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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월드 2019. 11. 9. 12:56

 

 

[모네와 114명의 지베르니아이츠] 2015년 출간, PDF, 887쪽

교보문고 등에서 판매중

 

○ 인상주의의 발아는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

 

서양미술의 혁명인 프랑스의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 이루어낸 결과라고 보고 있다. 19세기 중반이후 서구 산업사회는 크게 격변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는 유럽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추세에 맞추어 발아되었다. 종래 아카데믹한 초상화와 인물화 위주의 인문중심(人文中心)에서 풍경화의 관심과 흥미로 바뀌는 자연중심(自然中心)의 흐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사회가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원초적인 희구(希求)와 욕망(慾望)에 따라 미술의 흐름도 역전(逆轉)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서구미술의 화풍은 생성과 소멸이 많았다. 그러나 인상주의는 1874년 탄생된 이후 현재까지 145년이 흘러도 “불멸(不滅)의 화파”로 계속되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인상주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기법이 아니다. “인상” 즉 짧은 순간에 시각적으로 느낀 사물을 표현하되 빛의 신비로 가득 채우는 화풍이다. 인상주의의 특징은 주제의 다양성(多樣性)과 화가의 자유스런 개별성(個別性) 및 표현방법의 무한성(無限性)을 들고 있다. 즉 붓으로 자기 개성을 발휘하여 스트로크(stroke)로서 독특한 경지 즉 변화 무한성(變化無限性)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세 가지를 매트릭스로 조합할 때 상상하지 못할 무한한 작품들과 또한 서로 다르면서 독창적인 작품들이 창조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이유로 인상주의는 불멸의 화풍이 된다.
 
모네는 1874년 제1회 인상주의전에 미완성 작품과 같은 [인상-해돋이]란 그림을 출품했다. 파리의 유명한 에콜 데 보자르 등 미술대학 교수와 미술 비평가 및 프랑스 정부 측은 새로운 인상주의의 혁명적 출현과 기성 화단을 부정하는 데에 반기(反旗)를 들었다. 전시 초기에는 악평과 조롱을 일삼았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이는 틀린 말이 되었다. 한마디로 결론을 말한다면, 이러한 새로운 예술적 흐름에 대한 승자(勝者)와 패자(敗者)는 1874년부터 1886년까지 인상파 전시가 개최된 12년 동안에 서서히 갈라져 버렸다. 먼저, 미술의 흐름을 가장 민감하게 파악했던 이름난 비평가들은 결국 굴욕적인 패자가 되었고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 대신 당시 인상파의 장래가 극도로 불안했지만 서구미술의 추세를 감각적으로 인식했던 모네 등의 초기 인상파 화가들과 이를 따른 지베르니아이츠는 고난 끝에 값진 영광의 승자가 되었다.

 

드디어 모네는 인상파 전시의 선구자(Forerunner)와 주도가로 인정을 받았다. 1886년에 제8회 인상주의 전시회가 마지막 열렸고 12년 만에 드디어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해에 결국 해체되어 버렸다. 당시 파리에는 인상파에 대한 이론체계도 정립되지 않았다. 또한 미술학교도 없었다. 모네는 제8회 전시회에 불참하고 나이 43세 때인 1883년에 파리를 떠나 80km 떨어진 지베르니(Giverny)에 정착하여 43년간 지낸뒤 평생소원으로 전원의 화실에서 생을 마쳤다. 모네는 평생동안 8,000점의 작품을 남겼다. 모네의 8,000개 작품 중 1,000점은 프랑스의 화상인 뒤랑 뤼엘이 주로 미국에 판매하였다.

 

즉 인상파 작품을 매입할까 하고 망설였던 화상(畵商)들 중에 위험한 투기(投機)였지만 예지(叡智)와 확신을 가지고 작품을 매입했던 뒤랑 뤼엘 등은 미국을 위시한 전 세계 미술시장을 휩쓸었다. 그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이 많은 모네의 작품을 소장한 이유는 개인소장자들의 기증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미국의 인상파 화가인 존 싱어 서전트나 메리 카셋 등의 작품은 소더비 등의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모네와 지베르니아이츠의 16권의 전자책 일부

-아트월드 출판사를 통하여 조영규 작가는 『미국의 인상주의 미술』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여 16권을 발간하였다.

 

○ 모네와 지베르니의 화가들 (지베르니아이츠 Givernyites라고 부름)

 

모네의 정착 2년후부터 지베르니는 조용한 곳이 아니었다. 1885년부터 파리의 미국화가 등 전세계 18개국에서 지베르니를 찾아 30년동안 350명의 화가들이 체재했다. 거의 대부분인 300명은 미국인들이었다. 이런 사실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가는 일생동안 수많은 화가와 작품으로부터 표현키 어려운 뉘앙스(Nuance)를 느낀다. 또한 화가는 수많은 대상(Motif)으로부터 예민하게 영감과 감동을 터득하는 체질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화가들은 끊임없이 채우고자 하는 창작의 욕구로부터 많은 여행과 견문은 물론이고 여러 작품으로부터 신선한 자극을 받고자 원했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이야 말로 모네를 찾아간 지베르니아이츠들의 가장 큰 동인(動因)이었다.


1887년부터 마담 버디 (Madame Burdy)가 운영했던 버디 여인숙은 버디호텔로 변하고 숙소와 더불어 식당과 스튜디오가 마련되고 카페가 열렸다. 1890년경에는 80명 정도로 모이게 되자 개별적으로 숙소를 매입하거나 세(貰)내어 예술가 공동체Art Colony 즉 화가마을로 차츰 변했다. 이들은 ‘지베르니의 사람들’과 ‘지베르니의 신봉자(信奉者)’들이 되어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로 불리었다. 이들은 생애를 걸고 인상파 원형(原型)의 작품을 실험하고 창조해 나간 사람들이었다. 지베르니는 새로운 미술의 모태(母胎)와 발원지(發源地)가 되었다. 중심에는 모네와 지베르니아이츠가 있었다. 그러나 개성과 기법이 다른 화가들은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 사실 지베르니는 미국의 화가마을(Art Colony) 이 되다

 

특히 미국은 350명 중에서 85%에 달하는 300명의 화가 등이 방문하여 지베르니는 사실 미국의 예술가 공동체 (Art Colony) 즉 화가마을로 변해 버렸다. 이는 새로운 미술의 흐름에 대하여 유럽보다 미국에서 오히려 개혁적이면서 수용(受容)이 빨랐던 원인이었다.
지베르니에 350명이 방문한 사실의 증거는 지베르니에서 마담 버디 (Madame Burdy)가 운영했던 버디호텔의 ‘방명록(芳名錄)’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또한 여러 화가들이 보낸 편지나 회고록 및 여관비 대신에 맡긴 그림작품 등 여러 형태의 자료에 자세한 상황이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그들이 지베르니에서 그린 많은 작품(作品)에서 인상주의 본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 미국→ 파리 → 지베르니 → 미국으로 귀국한 인상주의 화가들

 

미국은 1865년에 남북전쟁이 끝나 유럽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부강해 졌다. 19세기 중반에 우세했던 허드슨 강파(派)는 보수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미국 미술가들은 청운의 꿈을 품고 유럽 땅을 밟았다. 예술의 수도인 파리에서 아카데미 교육을 받고 고대 및 르네상스 걸작들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접하고자 대거 진출했다. 그들은 가장 우수한 미국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한 이후에 파리로 와서 유명한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나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전통적인 아카데믹 스타일을 배우던 화가들이었다. 또한 파리 살롱(Paris Salon)에 상을 받은 쟁쟁한 화가들로서 자국으로 바로 귀국해도 공부와 수상경력으로 확실히 장래가 보장받은 화가들이었다.


이들은 1874년 이후의 인상파 전시를 보고 난 뒤 모네의 뛰어난 작품 가치와 인상파의 미래를 초기부터 잘 간파했던 것이다. 그후에 그들은 지베르니로 찾아들어 모네와 가까이에서 새로운 인상파의 실체와 원형을 알고자 했다. 또한 모네의 그림을 보고 자신들의 먼 장래에 이상적(理想的)인 세계를 바꾸어 보았을 것이다. 당시 혁신적인 인상주의가 화풍은 유럽보다 미국 쪽에서 인기가 높았다. 또한 미국은 당시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인상주의를 유럽보다 쉽게 받아들인 점이 있었다. 1880년대 전후에 유럽의 인상주의 작품들이 미국에 처음으로 전시되기 시작하자 진보적인 미국 일반시민들의 호응이 대단하였기 때문이다.


모네는 제자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모네는 그들을 결코 초청(招請)하지 않았다. 단지 멘토가 되어 지베르니를 찾아온 화가들과 야외에서 스스럼없이 같이 작업을 하였고 그곳의 카페에도 합석했다. 또한 그의 저택에 이들을 초대하여 미술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모네의 의붓 딸은 미국 화가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  
114명의 지베르니아이츠의 작품을 본다면 서로 카피하듯이 모방한 화가는 없었다. 단지 모네의 작품을 통하여 크게 영감과 감명을 받거나 작품의 뉘앙스에 영향을 입었다.

 

 

 

미국의 인상주의 거장화가 [존 싱어 서전트]
PDF 파일, 전자책, 585쪽


○ 인상주의의 출발점(Starting Point)이 되었던 지베르니

 

이와 같이 145년 전(前) 인상주의의 출발점(Starting Point)이 되었던 지베르니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꾸준히 활동한 지베르니아이츠의 작품과 상상하지 못할 여러 가지 애환(哀歡)이 담긴 생활이야 말로 우리들이 값지게 살펴 볼 가치가 있는 대상이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이야 말로 아직도 더러 미궁(迷宮)에 빠진 듯한 인상주의(?) 라는 질문에 인상주의의 원형(原型)을 알고 싶어 하는 모두의 욕구를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지베르니아이츠 중에 오래동안 생활한 화가들 들자면, 시어도어 버틀러는 모네의 사위이면서 41년, 멕모니스는 26년, 메리 페어차일드(멕모니스의 부인)는 20년, 루이스 리츠먼은 19년, 윌리엄 H. 하트는 16년, 리처드 밀러는 15년, 프레드릭 프리세크는 14년, 가이 로즈는 13년, 에텔 로즈(가이 로즈의 부인)는 12년, 릴라 케벗 페리(남편과 자녀와 함께 생활)는 11년, 로턴 파크는 12년, 폴 콩클링은 10년을 생활했다. 이들은 매년 주로 봄. 여름철 전후에 지베르니에서 작업을 하고나서 미국에 잠시 귀국하여 전시를 통하여 작품판매를 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114명의 지베르니아이츠 중에 여류화가들이 33명으로 약 29%를 차지하고 있다. 19세기는 서구에서 여성의 미술계 진출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파리의 미술학교 입학에서도 에콜 데 보자르는 1879년까지는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누드수업도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메리 카셋 다음의 ‘제2의 미국 여류화가’인 릴라 C. 페리처럼 1885년 미국 화가들이 최초로 지베르니를 방문한 시기인 37세에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자국에서 독학(獨學)으로 출발한 사례는 참으로 귀감(龜鑑)이 되었다.

 

○ 미국에서 르네상스를 이룬 인상주의

 

그러나 30년이 지난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프랑스가 전쟁의 중심지가 되자 남았던 화가들은 거의 고국으로 되돌아갔다. 모네는 그들의 멘토가 되거나 관심사를 얘기하고 때로는 시어도어 로빈슨과 같은 귀국한 미국 화가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와 같이 찾아온 화가들을 동료로서 외광에서 같이 그림을 그렸고 대화를 나누었다. 즉 젊은 외국화가들은 모네가 한동안 희구하던 명예를 가진 이들이 많았다. 즉 모네는 작품을 팔면서 생활을 하기 위하여 파리살롱에 출품하였으나 겨우 몇 번을 통과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외국의 청장년 화가들은 파리의 유명 미술학교를 거쳤고 특히 파리살롱에서 상을 받고 교수로 픽업된 사람도 있었다. 더구나 만국박람회가 파리에서 여러 번 개최될 때에도 명예스런 상을 받은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서로가 인상파를 실험하면서 작품 제작에 대화를 나누고 각기 다른 기법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1914년에 프랑스가 1차 세계대전의 중심지가 되자 부득이 귀국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지베르니와 같은 화가마을을 대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조성하고 미술학교나 스튜디오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1914년에 프랑스가 1차 세계대전의 중심지가 되자 부득이 귀국하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에서 지베르니와 같은 화가마을을 대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조성하고 미술학교나 스튜디오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인상파 거장인 윌리엄 메릿 체이스(William Merritt Chase)는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20년 동안 인상파를 가르치면서 4천명의 제자를 길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명실 공히 인상파는 파리에서 발아되었으나 미국에서 번성한 화파가 되었다. 마치 인도에서 발아된 불교가 동남아시아에서 번성한 것과 같은 것이다.

 

미국은 위의 미술학교 외에도 전국에 화가마을이 생겼다. 즉 올드라임(Old Lyme) 등 여러 곳의 화가마을과 더불어 화가들이 세운 계절학교가 많았다. 즉 체이스가 세운 시네코크 여름학교에서는 체이스 뿐 아니라 하삼과 메트캐프 등의 인상파 거장들도 많은 제자를 길렀다. 또한 미국의 중부와 서부지역의 시카고 필라델피아 지역 등에서도 화가마을이 생기고 유럽파 출신의 화가들이 인상파를 전파하고 제자를 길렀다.

 

미국에서 후진의 양성의 현장으로 뉴욕 등의 동북부 도시를 중심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에 프랑스의 지베르니라고 일컫는 올드 라임 (Old Lyme) 등의 화가마을이 미국전역에 생겼다. 뉴욕 주의 시네코크, 뉴욕 케잎코드, 글루스터, 프로빈스 타운, 브라운 지방 등이다

 

 

 

[모네와 가이 로즈 Guy Rose] PDF 파일, 전자책 ,263쪽


인상파 거장인 윌리엄 메릿 체이스(William Merritt Chase)는 뉴욕의 미술학교에서 20년 동안 인상파를 가르치면서 4천명의 제자를 길렀다고 한다. 이와 같이 명실 공히 인상파는 파리에서 발아되었으나 미국에서 번성한 화파가 되었다. 마치 인도에서 발아된 불교가 동남아시아에서 번성한 것과 같은 것이다.

 

○ 인상주의에서 파생된 화풍들

 

인상주의가 등장한 이후에 이로부터 드디어 야수파, 표현주의, 추상화, 입체파 및 상징주의 등의 여러 모던 아트Modern Art가 연이어 파생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작품의 가치(價値)와 심미적(審美的)인 아름다움을 보는 안목을 가진 일반 관람자(一般 觀覽者)들이 가장 큰 승리자들이었다. 작품 구매의 수요(需要)가 없었다면 어떻게 화가들의 창작행위인 공급(供給)이 140년 동안 꾸준히 이어졌겠는가? 이런 이유로 인상주의는 초기에 아방가르드 즉 전위예술(前衛藝術)로 간주되어 불안하고 금방 사라질 듯 한 운명이었지만 이내 서구미술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발전을 이루었다.


추상미술의 아버지와 선구자인 칸딘스키는 1895년 모스크바의 전시회에서 모네의 <건초 더미> 연작을 보고 충격과 동시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바로 독일 뮌헨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고 실토했다. 그는 모네의 작품에서 형태를 뚜렷하게 나타내지 않아도 회화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John Singer Sargent: A collection of 748 paintings

www.youtube.com/watch?v=gwfDQT9D7r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