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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세례의 시간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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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모음/설교문

2022. 1. 8.

 

 

2022.1.9. 다해_ 주님의 세례_연중1주일

이사 43:1-7 / 시편 29 / 사도 8:14-17 / 루가 3:15-17, 21-22

 

 

흐르는 강물처럼”- 세례의 시간적 의미

 

채야고보 신부 / 성공회 제주한일우정교회 사제, Artist

 

헬라어로시간또는 가리키는 단어는크로노스Χρόνος’, ‘카이로스καιρός’, ‘호라ὥρα’ 등이 있습니다. ‘호라 ,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이계절’, ‘시기등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는 루가복음의 관점에 따라크로노스카이로스 집중하고자 합니다. ‘크로노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규칙적이고 물리적인 일반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의시간의 이름입니다. 철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유사해서티탄족 12 중에 하나인 농경의 크로노스Κρόνος’ 혼동할 때가 많습니다. ‘크로노스 시간은흐르는 강물처럼흘러가버리면 다시 돌아올 없는 시간을 뜻합니다.

 

카이로스 우리말로또는기회 번역될 있는데, 그리스 신화의카이로스라는 신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카이로스기회의 으로 머리는 길고 뒷머리는 대머리인 신입니다. ‘기회라는 것은 보는 즉시 잡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놓치고 만다는 뜻이라고 하지요. 기회를 놓치고 나면카이로스 뒤통수는 대머리이므로 절대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카이로스 이렇게 형상화된 이미지로 표현한 신화가 마디의 말보다 우리의 이해를 쉽게 만듭니다. 우리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러한카이로스하느님의 ’, 또는하느님의 시간으로 이해합니다. 역사라는 거대한크로노스 규칙적 흐름 속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시간에 균열이 생겨하느님의 시간 도래합니다. 그것을 우리는하느님의 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속에 어떻게 관여하시는 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중요한 것은크로노스 시간이든카이로스 시간이든 인간의 실존은 이러한 절대 시간의 흐름에 어떠한 영향도 미칠 없다는 것입니다.

 

1992년에 개봉된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영화배우로 우리에게 알려진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을 맡은 작품입니다. 노먼 멕클레인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지요. 영화는 저자이며 형인 노먼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송어가 많이 잡히기로 유명한 미국 몬태나주에 있는 미줄라 지역의 아름다운 배경으로 펼쳐지는플라이 낚시(Fly fishing)’ 소재로 가족 드라마입니다.  둘째 아들 폴의 역을 맡은 브레드 피트의 젊은 날의 신선한 모습을 있습니다. 저도 넷플릭스로 다시 감상할 있었습니다. 허공을 가르는 플라이 낚싯줄의 리듬감과 끊이지 않고 흐르는 강물, 그리고 수면 위에 떨어져 부서지는 찬란한 태양빛이흐르는 강물처럼하나로 융합된 편의 수채화 같은 깊은 영상미를 보여줍니다. 강과 낚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부자간의 같은 다른 그들의 성격과 시간의 결들이 영화 내내 잔잔한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그들은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서로를 끈끈히 사랑했습니다.

 

자신만의 시간과 리듬을 소중하게 여겼던 아버지는 엄격한 성품의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였습니다. 그의 시간처럼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며 규칙과 원칙을 중시하고 아들을 엄격하게 키웠습니다. 그러나 부자들 간에 유일하게 서로 공유하고 함께하는 시간은플라이 낚시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터득한 ‘10시와 2 사이의 4박자 리듬 아들들에게 가르칩니다. 이에 아들노먼 아버지에게 매우 순종적이어서 그러한 아버지의 낚시 리듬도 착실하게 배웁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 반항적이었고 규칙과 규정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독자적인 리듬으로 자신만의플라이 낚시 세계를 개척합니다. 그는 정말로프로 플라이 낚시꾼 되고 싶었지만, 그런 직업이 없다는 형의 말을 듣고 실망합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고향에 정착하여 지역신문기자로 남게 되고, 형은 도시로 유학을 떠나 착실히 교수의 길을 밟습니다. 영화에서는 작은 아들이 도박에 빠졌는지 이유를 전혀 설명하지 않아 이유를 없지만, 불행히도 작은 아들은 도박에 빠져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으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부자. 그들이 유일하게 서로를 이해했던 순간은플라이 낚시 함께한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그것이 영화의 중심 소재인 이유입니다. 마지막으로 셋이 함께 낚시를 자유분방한 작은 아들은 자신만의 리듬으로 월척을 낚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기뻐하는 순간의 감동은 서로에 대한아름다움으로 기억됩니다. 이것이 그들이 함께 경험한카이로스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 이에 대해 아들 노먼은 다음과 같이 회상을 합니다.

 

“나는 또 명확히 깨달았다. 인생은 예술작품이 아니기에 이러한 순간은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렇습니다. ‘카이로스 시간은 너무 순식간이라 자칫흐르는 강물처럼금방 흘러가크로노스 시간 속에 묻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스 인지한 순간 깨달음은 영원한 것이 됩니다. 둘째 아들의 죽음 후에 노먼은 그의 아버지께 동생이훌륭한 플라인 낚시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가카이로스 통해 깨달은 그의 동생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작은 아들을 기억합니다. 

 

“그게 다가 아니야, 아름다운 아이였잖아.”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 감동적인 명대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둘째 아들의 죽음으로 찾아온 번째카이로스 시간에 부자간에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 다시 도래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자는 전혀 겹쳐지지도 합쳐지지도 않을 같았던 서로의 이해의 시간들이 작은 아들의 죽음으로 아름답게 다시 겹쳐지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순간은흐르는 강물처럼시간의 흐름 속에 침투되는 영광의 순간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서를 통해 요르단강의흐르는 강물위에 남자를 목격합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그들은 사촌지간으로 이미 서로 아는 사이였지만, 오늘 요르단 강에서의 그들의 만남은 그동안의 그들의 시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게 됩니다. 둘은 같은듯하면서도 다른 묘한 긴장감을 드러냅니다. 원시기독교공동체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관계에 대해 무척 고민한 흔적이 복음서의 행간에서 읽힙니다.  4 복음서가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모두 기록하면서 매우 신중했다는 점은 부인할 없는 사실입니다. 보도의 내용도 서로 차이가 있고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도 매우 신중하게 고민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으셨다는 점은 복음서 이야기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의 스승을 다른 스승의 권위 밑에 두는 진술을 생략하지 않고 기록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겁니다. 이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결코 생략할 없는 전승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우리가 있는 것은 세례자 요한의 시간과 예수의 시간이 세례 사건을 통해 상호 교차되면서 전혀 새로운 시간으로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세례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의 시간이 교차되는 것과도 유사하기에 이를 하나의 유비로 생각할 여지가 생깁니다. 서로 상반된크로노스 시간들이 교차되는 지점에서하느님의 시간 역사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다른 둘의 관계를 정리하고, 둘의 관계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메시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와 세례자 요한은 당시의 율법학자들(서기관들)과는 달리 군중들 앞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또한 둘은 제자 그룹을 결성한 것도 일치합니다. 세례자 요한이회개의 선포 것처럼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특권의식이나 선민사상을 철저히 배격했고 회개를 촉구했던 것도 일치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심판에 대해서도 둘은 똑같이 긴급하면서도 냉혹한 종말에 대한 선포를 합니다. 사람은  소위 거룩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거부하고 소외된 자들에 대해 똑같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차이점 또한 명확합니다. 요한이 금욕적이었던데 반해 예수는 반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 대해 포용적이었고,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했지만, 예수께서는 사람들 속에서 생활하셨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위해 한적한 곳으로 종종 가셨습니다. 요한은 심판에 대해 강조한 반면, 예수께서는하느님의 나라하느님의 통치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차이점은 세례자 요한의 시간이기대 범주, 크로노스의 시간에 머물러 있었다면, 예수께서는하느님의 카이로스 도래를 주장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여전히 율법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지만,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복음의 시작으로 하느님의 때를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하느님의 시간에서는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자 요한 보다는 크다”(루가 7:28) 말이 성립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때는 바로은혜의 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서가 우리에게 선포하는 하느님의 때인카이로스입니다.

 

루가는 세례자 요한까지를이스라엘의 시대 정의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시작한 하느님의 때를예수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는 철저히 성령의 임재로 구분되는 시간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기 때문입니다. 이제하느님의 시간 성령께서는 예수에게 집중이 되고, 후에교회의 시대에는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은사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루가는 성령을예수의 ’(사도 16:7)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 사건은 개의 시간이 교차되면서하느님의 카이로스 드러난 사건이라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예수의 세례를 묘사한 그림에서처럼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일대일로 세례식을 거행한 것은 루가복음의 진술과는 다릅니다. 루가는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침례 받고 있었다는 점과 침례를 받으신 후에기도 하시는 중에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진술은 다른 복음서와 차이가 납니다. 여기에서비둘기처럼 성령을 비둘기로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단순 비교법으로 마치 비둘기가 내려오듯이 사뿐히 성령께서 임하셨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존재론적으로 비둘기로 형상화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가 아닐 없습니다. 단순히 상징의 차원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리고 성령께서 예수의 머리 위로 임하셨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것은하느님 나라 위한 그의소명 관련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분명한 목적으로 특별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는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가 3: 22 / 비교: 시편 2:7; 창세 22:2; 이사 42:1”) ”라는 하늘의 선포를 듣습니다. 이제 예수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위에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기 전에는 그의 정체를 정확히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루가 3:16, 마태 3: 11) 예수님이심을 오늘 성령을 통해 요르단강에서 알게 것입니다. ‘카이로스 시간을 목격한 것입니다. 구시대는 여기에서 마무리가 되고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오늘 언급했던 영화의 이야기처럼 부자간에 서로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지만, 그들은카이로스 시간이 하나 됨의 사랑을 깨닫는 시간이었음은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요르단강에 섰던 사람의 운명도 앞으로 이들이 전개할 새로운 시대에 서막이었습니다. 아마도 세례자 요한은 시대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전혀 이해를 하고 숨을 거뒀을 겁니다. 성령과 불이 모든 신자들에게 내려지고 모든 신자가 성령을 소유할 있는 시대라니! 그는 비록 요엘 선지자의 예언(요엘 3:1-2) 성취되는 것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자기 때의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떠날 때와 내려놓을 때의카이로스 아는 것은 지혜 중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이것이 요한의 이해가 미친 범위입니다. 그는 이상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모든 은총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하느님의 시간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례 사건으로부터 자신의 시간이 끝났음을 인지했습니다. 순간 그에게 도래한카이로스 자신의 시대의 끝을 자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이해보다는 카이로스앞에 순종을 택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시간과 때에 대해 많은 묵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시간은 단순히 해가 바뀌면 오는크로노스 시간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시간인카이로스인지? 나는카이로스 분별할 준비가 됐는지? 아니면 무덤덤하게 별다른 감흥 없이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똑같다면, 시간은 결코 성화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입니다. 심지어크로노스 시간조차 매우 상대적일 있는 , 우리는 우리 각자의 시간들, 우리 각자가 느끼는 시간들이 모두 다르다는 것도 인지해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같지만, 여전히 템포 느리게 자신의 시간을 따르는 사람이 있고, 템포 빠르게 시간을 앞서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그리고 다양한 시간의 리듬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통정리가 같지 않은 우리 각자의 시간의 흐름도 하느님의카이로스앞에서는 모두 멈춰 서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카이로스 도래는흐르는 강물에서송어를 잡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유심히 강물을 관찰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만약 부자에게플라이 낚시 함께 멈추는 시간이 없었다면? 그날 아침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만남으로 인한 멈춤이 없었다면? 아마도 하느님의카이로스크로노스 시간 속으로 그냥 흘러가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시간은 과연 어떠한가요? ‘흐르는 강물처럼흘러가는 우리의 시간은 정말 안녕합니까?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시간은 여기에 참석하신 신자들의 숫자만큼 다양한 시간의 리듬들이 겹쳐 있습니다. 같은 장소 같은크로노스 공유하는 듯하지만, 플라이 낚시의 리듬이 다르듯이 각자의 시간에 대한 리듬과 느낌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저는 우리 각자의 시간들이 예배 속에서 하나의 리듬으로 만나는 지점이 만들어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러할 시간이 성화되고 하느님의카이로스 예배 가운데 도래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두려움과 기대를 가지고 제단에 서면서 여러분과 같은 지점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할 우리는 이해보다는 사랑으로 오롯이 나아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인의 시간과 삶을 이해한다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점점 무엇을 도와야 할지 모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해보다는공감 불러옵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세례 시에 예수와 세례자 요한 사이에 오고 것은 서로를 위한 이해나 또는 하느님의 뜻을 분석하기 위한 신학적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바리사이파와 서기관들이나 찾는 방법이지요. 세례자 요한과 예수 사이에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공감하는카이로스 작동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순간이지만 그것은크로노스 흐름을 바꿔놓습니다. 하느님의 때를 발견한 순간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이해보다 순종을 택했습니다. 공감이면 충분합니다. 사랑에서 출발한 공감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하느님의 시간으로 인해 서로를 공감하는 순간이 임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눴습니다. 아멘. 

 

 


전례독서: (다해) 주님의 세례/연중1주일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예수께서 요르단 강가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성령을 보내시고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하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세례의 언약을 굳게 지키며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또는

 

사랑의 하느님, 의로우신 성자께서는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어 우리 죄인들과 같이 세례를 받으셨나이다. 비오니,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게 하소서성부와 성령과 함께 하느님이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사 43:1-7

.     그러나 이제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건져주지 않았느냐?
.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사람이다.
2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갈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     강물이 너를 휩쓸어가지 못하리라.
.     네가 속을 걸어가더라도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3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     이스라엘의 거룩한 ,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     이집트를 주고 너를 되찾았고
.     에티오피아와 스바를 주고 너를 찾아왔다.
4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     그러니 어찌 해안 지방을 주고라도 너를 찾지 않으며
.     부족들을 내주고라도 너의 목숨을 건져내지 않으랴!
5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보살펴 준다.
.     내가 뜨는 곳에서 너의 종족을 데려오고,
.     지는 곳에서도 너를 모아오리라.
6    내가 북쪽을 향해서도 외치리라.
.    ‘그들을 어서 내놓아라.’
.     남쪽을 향해서도 외치리라.
.    ‘그들을 잡아두지 마라.’
.     아무리 데서라도 나의 아들들을 데려오너라.
.     끝에서라도 나의 딸들을 데려오너라.
7    그들은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백성,
.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시편 29

1    하느님을 모시는 자들아, 주님께 돌려 드려라.
.     영광과 권능을 주님께 돌려 드려라.
2     이름이 지니는 영광
.     주님께 돌려 드려라.
.     거룩한 두르신 주님께 머리를 조아려라.
3    주님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울려 퍼진다.
.     영광의 하느님께서 천둥소리로 말씀하신다.
4    주께서 바닷물 위에 나타나신다.
.     목소리는 힘차시고
.     목소리는 장엄하시다.
5    주님의 목소리에 송백이 쩌개지고
.     레바논의 송백이 갈라진다.
6    레바논산이 송아지처럼 뛰고
.     시룐산이 들송아지처럼 뛰게 하신다.
7,8 주님의 목소리에 불꽃이 튕기고,
.     광야가 흔들거린다.
.     앞에서 카데스 광야가 흔들린다.
9    주님의 목소리에, 상수리나무들이 뒤틀리고
.     숲들은 벌거숭이가 된다.
¶    모두 주님의 성전에 모여
.     한결같이 영광을 기린다.
10  주께서 거센 물결 위에 옥좌를 잡으시고
.     영원히 왕위를 차지하셨다.
11  주님의 백성들아, 그에게서 힘을 얻고
.     복을 받아 평화를 누리어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사도 8:14-17

14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리로 보냈다. 15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로 내려가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16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성령은 받지 못했던 것이다. 17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도 성령을 받게 되었다.

 

 

루가 3:15-17, 21-22

15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으므로 요한을 보고 모두들 속으로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러나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17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
21
사람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있을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를 하고 계셨는데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 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시편 2:7; 창세 22:2; 이사 42:1”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의 세례 축일은 공현일 후 연중시기의 첫 주일로, 1월 7일에서 13일 사이에 있습니다. 공현일이 주일이면 주의 세례 축일은 월요일로 옮겨서 지킬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