로한 베긴회 연구]를 참조해서 요약했으므로 이 또한 각주는 생략한다. 그 이외의 자료에 한해서만 출처를 표시했다.**

 

 

1.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

     그의 신학적 업적은 교회사에서 절대적이다. 그러나 그는 여성의 지위를 교회에서 배제시킨 장본인이다.  그리스적 지성의 우월성에 맞서 의지와 사랑의 우월성을 주장했던 그가 여성에 대해서 이토록 혐오적인 생각을 갖게된 것은 무엇일까? 이는 그의 삶의 정황을 들여다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젊은 시절 성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고 심지어는 마니교에 심취했던 경험은 그의 회심 후에 그를 극도로 대한 혐오를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는 아담의 죄를 인간의 최초의 죄로 보기 보다 모든 인간에 해당되는원죄 보았다. 그리고 원죄를 육적인 욕구와 결부시켜, 결국 원죄는성행위와 육적욕구 유사한 것이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이원론적 생각이다. 그는 정신의 차원에서는 남자와 여자 모두하느님의 모상 취했다고 주장하며 남녀의 동등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육체적인 측면에서는 여성의 열등성을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여성은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은 같이 죄나 유혹에 취약한 존재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관계를 오직자녀 출산에만 국한 시켰다. 성욕을 채우기 위한 행위는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죄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심지어 그는 성욕을 통해 원죄가 유전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견해는 초기 스콜라 신학에서도 견지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엄격한 성윤리가 중세교회에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성직자나 평신도 모두에게거룩한 (성체나 성물)” 접근하거나 접촉할 때는 엄격한순결 요구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 교회에서는 특정한  엘리트들에게만 적용되었던금욕 이제는 교회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중세 기독교가 유대교화된 것이라 치부해서는 된다.  이는 단순히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등의 종교와 관련된다기 보다 오히려오랜 옛날부터 널리 퍼져 있던 윤리적 표상이며, 부분적으로는 고대 자연의학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해서는 교회는 아직도 고대의 자연의학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다.

 

 

2. 독신주의와 교황권 확립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이 정착하기까지 우리는 로마교회와 독일 황제 간의 지난한 투쟁이 있었음을 안다. 결국 승리의 잔을 마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 토대 뿐만 아니라교회정치적 토대 확고하게 하고자 했다. 중앙집권화는성직자 중심화 뜻했다. 그는  성직자들의 조건 없는 순종과 독신을 의결했던 1059 라테란 시노드의 결의 사항을 1074년에 재가했다. 라테란 시노드 이후 대부분의 성직자들이독신 반대해서, 특히 독일의 성직자들, 실효성이 별로 없었는데, 그레고리우스는파타리아(무뢰한들)”라는 평신도들을 선동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이러한 평신도들에 의한성직자 보이콧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으며 효과는 확실했다. 결국 1139 2 라테란 공의회에서 문제는 최종 결말이 났다. 이전까지 금지되긴 했지만 법적으로 유효했던 사제 결혼이 처음부터 무효가 것이다. 결과 아내들은 첩의 취급을 받았고, 자녀들은 교회의 재산으로 귀속됐다. 이러한 독신법은 결과적으로 성직자,교권제도,사제 계급과 평신도를 완전히 분리시켜 백성 위에 군림하는 권위를 만드는데 기여했다. 성직자 중심의 중세교회가 성립된 것이다. 

 

 

3. 토마스 아퀴나스: “여자, 잘못 만들어진 남자!”

    신앙에 이성을, 은총에 맞서 자연을, 신학에 맞서 철학을, 그리스도교적인 것에 맞서 인간적인 가치를 존중했던 아퀴나스도 교회의 여성협오에 일익을 감당했다. 물론 그는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여성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더욱 강화하거나 정제함으로써 차원 나아가고 말았다.  남성이여성의 원리요 목적이며 여성은어딘가 모자라고 잘못 만들어진 존재라고 주장했다.  결국 여자는 실수로잘못 만들어진 남자!”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중세 교회 내에 여성 성직자나 여성 설교를 상상이나 있겠는가? 여성의 사제품은 허용될 수도 없을 뿐아니라 효력 자체도 없게 여겨졌다.  그러나 한스 큉은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도 시대의 패러다임에 갖힌 사람이라고 그를 두둔한다. 그렇다고 그이 여성 혐오 혐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철저히남성적 시각과 패러다임에서 자신들의 신학을 전개한 것은 분명하다.

 

 

4. 중세교회의 여성 패러다임과 마녀사냥

    교권 구조들의 확립 성사 영역에서의남성 지배권 관철”, 수도원과 교회, 그리고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던성에 대한 적대감”. 당시 사회 문화적으로 당연히 여겼던교육 경시(여성교육은 더욱 멸시됨)” 그리고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엄격한 윤리”.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중세 세계의 이상적 표상이 수정된다. “사제-수사-수녀와 그들의 금욕적 이상에 의해 규정되는 세계”. 이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사유 재산을 갖지 않음으로써 이미 땅에서 하늘나라를 체현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육신이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에 오로지 자녀의 출산을 목적으로만 성적 결합이 가능하다. 피임과 낙태는 꿈도 없다. 

 

    중세의 패러다임에서는 육신은영혼의 감옥이며, 원죄를 유전하는육욕의 전염 장소일 뿐이다. “육체의 배척 사탄의 유혹에 취약한 여성의 몸에 집중된다. 여기에서 중세여성의 몸의 혐오 생겨나며 이는마녀 사냥 배경이 된다. 

 

    그리고 중세시대에 몇몇 엘리트 여성들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여성들이 재산권이나 남성과 같은 권리와 임금을 제공받지 못했다. 중세는 가부장적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5. 교회 여성의 지위와 신비주의 : 베긴회

    중세 사회의 아이러니는 한편에서는 성직자의 독신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 결혼 등을 폐하고 결혼을 공공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나아가 성사적 지위까지 부여했다는 점이다. 교회 조직의 가부장화는 더욱 탄력을 받아 교황이 그리스도교계의아버지, ‘교회어머니 등장하고, 교회 여성배제를 더욱 심화시켜 나아갔다.  교회법은남편에 대한 아내의 복종을 확증했으며, 상속권은 남자에게만 주어졌다.  여성에 대한 이상형은금욕적 삶을 영위하는 수녀 되었으며, 여자는 교회의 모든 직무에서 배제되었다. 카타리파(알비파,순수파)(2) 왈도파(3) 민중에게 호웅을 얻자 이들을 단죄하고 여성 설교도 금지되었다. 

 

     중세 여성들의 사회적으로 공인된 출구는 결혼과 수도원 밖에 없었다. 여성의 출신과 결혼 지참금은 여성과 사회를 얽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고 또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지었다. 심지어 수녀원에 입회하기 위해서도 지참금을 지불해야했다.  그래서 수녀원은 종종 귀족과 부유층 여인들의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4)  아내수녀라는 이러한 제한된 범주를 넘으려는 시도가 신비주의를 통해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세 신비주의, 특히 독일의 신비주의에서 여성의 역할은 지대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나 요한 타울러 등과 같은 유명한 남자들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12세기 수녀원 원장이었던 힐데가르트가 지도하던 라인 부근 베긴의 베네딕도회 수녀원이 신비주의 중심지 하나였다.  이들은 베긴회(Beguines) 불린다. 베긴회는 공인된 종교적 교단에 소속되지 않고서도 자발적인 가난, 청결, 종교적인 헌신의 삶을 살았던 여성들이다. 

 

    베긴회는 1170-1175 오늘날 벨기에인 브라방(Brabant) 리에쥐(Liege)교구에서 시작했다. ‘베긴이란 이름은 사제였던 ‘Lambert le Begue’(the Stammerer)라는 사람을 따라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여성들을 존중했고종교적으로 살기 원하는 여성들을 격려했다. ‘Beguines’라는 명칭은거룩한 여인들혹은종교적이고 경건한 여인들 뜻하기도 했고, 동시에이단’, ‘말더듬이’(stammerer), 또는베긴들이라 불리는 저속한 여인들이라는  폄하적 의미로 불려졌다. 

 

    베긴회가 중세에 급속도로 확장되었는데 원인은 베긴회 특유의 유연성에 있다. 번의 서원으로 여성을 일생 동안 수도원에 묶어 두지 않았다. 또한 결혼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이와함께 여성의 자발성과 자율권을 존중했다. 그러므로 자발성과 자율성을 강조한 베긴회는 다른 수도회처럼 위계서열에 얽매이길 거부했다. 물론 규칙이나 특정 교리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원자들의 지참금이나 땅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당시 발흥하기 시작했던 신흥 산업사회에 어울리는 도회적 삶을 살았다. 물론 자율성과 자발성을 강조한 베긴회는 지역마다 특성이 달라 가지로 보편화해서 말하는 것이 어렵지만, 육아, 젖먹이기, 길쌈, 양조일, 가내 수공업 등과 같은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러한 베긴회의 발전과정을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베긴들은 자신이나 부모의 집을 떠나지 않았고개종자 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했다. 서원이나 경제적 포기 등에서도 자유로웠다. 둘째 단계로,  13세기 접어들면서 베긴회는 어느 정도의 규율을 가진 연합체로 발전했다. 일군의 여성 상급자로 구성된 위원회와 함께 가장 상층부에 속한여주인’(mistress, magistra, clerical beguine) 등장해 그룹들을 순회방문하면서 그들의 삶과 신앙을 지도했다. 셋째, 병원 등을 중심으로 구제와 봉사 기관의 등장과 함께분리된 베긴회’(beguina clausae)구역이 등장했고, 점차 주변에 몰려 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베긴회는 점차 독거 여성들이나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자선기관으로 발전했다. 넷째로, 13세기 후반 베긴회는 “beguinage”라는 베긴 공동체를 형성했다. 베긴 공동체는 교구로 지정되기도 하는 , 점차 수도원의 공동체생활 단위를 갖추게 되었다. ‘도시 속의 도시 불리는 베긴 공동체인베기나쥐 대표적이다. 

 

     베긴회의 영성은사도적인 ’(vita apostolica)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도적 삶을 살기 위해원시 기독교’(primitive Christianity) 돌아가고자 했다. ‘사도적 요약하면 자유(liberty), 청빈(poverty), 단순함(simplicity)이다. ‘사도적 당시 사회의 새로운 종교적 열정과 개혁에 대한 갈망, 그리고 탁발수도회 등의 등장과 같은 사회적 종교적 열정과 정서를 함축적으로 담은 말이다.  이러한 베긴회의 청빈의 삶은 당시 성직자들의 탐욕과 부패에 날카롭게 대치되었다. 제도권 교회는 이러한 새로운 흐름을 위협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들을 박해하고 핍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들은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제도권 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설교를 비롯한 다양한 저작활동도 했다. 평민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자국어 사용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 이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교회에게는 도전으로 여겨졌다. 나아가 이들은 제도권 교회에서 년에 한번, 또는 번의 성찬에 참여하는 것에 반해서 매주 한번 혹은 빈번히 성찬을 받기를 원했다. 

 

     이들은 철저히 개인적인 신비적 경험에 의존했고, 개개인의 영혼이 직접 하느님과 연결될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 연결, 하나 됨을 나타내는 수많은 알레고리와 메타포를 사용했다. 특별히사랑이란 단어가 강조됐다. 그리고 이는사랑에 기초한 신비주의 발전해 갔다. 예를 들어궁정의 사랑이야기라는 세속 문학의 형태와 이미지에 하느님과 영혼의 관계라는 종교적 메타포를 연결하기도 했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서전 스타일을 본받아 영혼과 사랑의 대화라는 형태를 취해 글을 쓰기도 했다. 막데부르크의 메히트힐트는 자신의 신비체험을 기록한하느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Flowing Light of the Godhead)이라는  6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이는 최초로 독일어로 작성된 책이다.

 

    이러한 이들의 활동은 1250 이후 이단으로 종종 비판 받았고, 1311년에는 교황 클레멘스 4세에 의해 이단으로 공식 선언되었다.(5)

 

 

6. 마리아 공경

     마리아 공경이 중세 라틴 교회에서 성횡했지만, 사실 마리아 공경은헬레니즘-비잔틴 패러다임 산물이다. 동방에서 어머니 신을 숭배하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동방 교회가 마리아 공경을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 것이다. 431 에페소 공의회에서 마리아는그리스도를 낳으신 ”(christotokos)에서하느님을 낳으신 ”(theotokos) 신분이 달라졌다.  성경에서도 근거를 찾을 없는 새로운 표현이 등장한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아르테미스) 숭배하던 에페소에서 이러한 마리아론이 관철된 것은 어쩌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 주민들은 아무런 어색함도 없이마리아에게 열광했기 때문이다. 

 

     마치하느님 태어날 있는 존재인양하느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함으로 이후에 발생한 신학적 혼란은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마리아 공경이 처음에는 라틴 문화에서 거부되다가 차츰 라틴 교회의 중심으로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11,12세기에는 마리아 공경이 결국 절정기를 맞이 하여 숭배의 단계에 까지 이르렀다. 사실공경(hyper-dulia)”흠숭(latria)”이란 신학적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차이가 일반인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마리아 숭배는민중 신심 깊이 뿌리내렸다.  

 

     이러한 정황 속에마리아 공경  차츰교황 중심주의 손을 잡고 나아갔다. “마리아는 교회가 (여성의) 성과 거룩한 (성사 ) 중개 사이에 방치해 균열을 정당화해 주는, 남성에겐 비판적이지 않고 여성에게 적대적으로 남용된 예이다.  마리아라는 존재를 통해 독신 성직자들을 위한 대상(代償substitution) 인물을 만들어 냈으니, 사람들은 인물에게서영적인 방법으로친밀함•호의• 여성다움•모성을 경험할 있었음이 분명하다. 성모송에서 보여주는 겸손한 그리스도 신앙의 전형인 마리아, 역사적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여기에서 전혀 찾아 수가 없게 되었다.

 


[각주]

 

1) 한스 , 그리스도교 여성사, 이종한&오선자 . 분도출판사, 경북 왜관, 2011. Pp.15-58참조

2)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생겨난 기독교 교파. 이들의 교리는 이원론과 영지주의를 바탕으로 한다. 그들은 렉스 문디(Rex Mundi,세상의 )이라 불리는 악마가 물질적 세계를 만든 반면, 순수한 영혼이며 오점이 없는 사랑과 평화, 질서의 하느님을 구원의 하느님이라 믿었다. 

 

3) Waldenser(발도파) 12세기 리용의 종교개혁가 피터 발도(Petrus Valdes) 의해 세워진 신앙공동체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며, 성경적인 삶을 살아가려 하였다. 일각에서는 이들을 종교개혁의 선구자로 보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이들은 발도파교회로 존속하고 있다.

 

4)김재현, 메히트힐트를 중심으로한 베긴회 연구-중세르네상스 영문학 12. 한국중세르네상스영문학회, 2004. pp.1-2 참조 

5) 박광자, 은총과 하강-메히트힐트 막데부르크의 신비한 합일(unio mystica) / 헤세연구. 한국헤세학회, 2004. P.6

 


[참고도서]

한스 , 그리스도교 여성사, 이종한&오선자 . 분도출판사, 경북 왜관, 2011.

김재현, 메히트힐트를 중심으로한 베긴회 연구-중세르네상스 영문학 12. 한국중세르네상스영문학회, 2004.

박광자, 은총과 하강-메히트힐트 막데부르크의 신비한 합일(unio mystica) / 헤세연구. 한국헤세학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