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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의 헌신과 종교 권력의 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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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god /신학이야기

2021. 11. 6.

 

2021.11. 7. 나해_ 연중 32 주일

룻기 3:1-5, 4:13-17 / 시편 127 / 히브 9:24-28 / 마르 12:38-44

 

 

과부의 헌신과 종교 권력의 부조리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Artist

 

 

예리고의 바르티매오가 선포한 것처럼, 이제 예수께서는다윗의 자손메시아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입성하시자마자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셨습니다. 이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살아있는 권력들과 하나씩 다섯 번의 논쟁을 벌이십니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1) ‘권한에 대한 논쟁’(마르 11:27-33) 하셨으며, 이어서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원들과 2) ‘세금에 대한 논쟁’(마르 12:13-17) 벌이셨습니다. 성전 권력을 장악했던 사두가이파와는 3) ‘부활에 대한 논쟁’(마르 12:18-27) 하셨고, 율법사와 4) ‘첫째가는 계명 대해 논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율법학자들과 5)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마르 12:35-37) 하셨습니다. 그런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 메시지를 오늘 우리가 읽은 마르코 복음 12 38-40절에 남기십니다. 제가 이렇게 예루살렘 입성 후에 예수님의 행적을 설명드린 이유는 오늘 읽은 복음서 말씀이 어떤 맥락과 위치에 놓여 있는지 확인해 보기 위함입니다. 모든 논쟁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배경으로 진행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서의과부의 헌금 이야기 이러한 논쟁 사화의 흐름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복음서 다음에는 유명한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마르 13:1-2) 말씀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종말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이는 다분히 마르코의 편집 의도가 반영된 구조라고 있습니다. 마르코의 편집 의도에는 주님의 예수살렘 행적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으며, 이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오늘 말씀의 진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있습니다. 

 

먼저 마르코는 예루살렘 성전의 타락상을성전 정화 사건 종교 권력의 부조리를 통해 드러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 가시적이고 화려한 그러나 썩어빠진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종말에 대한 예언은 정당한 것으로 판명이 납니다.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실제로 일어난 것이 서기 70 경이고, 마르코 복음서가 기록된 것은 이후로 추정되기 때문에 마르코는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예수님의성전 파괴 예언 전승 연결시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기록 시기에 대해서는 신약 학계에서도 의견이 둘로 나뉩니다. 70 이전이면성전 파괴 예언예언 되고, 70 이후이면사후 예언 됩니다.) 마르코의 관점에서 예수님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타락의 온상이었고, 이는 개혁되어야 대상이 됐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르코가 기록한 예수와 종교 권력자들의 논쟁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마르코의 관점에 따라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은 정확히종교 권력자들과의 논쟁 사화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가운데 놓여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오늘 말씀이 단순히헌금 그리스도인의 전적인 헌신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님을 직감할 있습니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과 종교권력의 타락과 부조리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마르 12: 40)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예수님 시절에과부와 고아 가장 심각한 사회적, 경제적 약자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적으로 보호받아야 처지였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 당시의 과부에 대해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겠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과부가 되는 경우는 남편으로부터 소박을 맞는 경우 또는 남편의 사별로 말미암은 경우 이렇게 종류가 있었습니다. 여성은 자신의 의지대로 먼저 이혼을 요청할 없었습니다. 물론 소박을 맞는 경우 파면장이 있으면 재혼의 가능성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친정의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친정의 형편이 좋거나, 남편으로부터 받은 결혼예물인모하르mohar’ 친정으로부터 물려받았을 경우는 과부의 형편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고 기회가 되면 다시 재혼도 있었습니다. 사별로 과부가 경우에는 만약 자녀들이 없다면시형제 결혼법 의해 시동생과 결혼하여 시댁에서 계속 며느리의 지위를 유지할 있지만, 만약 시동생이 없을 경우는 다시 다른 사람과 결혼할 기회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그나마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경우이고, 대부분 과부들의 형편은 그다지 좋지가 않았습니다. 오직 유대교의 율법적 의무에서 제공되는 자선이나 주변의 도움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소박맞은 사람은 아무리 재혼의 가능성이 있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비록 율법이 과부와 고아의 보호자는 바로 야훼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선포했지만, 실제로 그러한 율법대로 그들이 보호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친정으로부터 도움이 끊기고 자녀도 없는 가난한 과부는 사유재산이 없을 경우 혹독한 처지에 놓이는 것은 다반사였습니다.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마르 12:44)

 

오늘 마르코는 과부가 자신의생활비전부를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생활비는 렙톤이었는데, 이는 오늘날 화폐로 환산하면 1시간의 최저 임금도 되지 않는 1,000 정도의 돈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1,000원으로는 하루 생활비도 되지 않는 돈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마르코를 따라 기록했던 루가복음에는 생활비라는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루가 21:1-4). 이를 보더라도 마르코는 과부의 형편을 조금 상세히 기록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렙톤의생활비 헌금으로 과부는극빈자였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부자와 과부가 각각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부자는 풍족한 가운데 많은 돈을 냈고, 과부는 적은 돈이지만 자신의생활비 전부 헌금했습니다. 일견에 우리는 부자의 헌금이 액수가 많으니 많은 헌금을 냈을 것으로 봤지만, 주님의 평가는 반대였습니다.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과부가 많이 냈다고 주님께서는 과부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말씀 다음에 예수님께서 과부의 믿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말을 하셨다면, 아마도 이야기는 자신의 전부를 바친과부의 헌신 이야기 종결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코는 이야기 다음에 전혀 덧붙이는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합니다. 대신 이야기 다음에예루살렘의 외형적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부분 배치하여 과부의 가난한 처지와 예루살렘 성전의 외양적 화려함을 대비시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야기가 단순히 헌금과 헌신에 대한 것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과부나 부자나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친 대로, 율법이 명하는 대로, 믿음으로 헌금을 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가진 전부일지라도, 비록 오늘 하루 굶게 될지라도, 과부는 자신이 가진 생활비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아마도 과부는 헌금을 하고 그날 하루를 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무리를 해서 헌금을 것이 종교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강박 때문인지 아니면 순수한 믿음에서 것인지 우리는 판단할 없지만, 그녀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헌금을 것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녀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엘리야를 도운사렙다 과부의 이야기”(1 열왕 17)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러한 이야기에 감동되어 헌금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전부로 엘리야를 도운 과부가 나중에 더욱 풍성하게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아니면 종교지도자들로부터 하느님의 성전에 이런저런 것이 필요하고 그것을 봉헌하면 복을 받는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여 헌금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과부이든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의무를 실천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부자들의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가난한 과부는 지금 헌금을 입장이 아니라 성전으로부터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처지였다는 점입니다. 그녀가 드린 렙톤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루 생활비도 되는 돈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생활비 전부라면 그녀의 가난한 처지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녀는 한마디로 최하위 극빈자로서 종교로부터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는 대상자였습니다. 야훼의 보호를 받아야 대상. 우리가 그녀의 믿음을 판단하기 이전에 그녀가 성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극빈자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당시 종교 권력은 극빈자에게 헌금은 요구해도 그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데는 인색했습니다. 그래서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 ’(마르 12:40) 그들은 서슴없이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의 부조리였습니다. 분명 그들은 헌금을 많이 하는 자들을 높이 칭찬했을 것이고, 가난한 자들의 품돈에도 욕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사는 성 안에 있는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다.” (신명 14:29)

 

신명기 말씀은 정확하게과부를 와서 배불리 먹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러한 율법의 의무조차 무시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고 오직 자신들의 배만 채우려는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주님의 분노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래서 마르코는 과부의 헌금 이야기 예루살렘 성전의 부조리를 여실히 드러내고, 이후 그러한 성전의 파괴에 대한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을 정당화합니다. 타락한 성전은 기초부터 허물어져야 한다고. 가난한 사람들의 신음에 귀를 막았던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키며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돌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하고 만합니까?”(마르 13:1)라고 예수께 자랑하는 장면은 정확하게 자신의 전재산인 렙톤 헌금함에 넣은 과부와 이미지적으로 대비가 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던 성전 권력에 주님께서는 정말 분노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봉헌은 많은 사람은 많은 대로, 적은 사람은 적은 대로, 각자의 형편대로 양심껏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자도 적게 자도 하느님 안에서는 부족함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출애 16:17-18 비교) 부자는 인색하지 말아야 하고, 가난한 사람은 교회에서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우리 교회가 보호하고 함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교회는 부족함도 넘침도 없는청빈의 상태 이르게 됩니다. 오늘 이야기를 단순히 가난한 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과부의 믿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전적인 헌신으로 해석하는 것도 물론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이 지닌 한계 또한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 12장의 전체적인 문맥과 주제는성전과 종교 권력자들의 부조리 드러내는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성전과 종교 권력은 가난한 과부를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벼룩의 간까지 빼먹었던 종교 권력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신심에 호소한 종교적 수탈은 정치적 독재자의 폭력보다 악랄하며, 하느님 앞에 가장 가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처음 보시고강도의 소굴”(마르 11:17)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것을 수탈하는 종교권력과 상징이었던 예루살렘 성전은 서기 70년에 로마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성전은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대체가 됩니다. 그것은 부활 이후에 성취될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으로 이것으로 구약의 성전의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1 고린 3:16)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각자가 하느님의 성전이 됐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론적인 정체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전답게 의무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종교의 이름으로 돈을 수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보듬고 함께 사는 길을 열어주는 의무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는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그러한 목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구제는 쌍두마차로 교회 선교의 가장 중요한 동력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도 조금씩 성장하여 다른 이들을 챙기고 가난한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로 성장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사라진 예루살렘 성전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였음을 기억하며, 하느님의 아름다운 성전이 우리 자신과 교회가 참다운 기능을 수행하는 교회로 성장해 가길 기도합니다. 아멘.

 

 

 


 

 

 

전례독서: 연중32 (나해) 1

 

본기도

하느님, 주님은 교만한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자를 높이시나이다. 비오니,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의 삶을 봉헌하여, 주님께서 권능으로 오실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1독서_ 룻기 3:1-5, 4:13-17

1 시어머니 나오미가 룻에게 말했다. “악아, 이젠 너도 행복을 누리며 보금자리가 있어야겠구나. 내가 그것을 마련해 주마. 그렇지 않느냐? 2 너는 보아즈 아낙네들과 어울려 지냈지만 그분은 너도 알다시피 우리와는 친척이다. 바로 오늘 그분은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를 것이다. 3 그러니 너는 목욕을 하고 향수를 바른 다음 장옷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 보아라. 그분이 저녁 식사를 마치기까지는 눈치채이지 않도록 하여라. 4 그분이 잠자리에 들거든 잠자리를 알아두었다가 살그머니 가서 발치께를 들치고, 거기 누워라. 다음에 네가 일은 그분이 일러줄 것이다.”
5 어머님 말씀대로 어김없이 하겠습니다.” 룻은 이렇게 대답하고,
13 이렇게 보아즈는 룻을 맞아 아내로 삼고 한자리에 들었다. 야훼께서 점지해 주셔서 룻이 아들을 낳자, 14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축하하여 말했다. “오늘 이처럼 당신 가문이 대를 이어 내려가게 해주셨으니 야훼께 찬양을 드립니다. 이제 아기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림을 받게 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15 당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며느리가 낳아준 아들, 아들 일곱보다 더한 며느리가 낳아준 아들이니, 이제 그가 당신에게 맛을 되돌려주고 노후를 공양해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고 자기 자식으로 길렀다. 17 이웃 아낙네들은나오미가 아들을 보았구나!” 하며 아기에게 오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요, 이새의 아버지였다.

 

 

성시: 시편 127

1    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일이다.
2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     밤늦게야 잠자리에 드는 것도,
   먹으려고 애쓰는 것도, 헛되고 헛되니
.     주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      때에도 배불리신다.
3    자식은 주님의 선물이며
.     태중의 소생은 그가 주신 상급이다.
4    젊어서 낳은 자식은
.     용사가 손에 화살과 같으니,
5    복되어라,
.     전통에 그런 화살을 채워 가진 ,
.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     부끄러움 없으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독서_ 히브 9:24-28

… 24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하늘의 성소를 본떠서 만든 지상의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의 성소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는 해마다 다른 짐승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야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번번이 당신 자신을 바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26 그분이 몸을 여러 바쳐야 한다면 그분은 천지 창조 이후 여러 고난을 받으셨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분은 역사의 절정에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27 사람은 죽게 마련이고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28 그리스도께서도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주셨고 다시 나타나실 때에는 인간의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이사 53:12

 

 

복음서: 마르 12:38-44

38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40 또한 과부들의 가산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41 예수께서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서 사람들이 헌금궤에 돈을 넣는 것을 바라보고 계셨다. 부자들은 여럿이 와서 많은 돈을 넣었는데 42 가난한 과부 사람은 와서 겨우 렙톤 개를 넣었다. 이것은 동전 값어치의 돈이었다. 43 그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44 다른 사람들은 넉넉한 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털어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