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야고보의 창문

초월 transcendence과 내재 immanence, 성 sacred과 속 profane, 그 경계에 창문 하나 달기...

23 2022년 03월

23

나의 시선/나의 시선들 [수요 1분 묵상]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오히려 완성하러왔다.” 마태 5:17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오히려 완성하러왔다.” 마태 5:17 유대인들은 율법 조문의 문자적 해석과 실천으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보다 더욱 극단으로 율법의 말씀을 해석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 정신을 살리는 것에 더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그 문자와 그 행간에서 읽히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말합니다. ‘시니피앙’이 아니라 ‘시니피에’에 더 방점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이미 주님의 산상수훈을 통해 모두 표현이 됐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가르침대로 살 준비가 됐느냐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우리의 선택에 따르는 합당한 행동들이 늘 함께..

16 2022년 03월

16

나의 시선/나의 시선들 [수요 1분 묵상]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마태 20: 23c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마태 20: 23c 하느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좌우편에 앉을 사람들을 정해 놓으셨다는 말씀. 마치 예정설처럼 들리지만, 이는 하느님 나라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미리”라는 말을 공동번역이 삽입을 하여 더 혼란스럽습니다. 구원과 상급에 대한 것은 ‘가능성’으로 모두에게 열려있습니다. 그 가능성의 귀결은 오직 성부 하느님께 귀속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 밖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향해 열린 가능성. 하느님 나라는 모두에게 열린 문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된 자는 적다고 말씀하시니(마태 22:14) 우리는 어떻게 선택하고 행동할지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선택에는 반드..

09 2022년 03월

09

나의 시선/나의 시선들 [수요 1분 묵상]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요한 4:34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내 양식이다. “ 요한 4:34 오늘 복음서에서 '음식'은 은유입니다. 음식은 주님께서 표현하신 것같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모두 바쳐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식이 우리 입을 통해 들어와 에너지와 자양분으로 변해서 피를 통해 우리 몸과 하나가 되듯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헌신한 사람은 하느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아가 신령한 인격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제자들과 주님의 시각차가 참 많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라고 예외일까요? 우리는 얼마만큼 하느님의 일에, 하느님의 뜻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이 사순절에 우리 자신의 깊숙한 곳까지 자기를 성찰하고 타인과의 모든 관계와 더불어 하느님과의 관계 또한 살..

02 2022년 03월

02

나의 시선/나의 시선들 [수요 1분 묵상]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마태 6:1a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마태 6:1a ‘자선’은 타인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위선’은 ‘거짓으로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전의 정의는 명확하지만, 종종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것을 망각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격으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매우 인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하면 하느님도 우리를 진실하게 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예의를 갖추면 그분도 우리에게 예를 갖추십니다. 이것이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실존의 양태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매우 정중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늘 그분 앞에 정결하다면 주님 또한 우리에게 늘 신실하십니다. 사순절. 우리의 신심이..

23 2022년 02월

23

나의 시선/나의 시선들 [수요 1분 묵상]“…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마르 9:38b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마르 9:38b 우리는 무리를 짓고 싶어 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 타인들을 배제하고 싶어 하지만, 주님께서는 모두 품어주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타인과 다름 속에서 자신의 우월감을 찾지만 주님께서는 서로를 용납하라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실존은 각양각색이지만,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서 존재로서 평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공동체 속에서 하느님 앞에 ‘존재자’로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존재자’는 ‘존재’ 안에서 영원성을 얻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 공동체 안에 ‘있음’으로 함께하십니다.

16 2022년 02월

16

나의 시선/나의 시선들 [수요 1분 묵상]“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 (마르 8:24)

“나무 같은 것이 보이는데 걸어다니는 걸 보니 아마 사람들인가 봅니다.” (마르 8:24) 시각장애인을 치료한 사건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보다 우리는 이 말씀이 담고 있는 내러티브에 집중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본다는 것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희미한 것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들에 대해 쉽게 확신을 갖지만 정말 우리는 눈에 들어오는 대상들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보는 것은 단순히 원자들이 반사하는 빛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빛이 없으면 결국 반사도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빛이 사물의 본질은 아닐 것입니다. 과학은 사물의 본질을 원자와 원자핵에서 찾지만 우리는 모든 존재의 본질을 보이지 않는 영에서 찾습니다. 우리의 눈이 비록 현재에는 ..

02 2022년 02월

02

나의 시선/나의 시선들 [수요 1분 묵상]“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루가 2:35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루가 2:35 마리아는 천사의 수태고지도, 목자들의 신탁도 늘 침묵 속에서 “마음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가 2:19)라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봉헌’에서도 마리아는 시므온의 신탁의 노래를 듣고 또 마음속 깊이 이를 간직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픕니다. 자기 아들의 소명에 대한 신탁은 늘 영광과 고통이 함께 뒤범벅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귀와 입에는 달콤하지만 늘 마음은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뿐입니다. 마리아가 받은 소명은 이렇게 우리 교회의 소명과 연결됩니다. 주님의 제자도는 정확하게 그분의 십자가로 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동시에 소명으로 받았..

26 2022년 01월

26

나의 시선/나의 시선들 [수요 1분 묵상] 복음의 신비-마르 4:11-1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준다. 그것은 그들이 ‘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보고 알아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마르 4:11-12 우리는 왜 전도를 못할까요? 복음적인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또 복음적인 메시지도 남에게 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이 쓰여지던 당시 마르코공동체 또한 이러한 심한 좌절에 빠진 것 같습니다. 주님의 때는 더디오고, 전도는 생각처럼 쉽지 않고, 핍박은 날로 늘어가고… 그때나 지금이나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마르코는 이를 ‘미스테리온(신비)’이란 말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