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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부스러기 Crumbs of Love”- 편견과 배타성을 부수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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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9. 4.

 

 

2021. 9. 5. 나해_연중23주일

여성선교주일

잠언 22:1-2, 8-9, 22-23 / 시편 125 / 야고 2:1-10, [11-13], 14-17 / 마르 7:24-37

 

 

사랑의 부스러기Crumbs of Love

-편견과 배타성을 부수는 -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어렸을 부잣집 여자 친구 집에 초대를 받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여자 아이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어디에 살고, 부모님의 직업이 무엇인지 물어보셨습니다.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되는데, 순간 어린 저의 마음에 뭐라 표현할 없는 커다란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당황하여 머뭇거리는 저를 내려다보던 어머니의 눈빛과 입가의 야릇한 미소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이 처음으로 수치스럽게 느껴졌습니다. 내가 이런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단지 저는 여자 짝궁 집에 놀러 것뿐인데 말입니다. 후로 수치심은 저의 마음 구석에 똬리를 틀고 앉아 수시로 저의 결핍의 순간에 기억의 틈을 비집고 나와서 저를 아프게 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편견과 배타성 때문에 어린아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아마도 여자 아이의 엄마는 전혀 인식도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편견 때문에  남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이러한 편견과 배타성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합니다. 인간 존재의 존엄보다는 자본과 돈의 가치가 모든 인간 평가의 중심이 되는 사회에서 외모, 학연, 지연, 소득 소유의 조건이 인간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마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사회는 편견과 배타성으로 자신을 둘러치며, 서로가 서로를 소유와 외적 조건으로 평가하고 구분하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사회가 만들어놓은 편견을 통해 남과 다른 나를 구분 지음으로써 일종의 우월감 같은 것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타자에 대한 우월성을 느끼기 위해 더욱더 남을 타자화시켜 버리면 버릴수록 자신 또한 소외되고 외로워진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우리는 편견과 배타성으로 우리 자신을 무장하고, 남을 공격하거나 또는 자신을 방어하면서 결국상호 소외 골은 깊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여성선교주일 맞이하여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에 대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아마도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분들은 편견과 배타성을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경험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남성과 다른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편견 때문에, 여성이기에 요구되는 많은 사회적 의무들 때문에 희생되는 여성들. 이러한 차별과 편견에 맞서 오래전부터 여성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남성과 여성을 나누는 젠더적 편견과 배타성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성 혐오또는남성 혐오라는 말이 등장한 것을 보면 이러한 젠더적 편견과 갈등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있습니다. 

 

독립영화 [갈매기] 보실 기회가 있으시면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억척스러운 60 여성입니다. 딸의엄마이고 남자의아내이기도 억센 여인이 어느날 시장 동료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합니다. 그러나 수치심과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주인공에게 주어진 것은 가족의 따뜻한 이해도 주변 사람들의 위로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엄마이기에, 폐경기도 지난 나이 아줌마이기에 겪게 되는 다른 차별과 편견의 시선입니다. 어느 누구도 60 여인을 여성이라는 존재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시장 동료들로부터 비난받고 소외된 것은 성폭행범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인 주인공입니다. 60 여성으로부터시장 아줌마’, ‘엄마아내라는 고정된 정체성의 편견을 빼고 나면 과연 그녀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의 제목이 [갈매기] 것은 언제나 그러한 편견으로부터 떠나고 싶지만, 바닷가를 떠나지 못하고 계속 바닷가를 맴도는 갈매기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정체성의 편견에서 한치도 벗어날 없는 주인공의 처지를 보여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이방인장애인이란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해방되는 사람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가지 이야기 하나는구마사화이고, 다른 하나는치유이적사화입니다. 특이한 것은 예수께서 이방인 사역을 잘하시지 않으셨는데, 이야기는 모두 이방인 전도 사역을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구마사화 갈릴리 북부 띠로 지방의시로페니키아 여인 딸을 구한 이야기이고, 번째 이야기는 갈릴리 동쪽 요단강 건너편의 데카폴리스 지방에서 청각장애인을 고친치유기적사화입니다.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이방인들이고 더욱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데카폴리스 지방에서 예수께서 이방인들을 치료하고 전도했다는 구체적 언급은 오늘 본문 없지만, 예수님의 동선을 살펴보면 이방인 지역을 순회하신 것이 맞습니다. 그러므로 청각장애인을 데카폴리스 지방의 이방인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마르코가 이러한 이야기를 여기에 모아놓은 것은 이야기들을 통해 이방 전도에 대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편견을 깨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함으로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이후 교회의 체계가 아직 갖춰지지 않은 시기에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전도사역이 유대인들에게만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초기에는 구원이 유대인들에게 속한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 사도 베드로가 고넬료 집안을 전도한 이야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부정한 음식에 대한 환상을 통해 이방인 전도의 부르심이 베드로에게 임했습니다. 이야기에는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부정한 음식으로 취급하는 편견과 차별적 표현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음식을 꺼리듯이 이방인들을 그렇게 멀리했던 것입니다. 종교적 규율이 빚어낸 편견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심지어 개로 취급하는 편견과 배타적인 발언이 등장하고 있어 우리를 매우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은 결코 그러한 편견에 머물지 않고 오히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그러한 기존 편견에 대한 반전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이방인 여인의 입에서κύριος 주님이란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호칭이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모든 것들이 이방인 전도에 대한 원시 기독교 교회의 편견을 깨고 이방인 전도를 정당화하고 강조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음을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원시 기독교 교회의 이방인 전도에 대한 편견이 바뀌지 않았다면 우리 기독교는 유대교의 종파 또는 유대교의 아류로 남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대교 전통과 기독교 전통을 모두 수용하고 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를  보면 이러한 생각이 더욱 듭니다. 콥트 정교회의 분파인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아직도 할례를 행하고, 유대교 전통인 안식일을 여전히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마터면 세례와 더불어 할례까지 받을 뻔했습니다. 사도 바울로와 편견을 깨고 이방인 전도를 시작한 원시 기독교 교회들에게 감사합니다.

 

원시 기독교 교회에서 유대인 선교를 먼저 시작한 것은 그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선민사상 근거한편견과 배타성 원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남과 자신을 비교하여 다름을 통해 상대적 우월감 또는 자신감을 갖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타면 남을 부리고 싶은 심정이 생긴다고 하는 것처럼 높은 자리에 앉으며 위에 군림하고 싶고, 남을 짓밟으면 자신이 높아진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지요.  남과 구별된 , 남과 다른 나를 통해 우리가 서로의 정체성을 가름할 우리는 심각한차별과 편견이란 갈등 구조를 만들게 됩니다. 결과는 우리 안에서타자에 대한 배타성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야고보서 말씀을 보면 이러한 차별과 편견이 원시 기독교 교회에서도 많은 문제가 됐던 사실을 확인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야고 2:1)

 

 

이러한 차별 심리에 야고보는 경종을 울립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수탈하며 법정에 끌고 가는 사람들은 바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인데,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깔보고 가진 자를 높이는 이러한 기이한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모순입니다. 가난하고 누추하고 힘없어 보이는 사람은 만만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있는 앞에서 하염없이 작아지고, 힘없는 앞에서 냉혹할 정도로 잔인해지는 인간. 밀란 쿤데라의 표현대로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닐 없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그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야고 2:5)

 

 

하느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가진 조건에 따라 판단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압니다. 인간이 가난하든, 부자이든 주님께서는 마음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십니다. 오늘 야고보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유케 하셨고, 이방인들을 택하셔서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셨다고. 여자와 남자,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구분은 소유와 사회적 편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하느님 앞에서는 그러한 구분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이기에 앞서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고, 가난과 부유함에 앞서 우리 모두는 빈손으로 세상에 와서 빈손으로 세상을 떠날 존재들입니다. 짧은 인생 동안 우리의 소유과 사회적 신분이 어느 정도 편리와 유익함을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 모두 하느님 앞에 빈손으로 서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편견도 차별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갈라 3:28) 우리는 예수 안에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 여자는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하고 사정하였다. (마르 7:28)

 

여인이 자신을 향한 사회적 편견에 맞선 것은 오직 사랑에 의해 추동된 용기와 힘이었습니다. 부스러기라도 먹이고자 하는 엄마의 간절한 사랑. 그것은 비록 사랑의 부스러기이지만, 사랑의 힘은 자기 자식을 살리고, 모든 사회적 편견과 배타성을 무력하게 만들고, 그녀 또한 그러한 편견의 굴레에서 해방시킵니다. 주님께서는 당시 유대인의 보편적 편견에 입각하여 말씀을 던지신 것뿐인데, 그녀는 말을 하신 주님의 진심을 분명 정통으로 꿰뚫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말을 다른 유대인들에게 했다면 아마도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겁니다. 여인은 편견의 말을 발설한 분이 누구이신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고백은 딸아이가 치료를 받기도 전에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그녀는 예수께서 하느님이심을 처음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녀는주님κύριος’이라고 예수를 부른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이를선생이라 번역을 했지만, 원문은 정확히큐리오스주님입니다. 제자들도 고백하지 않았던 예수의 호칭을 이방인 여인이 처음으로 발설한 것입니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서 마르코 복음서를 읽었던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이러한 구절에서 일종의 쾌감과 자신감을 얻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받았던 편견과 차별에서 놓여나는 해방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삶의 자리가 배경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도 편견의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자유의지를 편견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남보다 잘나고, 남보다 인정받고, 남보다 많이 가지면 과연 행복할까요? 편견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배타성이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동안 우리는 우리 안에 심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편견이란 것이 무서운 것은 그러한 편견의 잣대를 가지고 성서조차도 왜곡해서 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16세기 남미를 침략했던 스페인의 병사는 자신이 총에 원주민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원주민을 한갓 동물로 보는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이 정당화된 것같이 스페인의 남미 침탈도 가나안 정복처럼 이렇게 성서 말씀에 의해 정당화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편견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여 성서의 진리조차도 가려버립니다.

 

이러한 편견에서 자유로울 있는 것은 편견에 대해 당당하게 맞서는 것입니다. 편견은 무서워 피할 것이 아니라 오늘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할 있었던 것처럼, 편견에 맞서 당당히 말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용기는 믿음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를 어떤 존재로 창조하시고,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자신의 외아들까지 보내신 것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엄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의 존엄을 빼앗는 모든 편견과 배타성 앞에서 두려워 마시고 당당히 맞서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존엄은 다른 누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용기를 내는 순간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힘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고백이고 또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연중23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하느님 나라의 소망으로 우리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잠언 22:1-2, 8-9, 22-23

1   명예는 많은 재산보다 소중하고

     존경받는 것은 금은보다 낫다.

2     상종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

     이들은 모두 야훼께서 지으셨다.

     …

8    악을 심으면 재난을 거두고

     홧김에 남을 때리면 몽치에 제가 맞는다.

9     보살펴 주는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

22  힘없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을 털지 말며

     법정에서 어려운 사람을 짓누르지 마라.

23  야훼께서 그들의 송사를 떠맡으시고

     어려운 사람 등치는 자를 목조르신다.

 

 

시편 125

1    주님께 의지하는 자는

     시온산과 같으니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든든하리라.

2    산들이 예루살렘을 에워 감싸 주듯이
     주께서 당신 백성을 감싸 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3    의인들이 악한 일에 손을 뻗지 않도록

     의인들이 차지한 위에서
     악인이 권세를 휘두르지 못하게 하시리라.

4    선한 사람, 정직한 사람에게
     주여, 은혜를 베푸소서.

5    그릇된 길로 빗나가는 자들은주여,

     악인들과 함께 그들을 물리치소서.
     이스라엘에 평화 있기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야고 2:1-10, [11-13], 14-17

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오. 2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3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거기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5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나라를 차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6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자들은 바로 부자가 아닙니까?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도 그들이 아닙니까? 7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8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따라 이웃을 몸같이 사랑하여라. 레위19:18 최고의 법을 지킨다면  하는 일이지만 9 차별을 두고 사람을 대우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여러분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으로 판정됩니다. 10 누구든지 계명을 지키다가도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11 “간음하지 마라. 출애 20:14, 신명 5:18하신 분이살인하지 마라. 출애 20:13, 신명 5:17하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사람은 결국 계명을 어긴 자가 되고 맙니다. 12 여러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법에 따라서 장차 심판받을 사람들이니 그런 사람답게 말하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십시오. 13 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

14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사람을 구원할 있겠습니까?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7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마르 7:24-37

24 예수께서 곳을 떠나 띠로 지방으로 가셨다. 거기서 어떤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계시려 했으나 결국 알려지고 말았다. 25 그래서 악령이 들린 어린 딸을 어떤 여자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앞에 엎드렸다. 26 여자는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이방인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27 그러나 예수께서는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그래도 여자는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 하고 사정하였다. 29 그제야 예수께서는옳은 말이다. 어서 돌아가 보아라. 마귀는 이미 딸에게서 떠나갔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는 자리에 누워 있었고 과연 마귀는 떠나가고 없었다.

31 예수께서는 띠로 지방을 떠나 시돈에 들르셨다가 데카폴리스 지방을 거쳐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 때에 사람들이 귀먹은 반벙어리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하였다. 33 예수께서는 사람을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귓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34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쉰 다음에파타.” 하고 말씀 하셨다. ‘열려라.’라는 뜻이었다. 35 그러자 그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 예수께서는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셨으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널리 소문을 퍼뜨렸다. 37 사람들은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도 말을 하게 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은 놀랍기만 하구나.” 하며 경탄하여 마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