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상주의 미술 도서

아트월드 2015. 7. 8. 10:17


프롤로그


모네와 가이 로즈

프롤로그

 

1874, 인상파의 공식적인 전시

프랑스의 인상파는 1874년에 공식적으로 전시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인상파의 공식적 교육이라는 체제가 확립되지 않은 채 이었다. 인상파가 미국에 전파되기는 불과 4년 후인 1878년에 뉴욕과 보스턴에 등장하였다. 그리고 1886년에는 본격적으로 파리의 거상(巨商) 뒤랑 뤼엘이 뉴욕에서 1회 프랑스 인상파전을 개최하여 모네, 마네,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등의 작품 300점을 대거 전시한 이후에 크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신진 화가들은 남북전쟁이 종료된 1865년 이후부터 국내가 안정되자 유럽으로 대거 진출하여 당시 서구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와 뮌헨 등에서 아카데믹 리얼리즘 스타일을 교육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화가들은 인상파가 등장하자 혼돈속에서도 차츰 인상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전후에 서구 산업사회는 인류역사상 가장 유래가 없는 격변이 따랐다. 산업혁명으로 봉건사회가 해체되고 자유 농민층이 생겼다. 또한 도시로 인구가 대거 유입되고 중산층의 시민계급이 형성되었다. 1800년대 전후에 영국에 산업혁명이 전개되고,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1830년에 영국에서 철도가 건설되고 1851년과 1855년에 세계 만국박람회가 영국에 이어 파리에서 최초로 개최되었다. 드디어 미술계에서도 혁명적인 인상파 화풍이 등장하고 유럽을 진동시켰다.

 

인상파는 모든 이에게 충격과 더불어 차츰 감동을 주기 시작했다. 이 운동을 주도하던 모네의 화풍과 그의 정착지인 지베르니는 1880년대부터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산업사회의 일대 변화는 보수(保守)에 대한 향수와 함께 혁신(革新)에 대한 모험이 상충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었다. 당시 인상파 미술은 전위예술(前衛藝術) 즉 아방가르드로 간주되었고 거센 반대와 핍박은 참혹했다. 이와 같이 산업혁명이 기적을 이루고 과학기술이 마술과 같은 사물을 만들어 내자 모네와 같은 신진의 인상파 예술가들은 경이스러운 현대를 꿈꾸면서 새로운 표현방법을 모색하다가 드디어 인상주의(Impressionism)를 탄생시켰다.

 

1883년부터~43년간, 모네가 정착한 지베르니 (Giverny)

파리에서 인상파는 1874년부터 1888년까지 여덟 번의 전시가 열렸다. 당시 파리와 유럽에는 인상파를 가르치는 어떠한 교육기관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으로 인근에 센느 강이 흐르고 엡트 강과 뤼 강이라는 지류가 있었다. 모네가 1883년에 정착할 시기는 불과 300명의 농부가 살고 있는 시골마을이었다. 전 세계 화가 및 애호가들은 지베르니에 정착한 모네를 주목하였다. 1885년부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1914년까지 30년 동안 전 세계 18개국에서 350명이 방문하였다. 이들 중에 미국 화가들이 300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사실상 미국의 화가마을이 되었다. 시어도어 버틀러는 미국 화가이면서 모네의 의붓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어 모네와 미국 화가들을 중계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한 화가들은 모네와 인접하여 정착하고 그가 추구하던 정통적(正統的)인 인상주의에 영감을 받거나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화가와 예술가들은 모네의 신봉자(信奉者) 및 추종자라는 의미로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라 불리게 되었다.

19141차 세계 대전에 프랑스가 전쟁의 중심지가 되자 미국 화가들은 모국으로 귀국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그들은 대도시 인근의 야외 페인팅을 하기 좋은 시골에 프랑스의 지베르니와 같은 인상주의의 화가마을을 건설해 나갔다. 뉴욕 인근의 동부지역(東部地域)에는 차일드 하삼 등 The Ten(10인 화가회)의 멤버가 주동이 되어 올드라임(Old Lyme), 코스콥, 뉴호프, 브라운 지방, 시네코크 마을, 글로스터, 프로빈스 타운, 몬헤간 섬, 케잎코드 타운 및 로드 아일랜드 등을 조성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등의 서부지역(西部地域)에는 가이 로즈가 중심이 되어 라구나 비치, 몬트레이, 카르멜, 산타바바라, 패서디나 및 뉴포트 등의 화가마을을 건설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유럽파 화가들은 각 지역의 정규 미술학교나 그들의 출신 모교에서 인상파를 가르치고 후진을 양성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인상파의 국제적인 부흥을 가져왔다. 일례로 인상파 거장인 윌리엄 메릿 체이스는 1875년에 설립된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교사를 하면서 20년 동안 4,000명의 제자를 길렀다. 이와 같이 유럽파의 화가들이 주도하여 미국의 미술 교육기관을 활성화시켰다. 또한 화가마을이 확산된 것은 오늘날 미국이 모네가 추구한 정통적인 인상주의가 지속적인 발전을 하도록 하였다. 제자의 양성과 화가마을의 확산은 미국의 인상파를 불멸(不滅)의 화파(畵派)’로 키우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리고 미국의 인상주의는 현대미술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지속적인 르네상스(Renaissance)를 이루게 되었다.

 

1888, 파리의 줄리앙 아카데미

로즈는 20세기 전후의 미국 인상주의 화가 중에서 서부지역 즉 캘리포니아 주 출신의 화가들을 대표하면서 정점(頂点)에 위치한 거장이 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미술교육을 마치고 재주 있고 청운의 꿈을 품은 청년 화가들처럼 파리로 향했다. 나이 21세인 1888년에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3년을 다녔다. 그 곳의 스승은 아카데믹 리얼리즘을 추구하며 인물화와 초상화를 가르치던 거장화가인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1825~1905), 장 조제프 벤자맹 콩스탕(1845~1902), 쥘 조제프 르페브르(1836~1911) 및 앙리 뤼시앙 두세(1856~1895)이었다. 로즈는 이 곳 미술학교에서 수여하는 모든 미술상(美術賞)을 받은 특출하게 뛰어난 재능의 화가였다.

 

그가 파리에서 생활을 개시하던 때는 인상파 전시가 1874년부터 1886년까지 12년 동안 여덟 번의 전시가 끝난 직후로 인상파는 이제 일반 대중에게 널리 소개된 시기였다. 그러나 마지막 전시가 끝나자 프랑스 인상파 그룹은 구심점을 잃고 각기 다른 길을 가면서 해체되었다. 이때 인상파를 주도하던 모네는 1882년의 제7회 전시를 마치고 나서 1883년에 파리를 떠나 지베르니에 정착해 버렸다. 로즈는 당시 최고의 전통적인 아카데믹 교육을 받았지만 이러한 회화 스타일과 전혀 다른 인상파의 회화 스타일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곧 일생의 진로와 방향을 인상주의로 채택했다.

 

1890년부터 네 차례 13년간~지베르니에서 생활

로즈가 지베르니에서 네 번에 걸쳐 13년간 생활했다. 그는 줄리앙 아카데미를 마치고 바로 귀국하지 않고 23살인 1890년에 모네가 추구한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고자 지베르니를 향했다. 이 시기는 지베르니가 1885년부터 미국화가 등이 방문하여 점차 국제적인 화가마을(Art Colony : 예술 공동체)로 변하고 있었다. 로즈가 지베르니에 도착할 시점에 생활한 미국 화가들은 시어도어 로빈슨, 시어도어 웬델, 제임스 캐롤 베익위스, 존 레슬리 브렉, 도슨 도슨 왓슨, 윌리엄 하워드 하트, 어네스트 클립포드 페익소토, 스티븐 코드멘, 프레드릭 윌리엄 멕모니스 등과 여류화가인 릴라 케벗 페리 및 메리 C. 브레디 등 수십 명에 있었다. 그리고 40여개의 아틀리에가 시골인 지베르니에 생긴 상황이었다.

 

로즈는 1891년의 여름철에도 무더운 파리를 떠나 지베르니에서 다시 생활한 적이 있었다. 당시 파리에는 공식적인 인상파 교육기관이 없었다. 사실 모네는 평소 모르는 화가들을 지베르니에 초청하지 않았다. 로즈는 지베르니를 향해 가는 것은 일생의 방향을 정하는데 큰 결심이었다. 그 후 1894년과 1899년에도 지베르니를 방문하고 생활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904~1912년의 9년간은 삽화를 그리는 여류화가인 에텔 보드멘 로즈 Ethel Boardman Rose (1871~1946)와 결혼한 이후에 함께 지베르니에서 생활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핍박받은 인상파는 모네가 43세에 정착하여 86세까지 생을 다하면서 지베르니에서 꽃을 피웠다. 왜냐하면 이곳에 350명의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가 찾아와서 같이 생활하면서 인상파를 계승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인상파는 미래가 사실 불투명했고 보장받는 확신이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모험을 하듯이 생애를 거는 용기가 필요했다. 인상파 원형(原形)의 작품을 실험하고 창조해 나간다는 것은 심미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지베르니는 차츰 새로운 미술 즉 인상파의 모태(母胎)와 발원지(發源地)가 되었고 드디어 현대미술의 세계적인 메카가 되었다. 지베르니는 모네와 함께 많은 지베르니아이츠의 노력으로 전 세계를 향해 급속히 파급되었고 140년이 지나면서 차츰 현대미술의 르네상스를 이루었다.

그 당시 프랑스 파리나 독일의 뮌헨 등 유럽의 예술도시에서 공부하던 화가들은 19세기 말경에 인상파라는 혁명적인 페인팅 스타일이 다음 세기에 중심적인 화풍이 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심미적인 예견은 점장이처럼 정확했다. 로즈도 파리에서 최고의 아카데믹 엘리트 교육을 받았지만 이를 과감히 탈피하고 지베르니를 찾아간 것이다.

 

모네의 멘토를 받은 가이 로즈

로즈가 지베르니에 처음으로 방문한 시기인 1890년은 나이가 23세이었고 당시 모네는 50세의 장년으로 두 사람의 나이는 27살의 차이가 있었다. 로즈는 지베르니에서 네 번에 걸쳐 13년 동안 같이 생활하면서 모네와 절친하게 지냈고 로즈는 인상파의 경험자인 모네로부터 다양한 멘토를 받았다. 모네는 평소 사교적(社交的)인 성격이 아니었으나 일벌레였으며 대단한 독서가이었다. 또한 마네, 피사로, 시슬레, 코로, 용킨트, 들라크루아, 팡탱라투르, 부댕 등 화가들의 많은 미술품을 수집한 컬렉셔너였다. 모네와 젊은 로즈와의 사이는 서로가 다른 점이 많았으나 친하게 교류하게 되었다. 모네가 가지지 못한 점 즉 그가 평생 염원하던 엘리트 미술교육을 로즈는 받았으며 자발적으로 모네를 찾아왔다. 또한 로즈는 프랑스에서 일류 학교를 나와서 최고의 권위인 파리살롱 (Paris Salon)의 배심을 통과하였다. 또한 전시를 통한 일련의 과정은 모네가 지니지 못하였으나 젊은 로즈는 가지고 있었다.

 

단지 로즈는 불행하게도 지베르니에서 유화의 안료(顔料)에 들어가는 납() 중독으로 인하여 치명적인 증세를 보이면서 간혹 유화작업을 중단할 때가 있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부인인 에텔 로즈처럼 삽화가(揷畵家)로 전환하여 파리에서와 미국으로 귀국하여 뉴욕에서 삽화를 계속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페인팅 작품 수량은 다른 화가에 비하여 매우 적었다. 납중독의 영향으로 유화작업에 지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오랜 동안의 유럽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캘리포니아로 귀향하여 주로 몬트레이와 라구나 지역에서 풍경화 작업을 이어갔다.

 

로즈는 지베르니의 체류시기부터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고 일생동안 정통적인 인상파 화풍을 습득하면서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을 개발하였다. 즉 그의 화풍은 모네와 유사(類似)하면서 미국적인 사실주의를 혼합하여 누가 보더라도 확연히 구별되는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인상주의는 1874년에 등장한 이후 140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이유는 화가들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상파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애호하는 현상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인상파의 독특한 특징(特徵) 때문에 생긴 필연적인 결과였다. 인상파는 과거의 아카데믹 리얼리즘과 크게 달랐다. 종래의 그림 스타일은 주로 역사화, 종교화 및 신화 속의 인물을 주제로 하여 사실주의로 묘사하는 응축된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인상파의 스타일은 이와 달리 첫째 그림을 그리는 소재의 다양성(多樣性)을 지녀서 어떠한 대상도 모두 그림의 실체가 될 수 있었다. 둘째는 화가자신이 지닌 개별성(個別性)으로 사람의 얼굴이 다르듯이 작품도 이와 같이 무한한 창작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상파의 표현방법의 무한성을 들 수 있는데 즉 스트로크의 변화무상성(變化無常性)이 존재하는데 있다. 이와 같이 세 가지 특성 때문에 인상파는 인간이 원천적인 욕망 즉 아름다움을 향한 영원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다.

 

지난 6월에 출간한 <The Ten-미국 인상주의의 거장들, 2>에서 소개한 내용은 프레드릭 차일드 하삼 등 미국 동부지역의 11명 화가들의 작품소개이었다. 이번에는 지역적으로 크게 대별되는 서부지역의 대표적인 화가인 가이 올랜도 로즈를 소개해 보고자 하였다.

 

1910, ‘ 장식적 인상주의 ’ Decolative Impressionism로 정의

장식적 인상주의(Decolative Impressionism) 작품이란 가이 로즈 등 10명의 화가들이 당시 지베르니의 실외 정원과 실내에서 꽃과 정원의 배경과 함께 여인이나 가족 인물을 결합하여 그린 작품이다. 특히 작품의 배경에는 햇빛이 쏟아지는 정원에서 시간에 따라 무수히 반사되는 섬광(閃光)과 같은 색채의 명멸을 개성적으로 묘사했다. 주제는 가족의 인물과 모델 여인의 누드를 정원이라는 배경과 함께 그린 것이다. 또한 실내에서도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햇빛에 비친 인물의 모습을 실외에서 처럼 묘사하였다. 이러한 작품 속에 정원의 꽃이나 잎사귀의 모습은 다소 추상적(抽象的)이며 환상적(幻想的)인 표현기법 즉 개성적인 터치로 그려졌다. 작품속의 인물은 인상주의 표현방법으로 그리되 배경과는 달리 사실주의에 가깝게 표현하면서 서로 병치(倂置)하여 조화를 이루게 한 것이 특색이었다.

 

1890년에 지베르니에 도착한 가이 로즈는 이곳에서 장식적 인상주의(Decolative Impressionism)의 작품을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실현한 화가이었다. 그가 지베르니에서 성취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인상주의의 새로운 장르를 개발한 것이었다. 로즈가 지베르니에 온지 10년 후인 1900년부터 리처드 밀러, 로턴 파커, 프레드릭 프리세크, 에즈먼드 그리슨, 칼 앤드슨 등의 화가들이 도착하여 비교적 오랫동안 정착하면서 이러한 스타일의 작품을 같이 그렸다.

 

1910, ‘ 지베르니 그룹 ’Giverny Group으로 뉴욕 전시

1910년에는 이와 같이 새로운 화풍으로 활동한 지베르니의 화가 6명이 [지베르니 그룹 Giverny Group] 이라는 명칭으로 고국인 뉴욕에서 전시하여 큰 성공을 이루었다.

이렇게 칭한 6명의 화가 자신들도 처음에 이런 화풍이 새로운 장식적 인상주의(Decolative Impressionism)’로 장차 정의(定義)가 될지를 몰랐다. 단지 작품속에 햇빛을 받아 무수히 명멸하는 정원의 나무 잎사귀와 꽃들이 어울린 아름다운 정원을 그렸고 뉴욕 등에서 전시를 통해 인기를 얻었다. 그들은 실내에서도 인상파가 추구하는 빛()과 색()의 조화 및 대상(對象)과 면()의 구성을 장식적 인상주의로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상파가 추구하는 빛이 충만한 자연(自然) 속에 인간(人間)을 포함시킨 것이다. 즉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인상파의 새로운 스타일로 개발하여 캔버스에 창작한 것이었다.

 

전시가 끝난 1년 후인 1911년에야 미국의 미술비평가이며 수집가인 크리스천 브린턴 Christian Brinton (1870~1942)이 서양미술사에 처음으로 이들의 그림 스타일을 장식적 인상주의라는 용어로 명명(命名)한 점이 특이했다. 지베르니에서 오랜 실험 끝에 새로운 인상파의 장르가 이와 같은 이름으로 정의(定義)되어 탄생한 것이다.

 

되돌아 올라가면 이렇게 생긴 새로운 장르는 사실 모네가 처음으로 시작(始作)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인상주의는 그림의 대상에 대하여 빛과 색채의 변화에 따라 사실주의와 달리 다소 주관적(主觀的)으로 표현된다. 또한 그림에는 심미적으로 추상적(抽象的)인 이미지 묘사가 일부 합쳐지는 회화 기법이다.

 

추상화를 최초로 개발한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1896년에 모네의 <건초더미>를 모스코바 전시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이 때 사물에 비친 햇빛의 추상적인 표현과 함께 사물자체가 가진 중요성을 지워 버린 것에 대하여 영감(靈感)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한 적이 있었다. 또한 인상파는 기능적으로 장식적(裝飾的)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들 지베르니의 장식적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위와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 표현과 더불어 장식적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특징적으로 함께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 모네와 가이 로즈 출간

이번에 지베르니에서 생활한 10명의 장식적 인상주의화가들 중에 먼저 모네와 가이 로즈 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로즈는 모네와 함께 13년을 지베르니에서 생생한 경험을 통해 정통적인 인상주의를 터득한 화가 즉 지베르니아이츠(Givernyites)였다. 그는 납중독이라는 어려운 건강상 장애를 이겨내고서 140년의 역사를 가진 전 세계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거장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또한 새로운 인상파의 장르로 정의(定義)장식적 인상주의화가중의 리더였다. 또한 지베르니 그룹(Giverny Group)이라는 이름으로 뉴욕에서 전시한 리더였다. 이렇게 존경받는 가이 올랜드 로즈가 국내에 소개되는 일은 처음으로 서양미술에 참고가 되었으면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