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야고보의 창문

초월 transcendence과 내재 immanence, 성 sacred과 속 profane, 그 경계에 창문 하나 달기...

하나 됨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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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10. 2.

 

 

 

2021.10.3. 나해_창조질서 회복 기원 감사성찬례(연중 27주일)

욥기 1:1, 2:1-10 / 시편 26 / 히브 1:1-4, 2:5-12 / 마르 10:2-16

 

 

하나 됨의 의미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오늘은 열왕기하에 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9장과 10장은 오므리 왕조의 최후를 이끈 예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후 대한 평가가예언서열왕기서 각각 다른 관점을 갖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 성서 해석에 대한 가지 관점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는 3대를 번창하며 북이스라엘의 번영을 이끈 왕조입니다. 우리는 왕조의 대표적인 인물로 악명 높은 오므리의 아들인아합왕 기억합니다. 신명기 사가(D) 열왕기상 16 16절에 오므리 왕조가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함의 그대로 걸었습니다(1 열왕 12:20-33). 북이스라엘을 물질적 풍요와 군사적 강국으로 이끌었던오므리 왕조 치적은 신명기 사가(D)들에게 철저히 외면됩니다. 구약의 신명기 사가들의 관점은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의 율법을 준수하고 행할 축복을 받고, 그렇지 않을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오므리 왕조 백성들을 비록 경제적 풍요로 이끌었어도 야훼 앞에 온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사가들의 관점은예언자와 왕에 대한 변증 기초합니다. 그리고 다윗 왕조를 합법화하는 것이 기록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신명기 사가들은 이러한 오므리 왕조를 박살 예후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했을까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예후는 아합 가문의 모든 자들을 처단하는 야훼의 뜻을 실현한 자로 묘사됩니다.

 

야훼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마음에 들도록 일을 잘하였다. 나의 뜻대로 아합 가문을 잘 처치하였다. 그러므로 네 후손이 사 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왕위에 오르리라.” 그러나 예후는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법을 준수하는 데 성의를 다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린 여로보암의 죄를 버리지 못하였다. (2 열왕 10:30-31)

 

그러나 예후에 대한 예언자 호세아의 평은 180 다릅니다. 후기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호세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야훼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셨다. “아기의 이름을 이즈르엘이라고 하여라. 나는 오래지 않아 예후가 이즈르엘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죄값을 예후 왕조에 갚아 이스라엘 나라를 멸망시키겠다. 그 날이 오면, 이즈르엘 평지에서 이스라엘의 왕을 꺾어 버리겠다.” (호세 1: 4-5)

 

사람, ‘예후 대한 평가가 기록자의 관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름을 빌어 예후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호세아의 관점에서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미 이즈르엘에서 행한 예후의 잔혹함 속에서 징조가 있다고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열왕기하의 기록을 보아도 예후의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었습니다. 아합의 아들인 요람을 위시해서 유다왕 아하지야, 아합의 부인 이사벨, 아합 가문의 70명의 왕자들과 남은 자들, 남유다의 왕자 42, 바알 숭배자들열왕기하 10장과 11장에 묘사된 예후의 잔혹성은 차마 입에 담을 없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야훼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종교전쟁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잔혹성을 호세아 선지자는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호세아가 말하는 야훼와 열왕기서가 말하는 야훼가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호세아의 하느님은심판의 하느님이시면서 회개한 사람을 품으시는 자비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호세아는 도덕적인 개인의 타락보다 예후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적, 정치적 시스템의 악을 비판한 것입니다. 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의 사관과 삶의 자리에 따라 말씀은 똑같은 사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함을 우리는 예후에 대한 평가 속에서 발견합니다. 이렇게 역사가의 관점과 예언자의 관점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서 말씀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찾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이혼이 흔한 사회적 현상이 현대 사회에서 이혼의 문제에 대해 설교를 하는 것은 곤혹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성서에 기록된 이혼에 대한 구절들은 당시의삶의 자리 반영하고 있어서 오늘날의 상황과 너무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해석할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로의 첫째 편지 14장의 말씀은 가부장적으로 곡해하기 쉬운 중에 하나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아마도 오늘날 교회에 남아 있을 여성들은 명도 없을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의 중추적 기둥은 여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시의삶의 자리 현대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성서가 쓰였던 문화적 배경은 가부장적이고,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이 성립되지 않았으며, 종교와 정치와 문화가 하나로 통합된 사회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경우 많은 이들에게 다른 고통과 죄책감을 심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큽니다. 성공회는 이혼에 처한 사람들의 관계의 지속성이 계속해서 파괴적이고 강박적인 방향으로 지속될 위험에 대해 관심을 가집니다. 결과 화해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질 , 당사자들이 절망과 죄책감을 덜어내고 새로운 가능성을 갖고 출발할 있도록 사목적인 배려를 합니다. 그것이하느님 앞에서 개인으로서 사람을 온전히 다시 하느님 앞에 세우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을 해석하는 우리는 가지 접근을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 율법적,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를 호세아 예언자처럼예언자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혼과 관련된 성문화된 율법이나 규율은 문자와 전통에 묶이지만, 예언자적 관점은 시대와 함께 호흡하면서도, 시대를 관통하며 역동적으로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 예언자적 관점은 시대의삶의 자리 현재로 침투하는 미래를 연결해줍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기존의 질서와 전통이라는 현재 속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미래를 선포하는 사명을 해왔던 것입니다. 저는예언자적 관점에서 오늘의 복음서 말씀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발설하신 모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예언자적 전통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율법사가 아니셨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예수께서 실제로 발설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지 상황들과 가지 말들은 첨언되었습니다. 마르코복음 10 2-8절까지가 원래 전승자료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나머지는 마르코의 편집이 가미됐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굳이 율법을 들먹이시면서 그들에게 이혼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당시에 바리사이파의 전통에 의하면 여자는 소박맞을 짓을 하면 쫓겨나는 것이 당연시되던 때였습니다. 심지어 밥을 태웠다는 이유로 아내는 소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라삐 힐렐). 요즘의 관점으로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그건 가부장적인 질서에서 남성 중심으로 형성된 폭력적 문화이지 거기에는 여성에 대한 배려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여성은 마치 도구화된 느낌입니다. 쓰다가 싫증 나면 버릴 있는 물건으로. 그런데 이상합니다. 당시의 전통대로 여성을 소박하는 것은 율법과조상들의 전통 허락한 당연한 상식적인 것인데, 그것을 예수님께 질문을 하다니요. 의도가 불순함을 느낍니다. 그들은 당연한 상식적인 일로 예수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정공법을 쓰셔서 모세 율법으로 공격한 것을 그대로 맞받아쳐서 모세 율법에 대한 재해석으로 응수하십니다. 철옹성 같던 모세의 권위가 한순간에 예수님을 통해 무너집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의도와 사악함을 정확하게 꿰뚫으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이 법을 제정해 준 것이다.”(마르 10:5) 

 

말씀을 하신 주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신명기 24 1절의아내 소박 규정 모세가 인간의 사악함과 나약함을 알기에 직접 덧붙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과 모세의 생각을 구분할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문제를 정확하게 성문화된 율법의 범주로 다루시기보다 본질적인 하느님의 의도에까지 소급시키십니다.

 

그런데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칠십인역 창세 1:27).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칠십인역 창세 2:24). 

 

주님께서는 문제를 하느님의 창조 질서로 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의도 말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창세기 구절은 정확하게 인간이하느님 앞에 개인으로서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부모를 떠나 독립하고, ‘하느님 앞에 개인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서로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하느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여기에하나 전제는사랑과 배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정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사랑과 배려 아름다운 창조 질서에 어울리는하나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바리사이파를 공격하신 이유에 대한 번째 의도를 살펴봅니다. 그것은 부당하게 소박맞는 당시 여성들에 대한 배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이해할 있도록 창세기의 말씀을 예로 들어 그들의 완악함에 경종을 울린 것입니다. 여성을 쉽게 버릴 있던 당시의 가부장적 문화에 경종을 울린 것이지요. 소박에 대한 율법은 철저히 남자들만을 위한 법이었습니다. 당시에 소박맞은 여인은 모든 사회적, 가정적 보호에서 제외되는 가장 취약하고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회적으로 가장 연약한 취약층은 바로과부와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보이셨습니다. 특히 소박맞은 여인은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소박 받았다는 상처와 사회적으로 부여된주홍글씨 정상적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여성에게는 먼저 이혼할 권리도 없었고, 율법에 의해 소박맞는 것에 대한 보호 장치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부장적인 완악함에 경종을 울리셨습니다. 거기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 대한 주님의 배려와 관심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마태오복음 5 17절은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이시다 선포합니다. 그런 분이 창세기를 들먹이시며 다른 율법의 규율을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자나 여자나하느님 앞에서 개인으로서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임을 밝히고, 이를 예언자적으로 말씀하시어 쉽게 여성을 버리는 나쁜 제도에 경종을 울린 것입니다. 성문화된 율법을 제정하신 것이 절대 아니지요.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기부정이란 모순에 스스로 빠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르코가 덧붙인 10-12절에 언급된 결혼한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재혼하는 것을간음이라 표현한 것은 정확히 마르코 공동체의삶의 자리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마르코 공동체 내에 결혼한 신자들이 다른 사람과 재혼하기 위해 이혼하는 문제가 발생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신자 간의 이혼과 재혼은 공동체에 커다란 위기로 작용했던 같습니다. 그래서 마르코는간음이란 말을 예수의 어록에 첨언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르코는 자신이 처한 공동체의 위기를 어떻게 해서든 극복해야만 했을 겁니다. 복음서에 그려진 예수님의 모든 발언들을 통해 유추컨대, 주님께서는 이혼 문제에 이러한 과격한 단어를 결코 사용하시지 않으셨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역사적, 문자적 관점으로 읽느냐, 아니면예언자적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우리는 다양한 해석을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핵심에 담긴 사랑의 본질인하나 어떠한 관점에서 봐도 진리로 남습니다. 상대를 자기에게로 흡수해버리는 폭력적인하나 아닌 각자가 존재와 존재로 우뚝 서는하나 입니다. 너와 나가 그대로 보존되면서 하나가 되는 . 그것이상호 존중’, ‘상호 신뢰’, ‘상호 섬김 정신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관계성의 출발입니다. 하나이면서도 셋인 삼위일체. 부부간의 사랑은 각각의 존재가 둘이면서 하나인 인격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고, 상처 주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연약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개인으로 서로가 서로를 세워주지 못하는 상황, 거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상황이 더해진다면, 고귀한 가정의 가치는 이상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창조 의도로부터 참으로 멀리 것입니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로의 첫째 편지 13사랑의 사랑이 지닌 고결함과 순결함 그리고 위대함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사랑을 원하지만, 실제로 실현되기는 정말 쉽지가 않은 같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과정이 우리 가정 속에서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이상 상처 주고, 상처 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냉철하게 관계를 하느님 앞에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맹세의 당사자와 하느님 간에 풀어야 문제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위기에 놓인 사람들의 결정을 판단할 권리가 없으며 오직 조용히 기도할 뿐입니다. 이것이하느님 앞에서 개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입니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르지만, 책임의 무게에 속박될 필요는 없습니다. 속박은 강박을 낳고, 강박은 분열을 낳으며, 분열은 파멸을 낳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의 질서를 더욱 어긋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 본질은 무엇입니까?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관계에 대한 유비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듯이 서로가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부부관계는 모두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관계의 유비입니다.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러한하나 혼인잔치 표현하신 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하는 현명한 처녀의 비유가 바로 이러한 영적인 신비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속박이나 강박의 노예가 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속박하는 율법이 아니라 은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파라클레토스, 보호자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자유인이지 율법의 강박에 시달리는 노예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박되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자유한 자라면 사랑 이외에 다른 어떤 속박에도 놓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혼이라는 이별은 아픈 경험입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 밑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마지막 생이별의 아픔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출애 20:12) 율법에 명시된 아들 도리를 지키지 못한 주님의 아픔이 어떠했을지 느껴집니다. 그러나 문자로 쓰인 율법은 결코 사랑을 앞서지 못합니다. 아마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그러한 이별의 아픔을 겪지 않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상황 때문에 이혼이 결정될 때는 율법적인 문자적 규정에 얽매여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속박을 해체시킨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여인의 소박 문제에 이어 어린이에 대한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이미 언급했던 대로 이들 모두가 당시에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러한 약자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앞에 개인으로 주체적이고, 자유로우며, 그리고 감사가 넘치는 여러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속박하고 구속하는 모든 것은 이미 주님의 십자가에서 결박이 해체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신랑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분의 신부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고하나 이라는 창조 질서의 근본이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연중27주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하느님, 예수께서는 예수께서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없다고 가르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순결한 믿음으로 주님을 섬겨, 마침내 주님께서 약속하신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욥기 1:1, 2:1-10

1:1 우스라는 곳에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욥이었다. 그는 완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2:1 또다시 하늘의 영들이 야훼 앞에 모이는 날이 왔다. 사탄이 그들 가운데 끼여 있는 것을 보시고 2 야훼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 갔다 오느냐?” 사탄이 대답하였다. “ 위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3 야훼께서 사탄에게, “너는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위에 다시 없다. 그는 여전하지 않느냐? 네가 나를 충동하여 그를 없애려고 했지만 헛일이었다.” 4 그러자 사탄이 대답하여 아뢰었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꿉니다. 사람이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법입니다. 5 이제 손을 들어 그의 뼈와 살을 쳐보십시오. 제가 보장합니다. 그는 반드시 당신께 면전에서 욕을 것입니다.” 6 야훼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를 손에 부친다. 그러나 그의 목숨만은 건드리지 마라.” 7 사탄은 야훼 앞에서 물러나오는 길로 욥을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심한 부스럼이 나게 하였다. 8 욥은 잿더미에 앉아서 토기 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9 그의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아직도 요지부동이군요? 하느님을 욕하고 죽으시오.” 10 그러나 욥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당신조차 미련한 여인처럼 말하다니!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있단 말이오?” 이렇게 욥은 모든 일을 당하여도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

 

 

시편 26

1    주여,
    나의 무죄함을 밝혀주소서.
    깨끗하게 살며 주님만을 철석같이 믿습니다.
2    주여,
    나를 샅샅이 캐어 보시고 알아보소서.
    속속들이 마음 뒤집어 보소서.
3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쳐다보면서
    당신의 진리 따라 살았습니다.
4    사기꾼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음흉한 자들과 벗하지 않았습니다.
5    악인들의 모임에는 끼지도 않았고
    나쁜 자들과 함께 앉지도 않았습니다.
6    주여,
    손을 씻어 나의 무죄함을 드러내고
    당신의 제단을 두루 돌며 노래합니다.
7    나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 모두 전하며
    고마우심을 노래로 찬미하리이다.
8    주여,
    나는 당신께서 거하시는 집이 좋습니다.
    당신의 영광이 깃든 그곳이 좋습니다.
9     목숨 죄인들과 함께 거두지 마소서.
     살인자들과 함께 생명 거두지 마소서.
10  그들은 뇌물만 집어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자들입니다.
11   몸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으니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주소서.
12  든든한 자리에 세워 주셨으니 감사드리며
     예배하는 모임에서 당신을 찬양합니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히브 1:1-4, 2:5-12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시켜 여러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아들에게 만물을 물려주시기로 하셨습니다. 3 아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찬란한 빛이시요, 하느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고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4 그리고 천사의 칭호보다 높은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으심으로써 천사들보다 높은 분이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장차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시지는 않습니다. 6 성서에 어떤 이가 이렇게 증언한 대목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그를 잊지 않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까?
7    주님은 그를 잠시 천사들보다 못하게 하셨으나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씌우셨으며
8    만물을 그의 아래 복종시키셨습니다.” 시편 8:4-6


이렇게 만물을 그에게 복종시키셨다는 것은 그의 지배 아래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아직도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9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셨다가 마침내 영광과 영예의 관을 받아 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입니다.
10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었습니다. 11 사람을 거룩하게 해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하겠습니다.” 시편 22:22

 

 

마르 10:2-16

… 2 때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3 예수께서는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4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은 허락했습니다(신명 24:1).”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5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법을 제정해 것이다. 6 그런데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칠십인역 창세 1:27). 7 그러므로 사람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8 둘이 몸이 되는 것이다(칠십인역 창세 2:24).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몸이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된다.” 10 집에 돌아와서 제자들이 말씀에 대하여 물으니 11 예수께서는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12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 데리고 와서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자 제자들이 그들을 나무랐다.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화를 내시며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의 나라 이런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5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6 그리고 어린이들을 안으시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