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북

아트월드 2016. 8. 15. 09:59



저자는 2010년에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42명의 초상화를 유화로 제작하여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평촌아트홀에서 [대한독립전]을 개최하였다.

그후  추가로 아홉분의 초상화를 그리고 이번에 828쪽의 [대한독립 50]의 책자를 올해 광복절을 기념하여 아트월드 출판사를 통하여 발간하게 되었다.

이 전자책은 아마존을 통하여 재미교포와 해외에 거주하는 교포및 후세들에게 볼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제목 : [대한독립 50]   

출판사 : 아트월드  

PDF전자책, 828 

■ 가격 : 10,000원 (특별보급가) 

지은이 : 조영규  

발간 : 2016.825일   

도서 유통사 : 교보문고, 리디북스, 인터파크, 알라딘, 반디앤루니스 네이버북, 다음북, Amazon (해외 교포를 위해 아마존에 발행예정) 등

 




Contents

[목차]

1 표지

2 속표지

3 판권

4 저자

5 Contents

7 Prologue

44 2010년 대한독립전

45 전시회 축사

46 작가노트

48 안중근의사 기념관 전시

49 평촌아트홀 전시

51 조선일보 보도

52 대한독립 50

58 <임정, 임시의정원 요원>

59 박은식

73 서재필

90 이시영

106 이동영

118 양기탁

129 이승만

172 김구

192 안창호

215 김창숙

228 신채호

242 김규식

259 조만식

267 여운형

274 조용은

294 안재홍

309 신익희

322 <독립군, 의병, 의사, 열사>

324 최익현

334 이강연

346 강우규

359 이회영

369 홍범도

384 남자현

391 김동삼

405 안중근

434 이재명

449 김좌진

465 오동진

471 박재혁

485 백정기

497 이봉창

506 이범석

516 유관순

538 윤봉길

549 박차정

566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568 (고종황제)

589 이상재

600 이준

616 만영환

631 <종교계의 독립운동가>

632 손병희

642 오세창

656 한용운

668 김마리아

681 함석헌

687 이승훈

703 <독립정신을 일깨운 문인>

705 심훈

717 이원록

726 윤동주

741 <대한독립을 도운 외국인>

743 호머 헐버트

756 손문(쑨원)

768 장개석(장째스)

776 프랭크 스코필드

795 <Epilogue>

804 참고문헌

808 한국근대외교사 일람

811 대한제국 사건 및 단체

827 아트월드 출판사 책방

828 뒤표지









 Prologue

  인류에게 있어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한다는데 있다. ” 아놀드 조지프 토인비 (1889-1975)

1919.1.18. 파리강화회의에 영국 대표로 참석한 역사학자

 

1. 1,2차 산업혁명(産業革命)은 열강의 식민지정책으로 연결

영국의 1차 산업혁명은 식민지 정책으로. 발전

 

영국의 경제학자 아놀드 토인비(1852-1983)1760-1840년에 일어난 산업혁명(産業革命 The Industrial Revolution)이라는 용어를 1884년 저서의 제목을 통하여 처음으로 사용했다. 산업혁명의 세가지 발견에서 첫째 철강(鐵鋼)18세기에 이미 해상강국이었던 영국이 거대한 해군력을 키구게 했다. 둘째 증기기관(蒸氣機關)으로 고속함정이 생기고, 증기 철도는 산업전반의 교통 및 물류유통에 획기적 진전을 낳았다. 셋째 전동기의 방적기계(紡織機械)로 짠 제품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전 세계를 향하여 진출했다. 이와 같은 3대 발명은 영국이 전 세계의 식민지(植民地)정책에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잉여 생산물의 수출은 경제발전으로 이어져 당시 세계 최대의 경제국가가 되었다. 즉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산업사회로 비약하였고 제국주의 열강이 식민지를 넓혔다.

 

그러다가 1763년 파리조약 이후에는 반대로 아메리카의 13개 식민지와 1775년의 미국 독립전쟁으로 아메리카가 식민지에서 잃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쪽을 향해 식민지를 계속이어 나갔다. 1803년에는 인도 전체를 가졌다. 결국 전 세계 인구의 1/4, 면적의 1/4을 식민지 국가로 만들었다. 1837~1901년까지 영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시대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1898년에 중국과 아편전쟁으로 홍콩을 지배하였고 100년후에야 반환했다. 영국이 참전한 1914~1918년의 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항복하므로서 전쟁이 끝났다. 영국은 승전으로 독일 대신에 요르단과 이라크를 식민지화했다. 인접한 식민지 아일랜드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의 원칙으로 1921년에 자치국으로 풀었다가 1949년에 완전 독립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영국에서 1947년에 독립했고, 종래 영연방을 이룬 나라중에 53개국이 독립국가가 되었다.

 

이와같이 서구열강들이 팽창을 가능케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250년 전부터 생긴 산업혁명이었다. 동양과 달리 서구는 벌써유럽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들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군사기술과 효율적 정치와 경제 및 관료제도의 발전을 이룩해 갔다. 이는 획기적인 과학기술의 개발과 더불어 식민지 시장의 확충을 초래했다.

 

아시아에서 일본은 1854년에 미국으로부터 굴욕적으로 개항을 당하였으나 무력적인 개화는 아니었다. 18531년간 서구의 무기 등 산업설비를 보고 결정했다. 반면에 조선도 그로부터 20년후에 일본을 위시한 열강을 통하여 무력적으로 서구문명, 이념, 제도 및 문물이 동시에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이를 수용하는데 에는 준비가 부족하여 혼란을 야기했고 결국에는 망국(亡國)으로 이어졌다. 즉 산업혁명이라는 무서운 추세를 방치하고 대처하지 못한데 기인한 것이다.

   

앨빈 토플러도 1980년에 3의 물결에서 농업혁명산업혁명정보혁명으로 예견하였듯이 2016123일 스위스의 <다보스 포럼 WEF>에서 곧 닥아올 산업사회에는 [4차 산업혁명 : Industry 4.0]이라 명명하여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물리학 등의 경계를 융합(融合)하는 기술 혁명 사회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과 독일 등의 제2차 산업혁명으로 제국주의 대두

 

19세기 후반 제2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미국과 독일 등이 20세기 전반에 철강, 자동차, 전기, 화학 등의 분야에서 영국을 앞질렀다. 따라서 영국의 세계 시장에서의 우위를 위협했다. 이로써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미국과 독일이 영국을 제치고 선진 산업 국가로서 자리 잡았다.

2차 산업혁명은 침략주의적 경향인 제국주의(帝國主義)의 대두 및 전개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내연 기관과 화학 산업에 꼭 필요한 석유와 고무, 새로운 전기 산업과 원동기의 제조에 필요한 구리 등에 대한 수요는 증대되었다. 따라서 이들 원료의 공급지에 대한 각국간의 치열한 쟁탈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완제품과 잉여 자본의 투자를 위한 시장 확보의 필요성은 이들 국가 간에 팽창주의적 대결을 촉진시켰다.

따라서 영국의 1차 산업혁명과 독일 미국 등의 제2차 산업혁명의 결과가 200년 전후로 결국 한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식민지시대로 변화될 것을 아무도 몰랐다.

 

2. 1854, 미국에 일본의 굴욕적인 강제 개항(開港)과 정한론(征韓論)

 

1854년 일본의 개항과 근대화 성공은 식민지 정책으로 연결

 

원래 쇄국(鎖國)아라는 용어는 일본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일본은 조선과 마찬가지로 서구열강의 개항 억압에 대하여 쇄국정책을 200년간 이어 왔다. 16세기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덕천 막부)시기부터 개항시에 지방영주들이 무기를 손에 넣어 막부로 향하여 대항할까 두려워 이를 막았다.

미국은 매슈 페리 해군제독으로 하여금 요코하마의 해안에 상륙하여 500명의 선원과 해병들을 이끌고 3주간 협상을 하였다. 그들은 해군력 과시와 더불어 해안에서 모형증기선, 무기, 전화기, 시계 및 농기구 등을 전시하면서 일본을 무혈로 제압하고 1854년에 굴욕적인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여 개항을 시켰다. 1858년에는 다시 미일상호통상조약 체결에 굴욕적인 치외법권(영사재판권)과 관세권 및 최혜국 대우 내용이 들어갔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이 조선과 강화도조약 등 다른 조약체결할 때에 고스란히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일본은 그 후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에 의하여 같은 내용으로 당시 열강의 공동정책인균점의 논리가 적용되었다. 이로서 개화에 눈뜬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개화파가 막부(幕府)를 타도시키고 1868년부터 일본을 부흥시킨 메이지(明治)유신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서구열강과 수교한 후에 많은 인적 자원을 미국과 유럽 등으로 유학을 보내고 정부가 지원하여 식민지 정책에 걸맞는 인맥을 양성했다. 문제는 서구의 식민정책을 익혀 조선을 위시한 아시아에 더 심하게 적용한 것이다.

 

19세기말은 열강이 식민지 정책을 위해 제국주의적인 군비경쟁을 극대화 시킨 시기였다. 증기선박의 고속함정과 무선전신의 발명은 활동무대를 전 세계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군대에서 사용되는 무연화약과 기관총 및 강철대포가 출현하여 1880~1930년의 반세기(半世紀)는 소위 전함외교(戰艦外交)로 식민지를 획득하는 황금시대가 되었다.

 

미국의 25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1901-1909재임)1895년에 해군장관일 때 대백색 함대(Great White Fleet)’를 이루었고, 다시 뉴욕주지사와 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태평양에 대하여 미국의 미래는 유럽에 면한 대서양보다 중국에 면한 태평양에 입지를 차지하는데 좌우된다.’라고 하여 아시아에 대하여 팽창적이고 개입적인 정책을 선포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는 미국 대통령 중에서 산업혁명의 꽃인 비행기와 자동차 및 잠수함을 처음으로 타 본 사람이다. 사실 19세기 전후는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열강은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산업자본이 남아도는 잉여시기로서 그 결과 제국주의식 식민정책을 구사하는 것은 필연이 되었을 것이다.

 

19세기말 이토 히로부미 등 유학파가 영국에 유학하여 익힌 식민정책과 산업혁명

 

이토 히로부미(1841-1909)1862년에 당시 세계 제일의 열강이 된 영국에 유학한 5명의 장주 5중의 한사람인데 런던대 화학과를 마쳤다. 그는 1901년에도 미국의 예일대 창립 200주년에 초청되어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소위 조선이 개항도 하기전에 친영유대를 쌓고 한일병합 이전부터 친미인맥를 형성해 나간 것이다.

그는 영국 유학시절에 해군시설과 공장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특히 식민정책에는 천천히 잠식하다가 나라까지 빼앗는 19세기의 영국의 식민정책을 익혔다. 영국은 인근 아일랜드를 800년간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아일랜드 국어(國語)까지 빼앗았는데 이는 이토가 일제 강점기에 한글을 말살한 것과 같았다.

 

그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 군사동맹을 맺고자 [영일동맹]을 위해 1902.1.30에 영국에 갔다. 이 동맹으로 일본은 중국과 조선에서의 이익을, 영국은 중국에서의 이익을 서로 인정하게 된다. 또한, 한쪽이 다른 나라와 교전할 때에는 영일 동맹국은 서로 엄정중립을 지키며, 한쪽이 2개국 이상과 교전할 때에는 동맹국이 협동 전투에 임한다.”는 전시에 대비한 포석을 미리 두었다.

이토는 서양열강에서 인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도입하면서도 피지배국에 대하여 겉으로는 국가 간의 평화 등을 강조하는 이중적인 면을 여실히 드러냈다. 안중근의사도 이토가 말한 동양평화론이 일본의 이익과 아시아 침략을 정당화 및 합리화하는 거짓 평화론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이토가 주장한 제국주의는 영토확장에 열중하는 서구 열강의 식민정책을 그대로 카피했다. 그는 초대 일본 제국의 내각총리 대신부터 4번을, 초대 조선통감부의 통감을 하면서 조선과 중국 등 아시아는 물론이고 사후에 그를 잇던 일본제국은 후원국이던 미국까지 1941년에 침략하는 야욕을 키우게 했다.

 

열강의 대열에 낀 일본의 침략 야욕과 정한론(征韓論)

19세기의 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한 열강의 전열(戰列)에는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미국, 영국, 러시아 등과 같이 일본도 근대화와 산업혁명을 후발로 성공시켜 진입했다. 그리고 전쟁을 통하여 인근국가를 식민지로 점령하는 시대였다. 사실 일본은 1854년에 미국 함대에 의하여 굴욕적인 개항을 당하고서 운좋게 근대화에 일찍 눈을 떴다. 그리고 열강을 따라가기 위하여 인력을 파견하되 서구열강의 무기산업과 공장시설을 단시일에 익히고 발전시켰다.

 

그 후 일본은 서구를 흉내 내어 인접의 조선, 중국, 필리핀, 대만, 오세아니아 군도 등 아시아 국가에 대하여 식민지 획득에 열을 올렸다. 마침내 일본과 서구열강은 인류의 양심과 정의 및 인도주의를 무시한 채 아시아의 약소국을 독자적으로 때로는 균점의 원리를 적용하면서 침략하여 양육강식의 제국주의라는 잔치마당을 벌린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시기는 보수와 개화에 대한 외부의 거친 물결이 밀어 닥쳤다. 따라서 내부적으로 당파의 국론 분열로 혼란의 시기를 겼었고 절대절명의 근대화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그러나 열강의 침공을 견뎌내기 위해 누란의 위기에도 정권실세인 흥선대원군은 개항쪽보다 봉건쇄국주의를 택했다. 조선이 근대화를 스스로 막아 외부 정보의 부족으로 오히려 허물어져 가는 청나라에 대하여 의존하는 사대주의 경향이 강해졌다. 그러나 청나라가 청일전쟁에 패하자 드디어 정치적인 종속관계는 없어졌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건국한 중화민국의 장제스 등은 일제에 같이 대항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에 도움을 주었다. 중국측의 공산당도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조선의용대는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맺었다.

 

또한 조선이 개항을 당하면서 일본제국은 조선의 쇄약해진 국력을 여실히 파악하기 시작했다. 1868년부터 1872년까지 여러 번을 일본 정부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조선을 신하(朝臣)로 여기는 내용의 국서(國書)인 서계(書契)를 보낸 것이다. 이때는 대원군 섭정(1863~1873 10년간)시기였는데 국서 반환의 문제로 일본과는 외교상의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은 즉각 이를 빌미로 정한론(征韓論)을 여지없이 주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드디어 1873년에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청일수호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의 화전(和戰)권리에 청나라는 일체 간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조선에 대하여 포석을 두었다.

 

일본은 또한 일찍 서구에 다녀온 유학파 인력을 최대한 이용하여 외교력으로 한국은 스스로 통치가 불가능한 나라로 칭하며 서구열강에 그릇된 홍보를 하면서 악선전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일본을 포함하여 주변 열강이던 미국, 러시아, 영국 등이 한반도에 대하여 자국 이익을 위한 비밀협상 등에 일본의 야욕을 인정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자주성은 무참히 유린당했다. 더욱이 대한제국은 바람직한 자주적 개화정책을 하지 못하고 대신 열강의 강요로 국권이 침해당하는 비자주적 개화정책을 하게된 것이다.

 

또한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국망(國亡)이 좌우되는 중요한 정보의 내용조차 알지 못했다. 구체적인 사례는 19048월에 조선정부에 일본인 고문을 파견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1차 한일의정서> 체결 위협 때에도 고종은 친일쪽에 서있는 미국정부를 모른채 거중 조정을 요청했으나 역시 묵살 당했다. 또한 19058월에 미국의 항구도시인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자 고종은 미국정부에게 또다시 특사를 보내되 포츠머스 회담에 조선 대표가 참가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이마저도 거부당했다.

 

3. 열강의 힘에 의한 조선과 대한제국

 

친일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일본의 관계

 

루즈벨트는 1901~1909년까지 26대 미국 대통령이었다. 이 시기는 대한제국에서 고종황제의 집권시기이었고 미국의 동 아시아 정책상 일본의 야욕에 맞추어 대한제국의 국권을 지배하도록 승인한 비극적인 시기였다. 이 시기에 아래 같은 대한제국의 존망이 걸린 큰 사건이 연이어 진행되었다.

 

1904.2.23에 한일의정서, 1905.11.17에 을사늑약, 1905.11.22에 조선통감부 설치, 1907.6.15에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 파견 1907.7.20에 고종이 헤이그 밀사파견으로 일본이 강제로 퇴위시킴, 1909.10.26에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10.8.22에 한일병합 조약으로 국권이 피탈되었다.

 

1905.7, 일의 가쓰라- 태프트 비밀협정으로 국권 상실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에 반대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었다.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관료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미국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1899~1902년 동안에 총독으로 필리핀을 지배하였다. 1905.7.29에는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H. 태프트와 일본제국의 외상인 가쓰라 다로는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통해 일본이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게 되는국권상실의 비극을 당했고 한미 양국관계와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극비(極祕)의 밀약은 1924년에 미국의 역사가인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 1882-1949)에 의하여 루즈벨트 문서연구에서 비로소 밝혀졌다. 당시 이승만의 전기작가인 로버트 올리버는 밀약이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다.”고 표현했다.

이는 1882년에 미국과 체결한 한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결정이었다. 이는 190511월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미국은 당장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되었음에 여실히 드러났다.

 

일본의 가쓰라 다로는 1870-1873년에 독일에 유학하여 국방과학을 수학했다. 1896년에 타이완 총독을 맡았고. 1898년에 이토 히로부미 내각에 육군대신으로 활동하였으며 1901, 1908, 1912년부터 3번 내각총리를 맡았다. 태프트는 1901-1904년 동안에 초대 필리핀 총독을 맡았으며 시어도어 루즈벨트 후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열강의 각축장이던 조선의 중요한 시기에 이를 헤아리지 못한 고종과 대신들은 미국 일본과의 외교에 좌우되어 망국에 이르는 헛걸음을 하게 되었다.

 

1905. 9월 포츠머스 조약 등으로 열강에 의해 사실상 일본의 속국으로 재확인

 

먼저 일본은 군사를 앞세워 조선에 <한일의정서>(1904.2)를 체결하면서 장차 조선영토 내에서 러일전쟁에 대비하여 조선이 일본편을 들도록 유도하였다. 일본은 <러일전쟁>(1904.2~1905.9)에서 육전과 해전에서 모두 이겼다. 그러나 양국에 60만 명의 사상자가 생기고 각각 국내사정으로 더 이상 전쟁을 할 수 없게 되자 일본의 외상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 1855-1911)같은 대학 동창인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강화화담을 알선해 주도록 요청하게 된다. 이때부터 조선의 운명은 포츠머스 조약이라는 열강의 외세에 의하여 결정되어 버렸다.

 

주타로는 미국에 유학하여 1877년에 하버드대학교 법학부를 나왔고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1858-1919)1880년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서로 동창이었다. 주타로는 과거 체결된 1854년 미일수호조약의 불평등조약을 해소코자 조약개정의 매달려 1911년에는 미일통상항해조약을 조인하고 관세자주권을 미국으로부터 회복시켰다. 이와 똑같은 사례로서 1876년에 강제로 맺은 한일수호조약 내용에 아래와 같은 고종이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추가로 요구한 내용은 일본으로부터 즉각 거부당했다. 또한 주타로는 러일협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병합하는데 에도 관여하여 일관된 일본의 대륙정책을 진행시켰던 인물이다.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은 과거 일본을 개항시켜 식민지의 맹주에 있었고 평소 백악관에 일본의 스모선수를 더러 초대하여 관람하는 등 친일적이었다. 또한 루즈벨트는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국은 일본을 적극 지지했다. 루즈벨트가 1900년 부통령 재직시 당시 워싱턴의 주재 독일대사인 슈테른베르크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는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일본은 러시아를 저지하게 될 것이고, 이제까지 해온 것으로 보아 일본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라는 말까지 한 적이 있었다.

 

포츠머스 비밀회담의 결과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미. . 3국과 독일까지 포함하여 4대 강국이 승인하여 버린 것이 되었다. 단지 러시아가 조건을 달았으나 이에 대하여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어떤 방법으로도 승인만 득하면 점령할 수 있는 지경까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조약으로 일본제국은 미국, 영국에 이어 러시아로부터도 대한제국을 일제가 식민지로 속국화하는 데에 대한 동의를 확실히 획득한 것이 되었다.

 

더욱이 일본이 러시아에 대하여 전쟁의 승리를 확인시킨 포츠머스 조약이 조선의 입장에서는 단지 한 달 전인 19057월에 맺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상의 재확인과정이 된 것이다. 그 내용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일본은 인정하되, 일본의 한국 점령을 미국이 인정한다. 그리고 미국·영국·일본은 실질적으로 동맹 관계.’이었다. 또한 포츠머스 강화회담 와중에도 1905812일에 한국문제가 포함된 영일동맹이 체결되었다.

이상과 같은 세가지 협상에서 일본과 미국, 러시아 및 영국 4개국은 일본의 한국지배를 교차로 확인한 것이다.

앞에서 일본이 1905년 이후 대한제국에 강요할 수 있는 힘이란 것은 위와 같이 미일의 1905년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과 1905년 미러의 포츠머스 조약 및 훨씬 이전인 1902년 영」․일의 동맹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19051117일에 을사늑약을 조선에 강요하여 외교권을 박탈했다. 루즈벨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기도 전인 118일에 다카히라 일본 공사가 방문한 자리에서 일본이 주한미국 공사관의 철수를 원하는지?’ 물었다. 그리고 미국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124일 열강 중 제일먼저 미국공사관을 조선에서 철수하고 외교를 단절하므로서 일본 외상에게 우의(友誼)의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와 달리 1907년에도 러일간에 다시 비밀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강제속국화에 대한 권익을 일본은 재차 러시아로부터 확약을 받았다. 나아가 미국은 일본의 조선침략에 적극 찬성했다.

 

1900년 이후 미국의 대한정책과 임시정부의 승인문제

중국에서 임시정부가 26년간 존립하면서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왔으나 결정적인 기회에 연합국 열강은 임정의 존재와 승인을 외면하여 좌절되었다. 한국민을 대표하는 정부가 공식승인을 받고 군사적 지원을 얻는 일은 연합국의 일원이 되는 길이었다. 또한 일본의 패전에 기여하고 독립된 정부를 세울 수 있었다. 당시 중국 국민정부, 미국, 영국 및 소련의 연합국은 임정 내재적으로 취약성과 분파분쟁 및 국내와 연락 부재 등으로 거부했다. 열강은 내외적으로는 아시아 주변의 상황을 고려하고 자국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중국은 일본으로부터 반식민지 상태에 놓여 호의적이었다. 영국은 그들이 가진 식민지에 미칠 파장을 고려하여 한국의 독립과 임정 승인에 부정적이었다. 러시아(소련)는 친미와 친중 성향의 임정이 될 경우에 대하여 거부적인 태도였다. 2차 대전이후에는 한국에 대하여 미국은 열강의 합의하에 신탁통치를 제안하고 열강의 발언을 차단하고 우월적인 발언권을 확보하려 했다. 따라서 임정 내재적인 취약보다 국제적인 요인 즉 열강들의 상이한 인식과 이해관계가 작용했다.

미국의 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1901~1909 재임)은 공화당 소속으로 평소에 미국과 직접 관계가 없는 국제문제에 대하여도 개입하여 중재자 역할을 하였다. 아시아에서 대한제국에 대하여는 국익을 위하여 친일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27대 윌리엄 태프트(1909~1913 재임) 대통령도 공화당 소속으로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상의 당사자로서 전임자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28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1913~1921 재임)은 민주당 소속으로 그의 외교 정책은 19세기까지 국제 정치를 지배하던 "힘의 균형" 원리에 대립되는 도덕주의와 이상주의를 내세웠다. 그는 학자출신으로 1918년 국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민족자결의 원칙(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은 약소국이 독립하는데 힘을 실어 주었고 이 때 대한제국은 3.1운동과 임시정부가 발족되는 동인이 되었다.

이승만 박사는 그와 프린스턴 대학교의 동창 및 사제지간으로 일제하에 주로 서방에서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다. 중국에서 발족한 임시정부도 이러한 두 사람의 친인관계를 고려하여 국무령과 대통령으로 리더 자리를 지원한 것이다.

 

미국의 태도를 보면 19448.15해방 한해 전까지 이승만 임시정부가 수없이 미국에게 임시정부를 승인토록 요구하였으나 이를 실천하자 않았다. 더구나 1941.12.7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후에 미.일간에 전쟁을 하고 있었으나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은 것은 더욱 이해되기 힘든 일이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도 미국·영국은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도 임시정부를 승인치 않았다. 이러한 이유는 미국으로서

조선의 독립운동 세력이 통일이 되지 않은 점,

아시아 지역의 다른 식민지에 영향을 줄 우려(아시아에서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프랑스의 이해관계와 직접 관련된 문제)

소련이 시베리아의 조선인 부대를 중심으로 또 다른 정부를 만들 우려가 있는 점이다. 이는 열강의 이해문제로 좌우된 것이었다.

, 미국 정부는 승인하지 않았지만 1944년에 미국 의회를 통하여 임정의 승인을 얻었다. 한편 1944년에는 소련, 1945년에 프랑스의 승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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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근대화

 

국제상황에 비추어 비현실적인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왕조가 계속되던 조선에서는 서구 산업혁명의 새로운 물결과 식민지 정책으로 차츰 열강이 몰려오는데 대하여 여러 대응방법이 나타났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왕조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에 중국을 제외하고 쇄국정책(鎖國政策)을 이어왔다. 1863년 흥선대원군(1873까지 섭정)의 집권으로 상당히 개혁적인 일을 추진하였으나 청나라를 제외하고는 쇄국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일체 서구와 접촉을 거부하고 문을 걸어 닫은 것은 국제상황에 설득력이 없었고 비현실적 노선이었다. 또한 서구열강과 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이 조선의 안전과 독립을 확보해 주겠다는 발상은 한계가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개항시에 조선의 쇄국일변도와 달리 전통적 사고에 집착하지 않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서구 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일본은 미국에게 굴욕적으로 개항당한지 불과 22년 후인 1876년에 조선에 대하여 똑같은 방식을 적용했다. 일본은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 즉 한일수호조약을 강요하게 된다. 이 시기는 흥선대원군이 1863년부터 10년의 장기 집권에서 물러난 1873년 이후로 고종때 이었지만 조선은 그 이전부터 열강으로부터 밀려오는 개화와 개항에 대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망국의 길로 이어지는 실패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역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변화를 정확히 파악하거나 적응하지 못한데 있었다. 505년의 조선왕조(1392-1897), 13년의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1910), 36년의 일제식민지(1910-1945) 시대까지 산업사회에서 앞장선 서구열강이 활개를 치고 전 세계에 걸쳐 약소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던 시대였다. 따라서 당시의 국제정치 환경은 약소국가와 민족에게 무력을 앞세운 열강으로 흥망과 존폐라는 엄청난 시련과 변화를 누었다.

 

1905년 고종은 감옥에서 이승만을 석방시켜 밀사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파견

 

이승만(1875-1965)20세인 1895.11.29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원수를 갚는 계획(춘생문 사건)이 사전 탄로나서 3개월간 일본의 체포를 피해 피신했다. 러시아 등 외세를 배격하는 만민공동회에 이승만은 가담하였으나 고종이 이를 해체하자 피신하였다.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배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나이가 많아서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어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었다., 1899년 이승만은 박영효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어 19048월 종신형을 선고받아 한성감옥에 재수감되었다.

 

이승만은 민영환의 건의로 감옥에서 석방되고 1905년에 고종의 밀사가 되어 미국으로 향했다. 당시 국무장관인 윌리엄 태프트와 접촉하고, 그의 소개장으로 뉴욕의 별장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이때는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맺어진지 불과 닷새 후이어서 이승만이 가져온 고종의 거중조정 문서에 대하여 대통령은 정식 외교창구를 통해 제출하시오라는 말로 우회적으로 회피했다.

당시 이승만은 주미한국 공사관인 김윤정를 만나 밀서의 정식 전달을 요구했으나 공사는 역할을 거절했다. 공사는 한일병합 이후에는 일본정부로부터 한일병합의 지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친일 관료직과 중추원 참의직까지 보직을 받았으며 현재 친일명부에 올라 있다.

 

근대화 추진에 조선내부의 분열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와 반대로 조선은 서구의 충격에 직면하여 대내적인 개혁에 실패했다. 국내에서는 이 기간에 열강의 힘에 영향으로 친청파,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로 국론이 분열되고 근대화가 주저 앉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엄청난 국론분열은 국력소진으로 망국의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유럽 열강의 반식민지화(半植民地化)가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을 향하여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비토당한 중요한 원인중의 하나는 임시정부 내에서도 요원들의 분열된 상황 때문이었다고 한다.

 

5.미국의 세계주의 정책과 미일의 밀월관계

 

미국이 1917년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 세계주의로 전환과 식민정책

미서전쟁(美西戰爭)18984월부터 8월까지 필리핀에서 미국과 스페인과의 전쟁이었다. 미국이 이기자 1919년 파리강화조약에 의거 필리핀을 1899년부터 인수하여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때 미국의 필리핀 통치정책은 보다 자율적으로 필리핀 경제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미국은 1916년에 필리핀은 1945년까지 독립시키기로 결의했다. 미국의 2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후임으로 윌리엄 H.태프트가 27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국방장관 시절에 미일의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1905.7.29)을 맺은 장본인이며, 1901-1904년의 4년간 미국의 필리핀 총독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904-1908년은 육군 장관이 되었다가 시어도어 후임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미국은 1861-18654년간 남북전쟁을 마치고 경제가 안정되면서 크게 부흥했다. 국부인 초대 워싱턴 대통령 이후의 대 유럽정책은 먼로주의로서 유럽 대륙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고립주의(孤立主義) 정책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帝國主義)를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이 발발한 후 독일잠수함이 당시 세계최대의 영국 여객선 루스태니어가 뉴욕을 떠나 아일랜드 해안에서 공격을 하여 승객 1,191명중 128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28대 우드로 윌슨 대통령(1913-1921 재임)1917.12.6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로 개입하면서 유럽에 대하여 먼로주의를 버리고 최초로 세계주의(世界主義)정책으로 바꾸었다. 일본도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여하여 승전후에 오세아니아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1900년대 친일정책에서 차츰 ABCD 4개국 봉쇄망으로 일본을 고립정책

 

당시 미국의 1900년대 초반 상황은 자력으로는 중국 대륙에 진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먼저 태평양의 제해권을 장악하려고 할 때 즉 일본을 이용하면서 러시아를 견제하였다. 미국은 드디어 태평양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군사력이 강성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이 볼 때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시아에서 맹주로 군림하려는 우려가 보였다. 또한 중국이 반식민상태지만 일본이 중국전체를 장악하려는 것에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아시아 태평양에서 수수방관을 할 수가 없어 새 전략을 개발했다. A(America 미국) B(Briton 영국) C(China 중국) D(Dutch 네덜란드) 4개국의 ‘ABCD 봉쇄망(ABCD Line)’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막고자 했다. 이는 전쟁물자인 석유, 고무, 철광석, 식량 등 수출금지라는 경제제재와 함께 일본을 고립시키는 전략이었다. 드디어 미국은 일본의 뒤를 봐주던 관계와 결별하고 일본에 대한 경제제재로 인해 전쟁체제가 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차츰 격리 당하자 드디어 미국을 향해 공격 없이는 아시아 태평양 국가의 식민지 장악이 불가능 하다고 보았다. 드디어 일본은 1941년에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미국을 향하여 전쟁을 감행했다.

결국 미국은 2차 대전에서 승리하여 오늘날과 같이 일본과 한반도 38도선 이남지역, 필리핀, 중국 땅 바로 앞의 대만에 까지 미군을 주둔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1900년대 있었던 미국의 일본에 대한 지원과 친일정책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보 전진(二步 前進)을 위한 일보 후퇴(一步 後退)로 분석되고 있다.

 

6. 110여년 전과 오늘의 국제환경은 유사(類似)

 

오늘날 한반도 주위와 110여 년 전의 국제환경 비교

 

앞에서와 같이 과거 1905년 을사조약부터 110년이 지난 오늘날의 동 아시아 역사를 살피면 상황은 거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2차 대전 후 1946년에 평화헌법을 제정한 이래 70년 만에 먼저 공격받지 않는 한 무력행사를 않는다.’는 전수방위(專守防衛)원칙을 깨고 있다. 드디어 국제평화지원법안을 추진하여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아베총리가 집요하게 추진하는 헌법9조 개정의 목적은 전후체제로부터 벗어나고최근 중국과 거론되는 센카쿠 열도문제에서 미일 안보 공약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번 안보법 성립에 대하여 일본의 민족단체들은 1905,7,28에 도쿄에서 미국과 극비로 맺은 2의 가쓰라-태프트 밀약(Taft-Katsura Secret Agreement)’으로 간주하고, 동북아가 한국미국일본 대() 북한중국러시아의 과거 냉전체제로 환원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재무장이란 군사대국화가 되는 문제로서 실로 우려되는 일이다. 미국과 일본의 안보동맹 강화는 중국과의 관계악화로 이어지고 따라서 우리 정부의 운신 폭이 좁아진다. 이는 향후 동북아시아의 안정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최근 독도 문제에서도 자체적으로 역사 교육을 강화하고 사실적으로 영토침략에 준하는 망발을 정치권에서 연거푸 하고 있다. 중국도 한.중간에 증대된 무역거래 비중을 의식하여 종전에 없던 심한 발언을 일삼고 있으며 군사문제에 까지 내정간섭의 압박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은 한미동맹으로 북한의 무력침공에 대비키 위한 최신 무력설비로 증강하는데 반대의사를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아시아의 6자회담 당사자중 한..3국과 중국을 포함하여 UN에서 대북한 경제 제재의 합의에 대하여 차츰 러시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와같이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의 국방 및 경제분야의 경쟁은 과거와 다름없으며 다자간 상호 협상이나 비밀협상의 우려에 대하여 서로간에 불신의 시선을 지니고 있게 되었다.

 

7. 일제 만행으로 새로 밝혀진 진실

 

아래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멸망과 회복에 영향을 준 중요한 사건을 적어본다. 공통적인 사항은 서구의 산업혁명이라는 변화는 약소 식민지가 필연적으로 열강에 의해서 강점되는 시기였다. 근대화의 과정은 자주적 근대화와 열강에 의한 피동적인 근대화에서 전자의 과정을 추진하지 않은 이상 후자의 과정으로 식민지배를 피하기 어려웠다. 일제는 강점기간에 조선의 역사관과 국민의 인식을 퇴행적으로 변화시키도록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심어 나갔다. 혹자는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식민사관과 식민지 근대화론(殖民地近代化論) 및 민족사관(民族史觀)의 해석에서 다른 방향으로 왜곡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역사인식은 새로운 사실과 증거가 밝혀질 때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므로 시대적으로 항상 불변일 수는 없다.

 

고종의 독살

일제는 고종황제의 강제퇴위를 강요했고 여태까지 의문의 죽음도 함구한 채 독살설로만 미궁에 남았다. 그러나 2009년에 일제의 고위관리가 독살(毒殺) 지시를 한 사실이 구라토미 유자부로 (倉富勇三郞·1853~1948)의 일기 문서가 발견되어 진실이 드디어 판명되었다. 일기를 쓴 유자부로는 1919년 당시 일본 궁내성(宮內省)의 제실(帝室) 회계심사국 장관이었다.

독살 배후에는 데라우치와 하세가와 두 총독이 있었다. 이유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파견하여 독립을 꾀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일보 2009.2.29.]

 

유관순열사의 타살

유관순 열사의 죽음도 여태까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중의 고문으로 짐작되었으나 서류상 분명히 타살(打殺)로 판명되었다. 이는 20036월 일본 도쿄(東京) 주일 한국대사관 서고에서 발견된 ‘3·1운동시 피살자 명부로 밝혀졌다.

[한국메일뉴스 2013.11]

 

뮈텔주교 일기의 105인 사건

 

당시 프랑스 천주교 외방전교회 소속의 뮈텔 주교(1854-1933)는 일제강점기에 일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고 항일 민족운동과는 거리를 둔 입장을 보였다. 그는 '교민조약'(1899)'교민화의협정'(1901), '선교조약'(1904) 등을 통해 신앙과 선교 자유를 법적으로 인정받고 정치와 종교를 떼어놓는 정교분리(政敎分離)에 합의했지만 이를 내세워 향촌사회와 대립하고 때로 치외법권의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임명 기간(1890-1933)43년간에 걸쳐 프랑스어로 일기를 기록했다.

일기에 나타났듯이 1905년의 <105인 사건>도 비밀결사대인 신민회의 내용을 안명근(안중근의 동생)이 빌렘신부에게 전한 것을 다시 뮈텔주교로 전해지고, 다시 일제의 헌병대장 아카이시(明石元二郞) 소장에게 제보(提報)하였음이 확인된 것이다. 이 제보로 명동성당은 소송에서 패한 진입로 문제도 해결보았다고 적고 있다. (1911.1.11.자 일기) [가톨릭프레스 2015.11.2.]

앞에서와 같이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도 19년이 지나 밝혀졌다. 또한 많은 열강의 비밀협상과 막후의 거래가 세월이 갈수록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뮈텔주교가 본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고종에 대한 굴절된 시각

 

1998년에 한국천주교에서 번역 발간한 <뮈텔 주교의 43년간 프랑스어판 일기>에 따르면 그는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반포되기 이미 3일 전에 병합 정보를 접했다고 하였다. 또한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에 대한 시각이 적혀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일제에 협조하는 주교 뿐만 아니라 당시 친일의 미국과 다른 열강들이 지닌 시각이었다. 이는 일제가 조선제국에 나와 있는 외국의 외교사절과 열강들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한 편향적인 오도(誤導)와 역사굴절(歷史屈折) 행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고종에 대한 무능탓으로 한일병합이 이루어 졌다고 적고 있다. 또한 안중근의사의 의거를 살인행위와 증오를 일으키는 일로 보았다.

 

<안중근의사의 의거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19091026일 드망즈 신부가, 한 한국인에 의해 이토(伊藤) 공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장안에 나돌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러 저녁 5시경에 왔다. 이토 공의 이번 암살은 공공의 불행으로 증오(憎惡)를 일으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모습은 일본인들이나 몇몇 친일파 한국인들에게서만 보일 뿐이고 일반 민중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뿐더러 그런 감정이 아주 전반적이다

 

뮈텔 주교 일기4413p.

 

<한일병합과 고종에 대한 시각 >

1910826일 반 비르브리트 씨 덕분에 한국이 합병되고 그 조약이 29일에 공포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협상에서 전 황제와 현 황제[고종과 순종]가 얼마나 무기력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천주님은 이 슬픈 상황에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를!

 

뮈텔 주교 일기4482p.

한일병합 (1910.8.29)

 

<중간 생략>

12. 2010[대한독립전]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 기념, 대한독립운동가 42인 초상화 특별전 축사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안 의사를 비롯한 대한독립 운동가 40여명의 인물을 그린 초상화 특별전을 개최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금까지 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심포지엄과 연극, 영화, 사진 및 유묵전 등 많은 행사가 있었지만 이들의 실제 인물을 대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그린 초상화 전시는 흔치 않았습니다. 이제 안중근의사 새 기념관 개관기념으로 독립운동가 초상화 특별전을 마련해 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안중근의사는 20세기가 낳은 동양평화의 위인으로서 교육 사업을 통한 국민계몽운동을 펼치고 의병활동까지 하셨던 애국선열입니다. 구한말 서세동점 시기에 태어나 피압박 민족의 자주독립과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구현을 위해 역동적인 삶을 산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교육자이며 평화사상가로 그리고 군인으로서 당시대가 요구하는 민족적 과제 앞에 홀연히 온몸을 던졌던 민족정기의 화신입니다.

비록 안중근의사는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불꽃처럼 살다가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지만 이미 100년 전에 주장한 동양평화론은 현재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각 지역의 국가경제공동체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수많은 애국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평화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산 교육장인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또한 안양의 평촌아트홀에서 조영규 화가의 작품으로 대한독립 운동가 초상화 특별 개인전을 갖는 것은 한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특별전 개최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준 국가보훈처와 국가보훈문화예술협회 및 행사를 주관하신 서양화가 조영규님을 비롯한 관계자 모든 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10. 11.19 안중근의사 숭모회 이사장 안응모

 

 

13. 2010[대한독립전] 작가노트

 

올해 2010년은 [안중근(安重根)의사 순국(殉國)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그러나 [국권찬탈 즉 한일강제병합(韓日强制倂合) 100]을 맞는 치욕의 해이기도 하여 여러 의미를 새삼 되새겨 나가야 합니다. 각계에서 여러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미술전람회로서 지난 10.26일 안중근의사 의거일에 맞추어 남산에 신축. 개관된 <안중근의사 기념관> 및 안양의 평촌아트홀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장한 모습을 유화작품으로 재현한 [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기념, 대한독립전]으로 관람객들에게 선 보이게 되어 기쁜 마음입니다. 

 

이번의 작품에는 안중근(安重根),윤봉길(尹奉吉),김좌진(金佐鎭),강우규(姜宇奎),이재명(李在明),홍범도(洪範圖),유관순(柳寬順),이봉창(李奉昌),박재혁(朴載赫)등의 의열(義烈)과 과거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에서 광복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승만(李承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조소앙(趙素昻),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이회영(李會榮) 등의 지도자들과 남자현(南慈賢),김마리아(金瑪利亞),안중근의사의 모친인 조마리아(趙瑪利亞) 여사 등 여성(女性) 들과 헐버트, 스코필드, 장개석(蔣介石), 손문(孫文) 등 외국인(外國人)도 포함된 40여명이며 이분 중에는 처음으로 유화작품으로 그려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강하고 순수한 민족정기를 지닌 분들의 충일한 정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문헌을 접해보면 누구나 그들의 활동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귀한지를 알게 됩니다. 본인은 첫 개인전부터 서른 명의 초상화를 전시하고 나서 매번 초상화와 풍경화 작품을 함께한 초풍전<肖風展>을 개최하였는데 특히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작품 활동은 여러 가지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전시를 위하여 작년부터 관련 자료와 문헌수집을 위하여 각지의 기념관 현장을 찾아보았고 관계자를 면담하였으며 특히 제작에 전념하면서 이 분들의 숭고한 활동과 헌신에 대하여 여러 문헌을 통해 새삼 알게 되어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실 독립운동가의 모습은 몇 군데 기념관을 제외하고 거의 흑백사진 등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에 대하여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여 항상 우리 곁에 바로 곁에 살아있는 것처럼 접하게 된다면 우리들 인간의 삶 자체도 더욱 고양될 것이며 오늘날 다함께 가치 있는 삶을 향해 나갈 교훈이 될 것 같습니다.

 

초상화는 사실 얼굴모습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함께 보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강하고 순수한 민족정기를 지닌 분들의 충일한 정신이나마 관람객에게 조금이라도 보여 줄 수 있다면 오래토록 이어져 온 작업에 의미 있는 결실로 다가설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번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11.19일부터 11.28일까지 10일간 <안중근의사 순국100주년 기념, 대한독립전> 특별 전시 이후에도 이어서 안양의 평촌(坪村)아트홀에서도 12.1일부터 12.7일까지 7일간 <안중근의사 순국100주년 기념, 대한독립>招待個人展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리고 작품 일부는 11.15일부터 11.17일까지 3일간 國會 議員會館(1층 로비홀)에서 국가보훈문화예술협회 주관으로 열리는 <독립운동유공자>에 참여하여 團體展을 가질 예정입니다. 

 

그동안 이번 전시를 위하여 전시장 제공과 전시추진, 자료제공 및 후원으로 적극 협조하여 주신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안중근의사 숭모회, 안중근의사 기념관 건립위원회, 독립기념관, 백범 김구기념관, 전쟁기념관, 우당 이회영기념관, 국가보훈처, 국가보훈문화예술협회, 안양시청 및 안양문화예술재단 그리고 작품 활동과 제작에 격려해 주신 여러 기관 및 여러분들에 진심으로 감사를 올립니다.

2010.10월 조영화실에서 서양화가 조영규

 



- 첨부파일

01 대한독립운동가 ~서론.pdf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리고 공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