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야고보의 창문

초월 transcendence과 내재 immanence, 성 sacred과 속 profane, 그 경계에 창문 하나 달기...

‘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론’ - 제자도 위에서 그리스도를 묵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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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10. 16.

 

2021.10.17. 나해_연중 29주일

안디오키아의 익나시오(주교, 순교자, 107년경)

욥기 38:1-7, (34-41) / 시편 104:1-9, 24, 35 / 히브 5:1-10 / 마르 10: 35-45

 

 

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론

제자도 위에서 그리스도를 묵상하다.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양자역학-

 

원자의 발견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모두가 알다시피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전자는 마치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공전하듯이 원자핵의 주변을 돌고 있습니다. 만약 양자역학이 없었다면 인류는 에디슨이 발견한 직렬 전기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양자역학이 있었기에 오늘날과 같은전자, 디지털 시대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인류는 광대한 우주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주만큼 광대한 미시세계에 대해서도 탐험을 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를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자세계에 대한 설명을 아무리 들어도 우리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그러한 세계가 있겠거니 하며 우리는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원자로 이루어졌든 우리의 일상과는 무관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우리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 여전히 고민을 합니다. 과학자의 관점에서 우리는 원자로 왔고, 원자로 살며, 원자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미시세계에서의입니다. 거시세계를 설명하는 뉴튼의 물리학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에까지 우리의 관심은 다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신앙에 있어서든 이러한 과학적 진실에 대해서든 무심하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에 과학자들이 관측을 통해 양자역학의 세계를 우리에게 알렸을 과학자들 조차 불확실성과 확률성이 지배하는 미시세계에 대해 우리처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모든 이론이 적용이 되지 않는 전혀 다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 원자라지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원자로부터 만드셨는지 질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원자가 흡수 또는 방출하는 통해서라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시광선에 의해 굴절과 반사되는 빛에 따라 세상을 볼뿐입니다. 만약 모든 빛을 흡수하는 블랙홀과 같은절대 어둠 있다면, 속에서 우리는 아무런 존재도 없고, 인식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히브 5:7)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말씀에서 우리의 믿음과 고백을 걷어내면 무엇이 남을까요? 예수께서는 우리와 같이 하느님께 눈물과 기도로 간구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까? 아니면 우리와 같은 완전한 인간이십니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신반인의 데미갓(demigod)처럼 특별한 존재이셨을까요? 그러면 그는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와 전능한 능력으로 고난을 이겨내지 않으셨을까요? 감히 인간이 범접할 없는 초능력의 소유자는 아니셨을까요? 어떻게 신이 인간이 있단 말인가? 초월이 현실 속에 내재할 있다니서로 양립할 없는 실재가 사람 예수에게서 동시에 실재할 있다니…?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간단하지 않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단지 우리가 우리 일상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서 고민을 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예수 시대 이후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이슈였습니다. 특히 안디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 동방기독교에서 이러한 논란이 많았습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셨음을 강조합니다. 앞에 했던 질문들을 생각하다 보면, 성육신의 그리스도론에서는 마치 양자역학의 모호함과 불확실성 같은 모종의 동질감이 느껴집니다(물론, 물리학자들은 이게 뜬금없는 소릴까? 하겠지만...) 종교와 과학을 비교한다는 것이 무리는 있지만, ‘인간의 이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호함에서 오는 당혹스러움은 매우 유사합니다.  양자역학에서 관측한 결과에 대해 원인을 우리가 이해할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 거시세계의 물리법칙이 미시세계의 양자역학에서는 전혀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양자역학은 여러 실험과 수학적 수식을 통해 이해에 대한 시도라도 있지만, 신학과 신앙의 세계는 실제로 실험이나 관측이 불가능하고, 논리적이라 해도 그것을 이해시킬 없음은 자명합니다. 그래서 양자물리학처럼 신학 안에서도 모호함과 불확실성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신학이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사고로 방법론적인 구조는 갖출 있어도, 초월적이며 관념적인 데까지 모든 내용을 인간에게 이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자명하게 설명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비유와 알레고리를 사용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세상을 설명하는 길은 우회해서 설명하는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언어는 우리의 세계 경험과 이해를 결코 벗어날 없기 때문입니다(가다머). 

 

교리와 신조에 따라 우리는 고백을 하지만, 그것은 결국 믿음의 영역을 벗어날 없는 것입니다. 20세기 , ‘빛이 입자이고 동시에 파동이라는 양립할 없는 빛의 성질 앞에서 과학자들이 당황했던 것처럼, 사람 예수가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시라는 주장은 초기 기독교에서도 많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이에 반발하여에비온파’, ‘가현설주의자’, ‘아리우스주의자’, ‘네스토리우스파등이 등장하여 인성과 신성의 분리를 주장했지만, 결국 모두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논란이 종식된 것은 451 오늘날 터키의 도시인 칼케돈에서 열린 4 에큐메니칼 공의회에서 예수의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이 교리로 확정되면서부터입니다. 물론 이러한 대부분의 논란은 동방 교회를 중심으로 생겼으며, 서방 교회는 대체적으로 침묵을 했습니다. 다음은 칼케돈 신조의 일부분입니다. 이해가 되시는지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교부들을 따라 우리는 모두가 한 분이신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서 완전하시고 사람으로서도 완전하시며, 참 하느님이시며 이성적인 영혼과 몸을 가진 참 사람이시다. 그분은 신성으로 말하면, 아버지와 동질이시고 인성으로 말하면, 우리와 동질이신데,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시나 죄는 없으시다. 그분은 신성으로 말하면, 시간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셨으며, 인성으로 말하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동정녀이시며 하느님을 낳으신 이,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칼케돈 신조 중에서)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러한 성육신 신학에서 한걸음 들어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있습니다. 선재한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취하신 것일까요(알렉산드리아 학파) 아니며 로고스 안에 인성과 신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일까요?(안디옥 학파) 영적인 신비를 문자로 풀어놓는다고 그것을 이해될 있는 것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로고스 자체가 되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로고스의 신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이상의 인식의 부재를 확인시킬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성육신의 신비에 대해 우리의 무지를 인정해야 같습니다. 말로 또는 논리적으로 아무리 설명을 해도 확실성의 부재는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신비라 부릅니다.

 

요한복음은 선재한 로고스를 선포하고, 마태오와 루가는 인간으로 오신 로고스를 선포하는 반해, 마르코는 선재한 로고스도, 인간으로 오신 로고스에 대해서도 침묵합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다음과 같은 마르코의 기록은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르 10:45)

 

마르코는 일관되게, 예수의 오심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오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왔다고 선포합니다. 마르코는 예수의 탄생이나 기원에 대한 관심보다 오로지 예수가 인류를 위해 가야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모두 십자가로 집중됩니다. 인성과 신성에 대한 성육신의 고민은 마르코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같습니다. 그는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로마 정치범을 사형시키는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셨는지에 오롯이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박아 죽게 했지만 그분은마침내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코가 말하는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론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죗값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이해를 위한 실증적 논증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르코는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덤덤하게 자신 앞에 놓인 자료들을 모으고 편집해 갔습니다. 마르코는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는지를 말하기보다,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시는 메시지의 의미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인 것으로 마르코를 통해 판명이 납니다.

 

오늘 이야기 바로 앞부분인 마르코복음 10 32-34절에는 번째 예수 수난 예고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두 기억하시겠지만,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는 베드로가 그럴 없다며 예수를 꾸짖었습니다. 번째 수난 예고에서는 제자들끼리 누가 높으냐를 가지고 서로 다퉜습니다. 그리고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 나오는 오늘 이야기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예수께 요청하며 자신들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이런 이야기가 예수님의 마지막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 나온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제자들의 일관된 예수의 수난에 대한 무지함, 십자가 사건에 대한 무지함. 마르코는 제자들을 계속해서 그러한 무지함의 상태로 묘사합니다. 마치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을 묘사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것을 성서해석학에서는제자들의 몰이해 부른다고 일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제자들의 몰이해라는 수사적 기법은 십자가 사건이 발생한 후에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제자들의 깨달음을 오히려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무지함이 크면 수로 깨달음의 크기 또한 더욱 커지는 법입니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면 의심만큼 확신으로 가득 채워지게 마련입니다. 마르코의 복음에서 십자가에 대한 제자들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십자가 사건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제자들의몰이해이해 경계가 됩니다. 아무도 십자가 사건이 있기 전에는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나니 주님의 십자가는 정말 쓸쓸한 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자들의 몰이해와 많은 사람들의 저주와 비난 속에 주님께서 홀로 걸었으셨던 . 십자가 위에서는 철저히하느님의 침묵까지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몰이해하느님의 침묵’.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감당하신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그분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경험하신 분이셨습니다.

 

대사제는 자기도 연약한 인간이므로 무지하거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동정할 수 있습니다. (히브 5:2)

 

주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아픔, 배반과 환멸, 외로움과 고독, 굶주림과 욕망 같은 인간 실존의 아픔과 고통을 모두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주님은 인간으로서 그러한 고난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섬기는 방식이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땅에 계실 우리와 같이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께 올렸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변명할 없게 됐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너무 바빠서, 기도하면 뭐가 달라지나? 먹고살기도 힘든데…. 기도하지 않는 우리로서는 이상 주님 앞에서 변명이 통하게 됐습니다. 그러한자기 합리화 결국 우리 스스로가 주님을 다시 십자가로 내모는몰이해임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기도합니다. 이것이 제자도의 정신입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은 반드시 이점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역사는 없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면서도 기도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진한 아픔이 느껴집니다. 세상에 누가 죽을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보통 우리는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것도 의인들도 아닌 죽어 마땅한 우리같은 죄인들을 위해 죽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나서 구원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피눈물의 값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 자신을 위해, 그리고 세상을 위해. 그것이 제자도를 따르는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기도하면 무엇을 해야하는지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우리는 성육신 그리스도론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열심을 내는 신학자들이 아니라, 그분의 삶을 살기 위해 열심을 다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러한 제자도 위에서 우리의몰이해 넘어 다가오는 깊은 통찰과 깨달음을 얻게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십자가 이전에 제자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의도를 모르고 자신들 만의내러티브 narrative’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이야기만 하기 바빴던 거죠. 그러나 그들 모두 십자가 사건 이후 이상 그러한 이야기 속에 갇혀 있을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십자가 이후에 제자들의 내러티브는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속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소한 제자들은 번은 주님을 버렸어도, 번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무지했던 제자들의 깨달음은 부활 사건 이후 그들의 이야기가 주님과 함께하는 내러티브로 바뀌면서 시작됩니다. 이야기는사도행전서신서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아직도 우리의 이야기를 포함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내러티브는 현재에도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야기를 이어갈 차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제자도를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제자도의 내러티브는 사람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남을 섬기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이와 같이 세상에서 출세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세상에서 배불리 먹고 호강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것은잠정적일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순간 사라지거나 완성될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을 환히 깨닫게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자아의 근원 찾는 수련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철저히 타인을 섬기는 종이 되는 종교입니다. 남보다 잘나고 싶으면 먼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깨닫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섬길 상호 섬김의 제자도가 실현될 있다는 것을. 기다리거나 주저함 없이 남보다 먼저 섬기기. 여기에서먼저 중요합니다. ‘먼저종이 되십시오. ‘세상을 섬기는 그리스도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값을 십자가 위에서 이미 치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값을 치를 차례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연중29주일 (나해) 전례독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바쳐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웃을 섬기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욥기 38:1-7, [34-41]

1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2    
부질없는 말로
.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3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    
이제 물을 터이니
.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    
그렇게 세상물정을 알거든
.    
말해 보아라.
5    
누가 땅을 설계했느냐?
.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6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7    
새벽별들이 떨쳐 나와 노래를 부르고
.    
모든 하늘의 천사들이 나와서 합창을 불렀는데,
.     …
34 [
너는 구름에 호령하여
.    
물을 동이로 쏟아 땅을 뒤덮게 있느냐?
35  
네가나가라.” 명령하면
.   “
알았습니다.” 하며 번갯불이 번쩍 퉁겨 나가느냐?
36  
누가 따오기에게 지혜를 주었느냐?
.    
누가 닭에게 슬기를 주었느냐?
37a
누가 구름을 만한 천재이냐?
38  
먼지가 덩이와 덩이로 굳어졌다가
.    
하나로 뭉쳐지게 되도록
37b
하늘에서 독을 기울여 물을 쏟을 있는 사람이 누구냐?
39a
네가 사자에게 먹이를 잡아줄 있느냐?
40  
속에 웅크리고
.    
떨기 속에 숨어 노리고 있는
39b
허기진 새끼 사자들의 배를 채워줄 있느냐?
41  
새끼들이 먹이가 없어 허둥대며
.    
하느님께 아우성칠 때에
.    
누가 까마귀에게 먹이를 장만해 주느냐?]
38, 따오기는 나일강의 범람을 일렸다는 고대 이집트의 새를 의미

 

 

시편 104:1-9, 24, 35

1     영혼아,
.     주님을 찬미하여라.
.     , 나의 하느님은 실로 웅장하십니다.
2    영화도 찬란히 화사하게 입으시고
.     하늘을 차일처럼 펼치시고
.     두루마기처럼 빛을 휘감았습니다.
3     위에 궁궐을 높이 지으시고,
.     구름으로 병거를 삼으시고
.     바람 날개를 타고 다니시며,
4    바람을 시켜 명령을 전하시고
.     번갯불에게 심부름을 시키시며,
5    땅을 주춧돌 위에 든든히 세우시어
.     영원히 흔들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6    깊은 물로 땅을 입히셨더니
.     산꼭대기까지 물결이 넘쳤습니다.
7    그러나 한번 꾸짖으시니 넘치던 물이 물러나고
.     천둥소리도 당신 목소리에 줄행랑을 칩니다.
8    물들은 산을 넘고 골짜기로 내려가
.     당신께서 정하신 자리로 흘러갔습니다.
9    당신께서는 금을 그어 넘지 못하게 하시고
.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24  주여손수 만드신 것이 참으로 많으나,
.     어느 하나 오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     땅은 온통 당신 것으로 풍요합니다.
25   크고 넓은 바다,
.     거기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가 수없이 우글거리고,
26  배들이 이리 오고 저리 가고
.     손수 빚으신 레비아단은 당신의 장난감입니다.
27  때를 따라 주시는 먹이를 기다리며
.     모든 것들은 당신을 쳐다보다가
28  먹이를 주시면 그것을 받아먹으니,
.     손만 벌리시면 그들은 배부릅니다.
29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     어쩔 줄을 모르고
.     숨을 거두어들이시면,
.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30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     누리의 모습은 새로 워집니다.
31  주님의 영광은 영원하소서.
.     손수 만드신 , 주님의 기쁨이 되소서.
32  굽어만 보셔도 땅은 떨고
.     다치기만 하셔도 산들은 연기를 뽑는구나.
33  나는 한평생 주님을 노래하리라.
.     숨을 거둘 때까지 악기를 잡고,
.     나의 하느님을 노래하리라.
34  나의 노래가 주님께 기쁨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그러면 나는 주님 품안에서 즐겁기만 하련만.
35  악인들아,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려라.
.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히브 5:1-10

1 대사제는 누구나 사람들 가운데서 뽑혀서 사람들을 대표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사제는 속죄를 위해서 예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2 대사제는 자기도 연약한 인간이므로 무지하거나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동정할 있습니다. 3 그는 이렇게 연약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물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4 영예로운 직무는 자기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론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얻는 것입니다.
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자리는,
.   너는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시편2:7
하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6 성서의 다른 곳을 보면,
.   너는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영원한 사제이다. 시편 110:4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7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있는 분에게 큰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 되셨으며 10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

 

 

마르 10:35-45

35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선생님, 소원이 있습니다. 들어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37 그들은선생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저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38 그래서 예수께서는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잔을 마실 있으며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셨다. 39 그들이,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것이다. 40 그러나 오른편이나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41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화를 냈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놓고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43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45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것이다.”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