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야고보의 창문

초월 transcendence과 내재 immanence, 성 sacred과 속 profane, 그 경계에 창문 하나 달기...

ICON STUDIES 2011 _ Works & Critical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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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Paintings/ICON STUDIES 2011

2012. 4. 6.

 




ICON STUDIES

Sacred & Secular

by James C.W.Chae


2011.12.20 ~ 2012.1.7

Gallery Indeco(갤러리 인데코)




 


ICON STUDIES - Papa's Boy_acrylic,conte on linen._130x162cms. 2011

 

 


 

ICON STUDIES -Christ With Glasses_oil,conte,acrylic,crayon on linen._60.8x72.5cms. 2010




ICON STUDIES - iPhone_acrylic,conte on linen._60.8x72.5cms. 2010





ICON STUDIES - A Tear_acrylic,conte on linen._60.8x72.5cms. 2010




ICON STUDIES - Nevermind_acrylic,conte on linen_53x72.5cms. 2011




ICON STUDIES - MP3_acrylic,conte on linen._130x194cms. 2011




ICON STUDIES - Origin Of The Bible_acrylic,conte on linen._130x194cms. 2011






뿌리의 시간, 초월의 공간을 향한 하나의 미학적 제안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평론) 

 

 

 1. 뿌리의 시간, 초월의 공간

 

 과학은 미래를 중시하고 신기술을 예찬하며 과거는 주로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반면, 예술은 과거와 훨씬 더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다. 예술은 인간의 고도 축적으로서 시간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고유한, 아마도 가장 인간적인 방식으로 과거를 사용하는 방식, 즉 뿌리와의 연계 안에서 현재를 제대로 인식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 지평이 기술주의에 경사되고 뿌리없는 미래에 이끌렸던 아방가르드(Avant-Garde) 미학에 의해 뒤틀려버렸다. 전위주의 미학은 지속적인 새로움, 과거의 극복 내지는 전복을 제일의 미덕으로 삼는, 한 마디로 ‘전진’에 대한 강박증의 미학이다. 전위주의의 오류, 곧 전진의 강박은 과거와 만나고 뿌리에 다가서는 경험을 폄훼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독단과 표류로서의 현재와 환영으로서의 미래에 매달리도록 했다.


하지만 인간은 과거로부터 배워야만 하는 존재다. 인간은 미래를 위해 더욱 과거와 만나고 뿌리와 화해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존재 자체가 과거와 과거의 과거로, 곧 뿌리의 시간까지 가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능성의 공간을 전진의 이념이 독차지하는 것은 존재로서는 매우 치명적인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전진의 강박이 확실하게 소멸시킨 것이 또 하나가 있는데 바로 초월의 공간이다. 초월의 공간이 인식의 범주에서 추방됨으로써, ‘실재 세계와 별개의 세계를 동시에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 그리고 그 초월의 공간을 동료 인간의 성찰과 유익을 위해 허구적으로 투영할 수 있는 능력, 즉 창조적 상상력의 가능성이 현저하게 위축되고 말았다. 이에 관해서는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의 견해가 동의할 만하다 : “서구인들은 현실에 깊이 최면에 걸려 있어서 인간의 상상력의 온전한 범위와 중요성을 간과해 왔다.[1] 초월의 공간을 탐색하고 유희하는 가능성이 위축되거나 상실된 결과, 예술 자체에 대한 봉헌, 곧 과대망상화된 예술이 창궐했다. 부조리의 쇄신에서 혁명과 해방의 궁극적인 성취에 이르기까지 망라하는 영웅적 투사로서의 예술, 예컨대 허버트 마르쿠제 같은 이론가들이 언급했던 “실재의 연쇄적 과정에서 빠져나와 그 자체의 의미와 진리를 취하는” 예술, 순수하며 오염되지 않았고, 항상 대의에 공헌하며 본질적으로 위대한 예술… 이러한 예술이라면 외부에서 다른 무엇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겠는가. 설사 초월적 차원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해도 하나도 아쉬울 게 없을 것이다.

 


 

 2. 이콘(Icon) : ‘신성의 원리(principle of consecration)'와 '솔직성의 원리(principle of honesty)의 균형

 

 채창완의 작업은 우선 자신의 세계를 다시 뿌리의 시간에 덧대고, 초월의 공간과 결부시키는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먼 시간대를 관통해 온 이콘(icon)의 이미지를 초대해 들임으로써 그는 과거로 선회하고 초월과의 접촉을 시도한다. 이콘이 지시하는 초월계를 지금 이곳의 현존과 나란히 놓음으로써, 과거와 현재, 뿌리와 실존, 초월과 현세계의 상징적 만남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콘은 ‘초월적 세계를 건립하고’, 초월적 진리를 암시한다. 이콘이 동반하는 숭고미는 “카타르시스나 쾌를 통해 순간적으로 경험하는 감각적 초극의 경험과는 구분된다.” 그 숭고의 감정은 오로지 초월적 실재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감각이나 이성으로 경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채창완은 이콘을 자신의 세계에 끌어들임으로써 그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인가? 그러한 이해가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오해의 여지가 있다. 해석은 해석하는 주체의 행위를 강조함으로써 해석되는 객체를 대상화하는 것인 반면, 초대는 초대하는 주체 이상으로 초대되는 대상이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시몬느 베이유가 ‘찾는다’는 동사가 ‘기다린다’의 그것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설사 채창완이 이콘을 해석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해석은 동시에 해석되어짐으로써만 가능해지는 해석인 것이다. 다뤄지는 것에 의해서만 다루는 것이 가능한, 다가옴으로써만 다가서는 것이 가능한, 그것이 채창완이 이콘의 세계(차원)를 자신의 세계(차원)에 초대했을 때 일어나는 동시적인 상호작용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겸손한 자세로 우리들의 ”예“에 자신의 ”예“를 덧붙인다”는 의미일 것이다.(디트리히 본 회퍼)[2]

 

이 초대에 의해 성자 예수의 성육신이 다시 한 번 대지적인 사건이 된다. 그분은 더 이상 저 멀고 먼 세계, 하나님 나라의 보좌 우편에서 이곳의 실존과 무관하게 앉아계신 분이 아니라는 사실의 확인이다. 그분은 지금 이곳의 시간 안에 거하고 실존의 상황들을 공유한다. 아이폰으로 음악을 감상하기도 하고, 붉은 테의 패션안경도 마다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니르바나(NIRVANA)가 새겨진 주황색 티셔츠에 스키니 진을 입고 있기도 하다. 니르바나 바로 밑에는 ‘네버 마인드(nevermind)'가 새겨져 있다. 바지 앞주머니에는 애플 로고가 새겨진 아이폰이 꽂혀 있다. 머리는 다분히 히피 스타일이다.

 

사유의 가능성을 종교라는 지극히 제한적인 범주로 국한시키지만 않는다면, 채창완의 붓을 통해 ’Never mind!'라는 구어체에 내포된 그분의 상상을 초월하는 편만한 보편성의 음성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오히려 우리가 성자 예수를 너무나도 협소한 문화적 편견 안에 가두어 왔던 것이 아닐까? 이 땅의 어떤 기호, 문자, 문양이나 패턴이 그분의 사랑의 다가오심을 거부하거나 무의미로 돌려보내는 결정적인 장애가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나찌의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디트리히 본회퍼가 1943년에 직면했던 바로 신학적 질문과 거의 정확하게 같은 맥락의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장소를 하나님에게 따로 마련해드리려고 애쓰는 것 같네. 나는 삶의 끝에서가 아니라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는 약할 때가 아니라, 힘이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는 죽을 때나 죄지었을 때가 아니라, 삶 속에서 그리고 인간의 선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3]

 

본회퍼가, 그리고 자신이 동일하게 마주했던 질문에 채창완은 자신의 회화로 답한다. 그것(회화)를 통해 하나님을 온 세상 속으로 모시고 들어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따로 마련되어 왔던 ‘종교적 구석’에서 살게 하는 대신 스티브 잡스와 아이폰과 패션 안경과 빨간구두가 유행하는 현재와 온 세상으로 모셔들였던 것이다.

  

이 초대, 모셔들임을 그는 자신의 석사논문에서 ‘신성의 원리(principle of consecration)'와 '솔직성의 원리(principle of honesty)’의 균형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신성의 원리가 강조될 때 교리적이고 교조주의적이 될 수 있는 반면, 솔직성의 원리가 강조될 때 양식적으로나 감수성의 맥락에서 종교적 심원성을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의 균형과 조화, 견제와 감시, 곧 교조주의의 덫에 걸리지 않으면서 종교적 심원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4] 그에게 이는 신앙의 내적구조일 뿐 아니라 미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신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교회의 캐리그마를, 솔직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현대사회와 현대미술의 요구를” 채창완은 이러한 신학적 지평, 곧 신성의 원리와 솔직성의 원리에 기반을 두며 교회와 세상의 감수성에 동시에 호소하는 지평 위에서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이 태동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며, 자신의 접근이 그 하나의 단초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듯 채창완은 현대미술의 좌표에 다시 초월을 기입함으로서 그것과 현세계 사이의 화해가 존중되는 예술을 생각한다. 이콘은 이 두 세계(차원)을 매개하는 언어로서, 신성과 솔직성, 재현미학과 상징미학의 사이에 위치하는 언어체계이다. 



 3. 다른 방향이 모색되어야 할 시기


채창완의 <Icon Studies>는 현대미술의 경향에 대한 비판과 반성적 토대를 가지고 있다.  “예술이 아닌 것이 예술인 체하고, 실제가 시뮬라크르로 대체되는 상황”, 곧 포스트모던한 세계(차원)에 대한 열망과 환호, 그리고 그로부터 도래하는 미학의 맹목적 개방주의, 곧 모든 것이 예술일 수 있으므로 시각예술 전반에 만연하는 해체와 소멸의 징후들…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배경은 모든 것이 진리인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절대적 회의주의자가 되거나 자신-자신을 넘어서는 세계는 없거나 있더라도 무의미하므로-만의 세계에 틀어박히는 수밖에 없다.  지난 반세기는 이 거짓 자유와 해방이 진정한 예술의 가치를 공략하고 교란해온 지난한 시간이었다. 작가는 묻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단지 ‘문화와 예술의 죽음’을 확인하고 자조하는 것이 그 답일 수는 없다는 게 작가의 결론이다. 분명한 것은 이제는 이제껏 현대의 미술이 진행되어왔던 것과 다른 방향을 모색해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맥락이 채창완의 이콘을 재호출하고 재의미화하고자 했던 행간을 주의깊게 읽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1]  니콜라스 월터스토프/신국원역,『행동하는 에술』, (Ivp;서울, 2010), p.231.

 

[2] 에릭 메텍시스, 『디트리히 본회퍼』, (포이에마:2010), p. 659.

[3] 앞의 책, p. 673.

[4] 채창완, 「현대기독교 미술의 미학적 신학연구」, 2008, 성공회대학교 신학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pp.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