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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출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 노정빈 선교사 ( Agnes Josephine Roberts M.B.E., 191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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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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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봉사 중인 노정빈 선교사, 1960년대.

 

 

랜드로바를 운전 중인 노정빈 선교사 (1960년대 강원도 탄광촌인 황지리까지 한 달에 한번씩 의약품과 구급품을 싣고 비포장도로를 눈이오나 비가오나 8시간을 직접 운전해다녔다.)

 

 

1960년대 강원도 탄광촌 황지리 순회의료봉사

 

노정빈 선교사가 몰았던 한국 최초(?)의 랜드로바 : 그녀는 구호품과 의약품을 싣고 전국방방곡곡을 누비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보셨다. 대한민국에 그녀가 밟지 않은 땅이 없었다.

 

월간화보 '세계' 1983.5월호에 실린 노정빈 선교사 사진

 

대전 사택 집무실에서의 노정빈 선교사

 

한국에서의 봉사와 헌신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여왕으로부터 '대영제국훈장'을 받다.(1982년) 노정빈 선교사는 1960년대 강원도 탄광촌 의료와 구제,구호 사역으로 '태백산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새가정 2019.11월호

 

새가정 2019.11월호 기사

 

 

노정빈 선교사 (魯貞彬, Agnes Josephine Roberts M.B.E., 1914~1998)의 삶과 사역 :

대한성공회 평신도 선교사(영국어머니연합회 파송)

 

“감출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

 

 

채야고보 신부 / 대한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노정빈 선교사는 영국인으로서 6.25전쟁의 상흔으로 고통 받던 우리나라와 한국성공회를 위해 1959년부터 25년간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 땅에 심은 사람이다. 영국성공회 어머니연합회(Mother's Union) 파송 선교사로 '빈민 구호와 구제', '국민 보건과 위생 교육', '성공회 어머니연합회 재건', '주일학교 교육', '입양 프로모션', '한국 근현대사 및 한국성공회 역사 자료 수집' 등 다양한 선교 사업을 펼쳤다. 특히 노 선교사가 베푼 '맞춤형 빈민 구제와 구호' 사업 및 어머니연합회를 통한 '가정의 복음화' 사업은 60,70년대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졌던 한국의 소외계층과 여성들에게 커다란 꿈과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현재 노정빈 선교사에 대한 자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아 이 글은 그녀를 기억하는 분들의 구술 자료와 한국에 남아있는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그녀의 삶과 사역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노 선교사는 191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Cape Town)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잉글랜드 콘월(Cornwall) 출신의 해군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5살 되는 해에 영국 디칭햄(Ditchingham, Norwich)에 있는 성공회 수녀원(Community of All Hallows)의 교회기숙학교(Church Boarding School)에 들어갔다. 그 후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그녀는 18세가 될 때까지 그곳에서 홀로 성장하게 된다.

 

1932년 18세가 되는 해에 기숙학교를 졸업하면서 호주로 홀로 여행을 떠나 "시드니 하버 브리치(Sydney Harbour Bridge)" 개통식(3월19일)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멜라네시아(Melanesia)에서 선교활동을 마치고 뉴질랜드 교구의 주교로 임명을 받아 가는 어느 선교사 부부를 만났다. 그들의 영향으로 함께 뉴질랜드로 건너가 한쪽 눈이 어두워 운전을 못하는 그 선교사를 대신해 운전도 하고, 그 교구 다양한 일들을 도왔다. 한국 산하의 거친 비포장도로를 누비며 "랜드로버" 차량을 직접 운전해서 구호와 구제 사업을 펼쳤던 노정빈 선교사의 운전 실력은 이때 터득된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랜드로버’를 한국에서 처음으로 운전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 후 중국선교사의 소명을 가지고 호주로 건너가 간호사 교육을 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공산화와 정세의 악화로 중국 선교의 꿈을 접고, 뉴질랜드로 돌아가 성공회 "뉴질랜드 처치 아미(The New Zealand Church Army)"라는 선교 단체에서 11년 동안 전도사로 지냈다. 그러나 1952년 그녀는 영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선교사의 소명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는 영국성공회 어머니연합회(M.U.)의 한국 파송 선교사로 임명된다. 1959년 9월 그녀는 부산항에 첫 발을 디뎠다. 한국에 도착한 노 선교사는 먼저 6.25전쟁으로 붕괴되었던 한국성공회 어머니연합회의 재건을 위해 영국 피터버러(Peterborough) 교구 어머니연합회에서 마련해준 랜드로버 차량을 손수 운전하여 전국의 모든 성공회 교회들에 "어머니연합회"를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정의 복음화"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과 여성들을 교육하는 사업을 펼쳤다. 그 결과 1970년 이전에 전국 성공회 교회에  "어머니연합회"가 재조직되었다. 또한 "주일학교 교사 강습회"를 열어 주일학교 교육을 강화했다. 

 

 

노정빈 선교사의 "구호와 구제" 사업은 어려운 사람들의 상황에 맞추는 “맞춤형복지”의 전형이었다. 그 범위가 워낙 광범위하고 다양해서 모두 언급하기는 어려워 한 가지 일화만 전한다 : 1960년대만 해도 서울의 길거리는 구걸하는 아이들로 가득했다. 노 선교사는 추운 겨울에 그들이 배고픔과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그 아이들을 ‘성공회 서울대성당’ 지하에 불러 모아 돌봐주었다. 아이들은 낮에는 구두닦이와 구걸을 하러 나갔다가 밤만 되면 서울대성당 지하로 모였다. 소수의 아이들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아이들이 300명까지 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들이 모두 사라지는 일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당시 교구장이었던 김요한(Most. Rev. John Daily) 주교는 그 아이들을 백방으로 찾아 나서게 되고 다양한 경로를 통해 그 아이들이 정부의 거리 정화 사업으로 모두 강원도 탄광촌으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김요한 주교와 노 선교사는 직접 강원도 황지리를 방문하게 된다. 비록 그곳에서 그 아이들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시위를 하다 잡혀온 많은 젊은 대학생들을 보게 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 최초의 산업선교인 “강원도 황지 탄광촌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성공회는 그곳에 학교와 ‘성 프란시스 진료소’, 교회 등을 짓고 가난과 열악한 환경에 시달리던 탄광촌 사람들을 돌봐주었다.

 

눈과 비가 오면 서울에서 강원도로 오가는 비포장길이 얼마나 질퍽했던지 남자들도 운전하기를 싫어하는 길을 노정빈 선교사는 매월 정기적으로 많은 의약품과 구호품을 싣고 서울과 강원도를 오갔다. 그녀는 의료진(간호사 고화영 Fannie Storr, 전도부인 위진수 Jean Wiblin)과 함께 강원도 각 탄광촌을 다니며 수 천 명의 환자들을 돌봐주었고, 큰 비용과 수술이 필요한 환자들을 직접 큰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해주는 일을 했다. 그래서 그녀는 강원도 탄광촌에서 "태백산의 천사", “파란 눈의 봉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강원도 탄광촌뿐만 아니라 그녀는 한강 다리 밑에 사는 수재민들과 남산 해방촌의 난민들, 그리고 가난한 농촌 등을 방문하여 사랑의 손길을 펼쳤다. 남한 땅에서 그녀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특히 불치병에 걸려 고통 받던 많은 아이들을 치료 해준 일은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녀는 1982년5월14일 영국 여왕이 수여하는 '대영제국훈장(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을 받았다. 1984년 70세의 나이로 은퇴하고 한국을 떠나 잉글랜드 중부에 있는 레스터(Leicester)에 정착하게 된다. 노 선교사는 그곳 ‘트리니티 요양병원(Trinity Hospital)’에 거처를 삼고 잠시도 쉬지 않으며 ‘레스터 국립병원(Leicester Royal Infirmary)’에서 병원사역팀(Hospital's Chaplaincy Team)과 함께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돌봤다. 가난한 살림에도 어린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도 했다. 

 

1998년 10월30일 금요일 저녁. 그녀는 그녀가 평생을 그리며 기다렸던 하느님의 품에서 안식을 얻는다. 평소 한국인의 품에 안겨 임종을 맞이하고자 했던 그녀의 소원대로, 그녀를 병문안했던 김정자 세실리아 여사와 그 자녀들이 그녀의 임종을 지켰다. 그리고 1998년11월6일 장례미사가 집전되었고, 유언대로 미사에서는 시편 130편이 낭송되었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시편130:6) 화장 후에 유해는 길로스 장례식장(Gilroes Cemetery)의 3번 구역에 있는 장미덩굴 위에 뿌려졌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 편지를 쓰고, 고통 받는 이웃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 성공회 교회들에 어머니연합회를 재건하고 교육시키는 사역을 하면서 좀처럼 쉬지 않았던 노정빈 선교사의 사역은 바로 그녀 안에서 솟아나는 “감출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Richard Rutt 리차드 러트 주교)이 그 동력이었다. 또한 그녀는 "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부족하더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체스터턴(Chesterton)의 말을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할 가치가 있는 일”에는 성직자 또는 평신도의 구분이나, 전문가 또는 비전문가의 차이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행함' 만이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전문성이 강조되는 21세기 선교에서 ‘행함’과 ‘실천’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할 가치가 있는 일”에 망설임 없이 열정과 사랑으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노정빈 선교사의 삶과 사역에서 찾을 수 있게 되길 희망한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야고2:26)

 

 

노정빈선교사(A.Josephine Roberts M.B.E / 1914-1998) 약력

19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출생

1932~1952 뉴질랜드 처치 아미선교단체에서 전도사 활동

1959년9월 영국성공회어머니연합회(M.U) 선교사로 한국파송

1959~1976년 M.U.선교사로 구제 및 구호사업 . 대한성공회 어머니연합회재건사업

1977~1978년  영국어머니연합회 대표회장

1978~1984년 USPG파송 선교사로 활동

1982년 대영제국훈장(M.B.E.)수상

 

 

노정빈선교사 관련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ZOyz1W_gijA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