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북

아트월드 2015. 9. 13. 03:46

 


총페이지 585

 

발간일자 2015.12.1

 

출판사 - 아트월드

 

가격 - 17,000

 

저자 조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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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서전트가 영국에서 인상주의로 처음 동심(童心)의 세계를 그리다

 

존 싱어 서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174.0x153.7cm, 1885-86

서전트는 1885년 영국의 브로드웨이 빌리지의 코츠월드 화가마을에서 동심의 서정적인 그림을 그렸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라는 제목은 당시 유행하던 조셉 마징히 (1765~1844) 작곡의 그대 양치기들아 나에게 말해다오 : Ye Shepherds Tell Me’라는 노래 가사 중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1884년 프랑스 살롱전에서 마담 X 로 물의를 일으키고 영국으로 피난 와서 1885년에 여름 휴양지인 코츠월드 화가마을에 갔다. 다행히 그곳에서 평화롭고 아름다운 정경에 마음을 빼앗겨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후의 빛은 점차 약해지고 밤의 등불이 시작되는 어스름한 황혼(黃昏) 무렵에 두 소녀와 함께 카네이션, 백합 및 장미꽃이 중국풍의 등불과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을 그렸다. 황혼의 서정적인 광경을 제목에서처럼 재현하여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 동심(童心)의 추억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특유의 심미적(審美的) 방식으로 두 가지 형태의 등불을 기묘하게 나란히 놓았다.

인상주의 작품은 근본적으로 빛()의 연구로부터 관련이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실제 야외에서 그리기 위하여 많은 고안을 했으나 그는 하루의 황혼시간에 오직 30분만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림을 완성하는데 꼬박 2년간의 여름을 이곳에 와서 그렸다. 끈질긴 참을성과 집착이 낳은 걸작임에 틀림없다. 그는 즐거운 꽃들과 어린이의 혼성물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를 영국 국민을 위하여 1887년 왕립아카데미에서 전시했을 때 공식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다. 서전트는 이 작품으로 런던에서 평가되기를 순식간에 유명화가로서 다시 증명되었다. 마담 X 로 인하여 프랑스에서 있었던 비난으로 영국의 비평가들에까지 생긴 의심을 단번에 누그러뜨렸다. 영국 국민들의 인정은 런던에서 그의 경력에 좋은 징조가 되었다. 사실 1880년대 후반은 영국 후원자들이 그때까지 서전트를 택하기에 주저했던 것이다. 반면에 미국인들은 유럽에서 주로 생활한 미국의 유명화가인 그가 1887년과 1889년 사이에 미국을 방문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영국의 후원자들은 눈에 띄는 훌륭한 서전트의 초상화에 안심했다. 드디어 1890년대에 그는 영국의 사업가, 그의 가족들, 예술인 및 연예인들로부터 수많은 주문을 받았다. 그는 특별히 영국 귀족에 대하여도 우아한 권위를 느끼게 하는 작품의 초상화가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미국의 후원자들로 부터도 성원은 마찬가지였다. 20세기에 들어서자, 그는 수많은 초상화 주문에 지쳤다. 당시 그는 미국의 보스턴 공공도서관과 보스턴 미술관, 하버드 대학의 기념도서관 등의 벽화(壁畵) 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이 벽화는 1890년 초부터 주문을 받았던 것이다. 1903년 뉴욕과 런던에서 여행 중에 그린 수채화도 갈채를 받았고 많은 수요를 자극했다. 1907년경에 서전트는 더 이상 유화로 된 초상화 주문을 받지 않겠다고 언질을 주게 되자 수채화가로서 다시 안정된 명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본문 중에서)

 

800년의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의 독립정신을 고취한 "토머스 W. 윌슨 대통령의 초상화.

 

미국의 28대 토머스 우드로 윌슨 대통령(1856~1924, 재임 1913~1921)의 초상화는 미국의 초상화가인 존 싱어 서전트(1856~1925)1917년에 그렸다. 서전트는 당시 파리에서 영국으로 영구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다. 이 초상화는 미국에서 소장되지 않았고 아일랜드 인이 독자적으로 의뢰하여 더블린에 있는 [국립 아일랜드 갤러리]에 소장되고 있다. 그 이유는 서전트의 작품 후원자인 미국 보스턴출신의 미술수집가이며 박애주의자인 이사벨라 S. 가드너(1840~1924)부인에게 쓴 글 속에 신비스런 사연이 숨겨져 있었는데 후일에 드디어 밝혀졌다

서전트는 미국인이지만 이태리 피렌체에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의사(醫師)로서 부인의 여행벽(旅行癖)을 이해하여 미국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고 유럽에서 호텔이나 빌라에서 생활하면서 두루 여행을 다녔다. 서전트는 이태리, 파리 등 유럽의 모든 곳에서 어려서부터 살았다. 그는 21살까지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그 후 파리에서 그의 역작 초상화인 마담 X제작과 전시 이후에는 작품에 대한 스캔들로 인하여 부득이 영국 런던으로 영주하고 독신(獨身)으로 생을 마감한 당시 유럽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그는 미국에서도 가장 갈채 받는 초상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서전트는 20세인 1876년에 일찍이 파리에서 모네를 만난 적이 있었고 21세인 1877년에 파리살롱을 성공적으로 거친 이후에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모네가 정착한 지베르니를 1885년부터 여러 번 방문했다. 지베르니에서 모네의 초상화 2점도 그려서 1점은 뉴욕의 국립 디자인 아카데미(Newyork, the National Academy of Design)의 평생회원이 되었을 때 기증하여 영구 소장되고 있다.

 

존 싱어 서전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 캔버스에 유채, 153x190.2cm, 1917

타국의 대통령 초상화를 독자적으로 제작하여 자국에 소장케 한 아일랜드의 박애주의자

퍼시 레인 경()(1875~1915)은 아일랜드의 미술수집가이며 박애주의자였다. 그는 전 세계에서 현대미술관 (Public Gallery of Modern Art)을 가장 먼저 설립한 사람이었다. 유럽에서도 활동한 미국의 이사벨라 가드너 부인과 아일랜드의 휴즈 레인은 다 같이 박애주의자로 당시 세계적인 추세의 흐름을 교류했다. 휴즈 레인은 1915년 그가 죽기 전에 학자출신인 미국의 월슨 대통령이 주창한 약소국가를 위한 민족자결의 원칙의 사상과 정신을 미리 감지한 것 같았다. 그는 초상화 제작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아이디어를 내고 제안을 했다. “만약 어떤 이의 초상화를 그린다면 아일랜드의 적십자 기구에 1만 파운드를 주겠다.”는 것이다. 휴즈 레인은 어느 누구의 초상화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물론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존경하는 윌슨의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타국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려서 자국의 갤러리에 소장하겠는가? 그가 1차 세계대전이 1914년에 발발되고 그 이듬해인 1915년에 휴즈레인은 여행하던 뉴욕에서 출발하여 영국의 리버풀로 향했다. 그러나 여객선 루스태니어 호가 아일랜드 해안에서 독일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로 일찍 죽자 그의 재산은 국립 아일랜드 갤러리에 기증되었다. 이 배에는 선객 희생자 1,119명중에 114명이 미국인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에 항의했고 위싱턴 대통령이후의 유럽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는 고립주의를 버리고 그 결과 2년 후에 미국이 독일에 전쟁에 참여했다.

휴즈 레인의 약속대로 1916년에 아일랜드 적십자 기구에 1만 파운드가 건네졌고 그가 결심하기로 한 그 초상화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는 유언(遺言)에 따라 초상화는 2년 뒤인 1917년에 그려졌다.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1918년에 윌슨대통령은 민족자결의 원칙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을 발표하여 약소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에 자극을 주었다. 한국의 독립도 1919년의 3.1운동으로 세계적 추세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최초의 남북분단국가로 영국으로부터 국어까지 상실당한 아일랜드

 아일랜드는 영어발음이며 에이레는 아일랜드 어()의 발음인데 아일랜드 섬의 5/6을 차지하고 있다. 19세기 감자 흉작의 대 기근으로 1,100만명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지고 현재는 약 인구 400만명에 OECD국가로서 유엔에 가입되어 있고 한국과 같이 IT강국이다. 현재 삶의 질에서는 세계 1위이며 1인당 명목 국민소득(GDP)47,000달러로 한 때 자국을 통치하던 영국보다 2003년부터 높아졌다. 아일랜드의 국민성은 대한민국의 국민성과 놀랄 정도로 닮았다. 한국 문화를 가까이에서 접한 외국인들이 한국을 동쪽 아시아의 아일랜드(Irish of the East,'Irish of Asia)'라는 표현으로 흔히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계급적 평등성과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며, 역사적으로 영국 등의 침략과 수탈에 시달려 자국의 오랜 전통과 혈통에 대한 자부심도 강한 편이다. 서구적 논리보다 감정적 커뮤니케이션과 해결법을 선호하고, 음주가무에 능하면서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B. 예이츠, 버나드 쇼 등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난 문인들을 배출시켰다.  

아일랜드는 영국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12세기부터 800년간 영국의 식민지였다. 그들 국민은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민족이다라고 까지 불렀다.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국어(國語)까지 상실 당했다. 특히 한국과 같이 교육열(敎育熱)이 높다는 점은 외세의 오랜 지배를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후손들에 독립정신을 잇기 위한 열망에서 나온 특징적 문화의 상징이었다. 당초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는 남부지역만으로 1919년에 독립을 선언하고 1921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영국의 기독교(성공회)를 따르는 북쪽지역은 현재 영국에 속해 있어 세계에서 한국과 같이 아직 남북으로 분리된 첫 번째 분단국가이다. 과거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위한 과격단체로 이름이 났다.

일본의 총리대신과 조선통감부 통감을 거쳐 1909년에 안중근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20대에 런던대를 이수한 자로서 당시 군사와 영국의 식민정책을 익혔다. 그는 조선(朝鮮)을 을사늑약으로 강제병합하고 나서 잔혹한 민족말살 정책을 폈으며 영국이 아일랜드에 한 것처럼 한국어까지 말살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와 너무나 흡사했다.

글은 20141월호 월간 <미술세계>에

책 내용이 그대로 실린 글(172~17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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