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등급

스스로 물러난 도덕 선생님의 못다한 이야기

아기로 오셨다는 것-하느님으로 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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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백/소성리 사드저지기독교현장기도소

2020. 12. 24.

201219 소성리 아침묵상 (눅 1:26-38)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중략)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중략).” //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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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임하셨는데, 그 분은 처음부터 다 자란 어른의 모습으로 임하시지 않고, 여자의 자궁속에 태아의 모습으로 오셨답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덧입어야 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답니다.
그 분이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느님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신 시간은 길게 잡아야 3년이었다네요.
세상에 임하신 하느님도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의 양육을 받았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애지중지 품고 보듬어 길러내야 할 싹으로 임하신 것이었어요.
지금 성령이란 이름으로 내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도 우리가 그렇게 애지중지 품고 보듬어 길러내야 할 싹과 같은 모습으로 계신 것은 아닐까요?
애달픈 부모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키워 나가야 했던 마리아와 요셉의 역할이 이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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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느님은 다 자란 어른의 모습이 아니라,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까?"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그 해 12월 19일 조화순 목사님이 성탄메시지 삼아 주셨던 화두입니다.
조화순 목사님에 대해 평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세월호 사건 이후 광장을 자주 나가다가 조금 발을 넓히게 된 결과, 어쩌다 조목사님과 하종강님의 토크콘서트까지 찾아갔더랬죠. 그곳에서 조목사님의 살아오신 얘기를 들으면서 귀에 와 닿았던 물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날마다 묵상]에 위와 같은 글을 남기게 되었지요.
그 후 성탄절기가 되면 다시 이 글을 곱씹어 읽어보고 있습니다.
난 '애달픈 부모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키워 왔는지' 뼈저린 반성을 합니다.
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별로 소질이 없었습니다. 
말로 해서 설명을 못 알아들으면 답답해하는 내 마음은 폭력으로 표출되기 일수였습니다. 상대가 못 알아듣는 이유를 나에게서 찾지 않고 상대방에게 찾았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나를 엄청나게 미화하며 응원해주는 동생 은총이 옛날 야학을 다니던 시절 오빠에게 수학문제를 들고 설명해달라다가 오빠에게 배우느니 야학 선생님께 다시 묻는게 낫겠다고 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교직을 너무 일찍 떠난 거 아니냐고 묻곤 하는데 사실은 더 일찍 그만두어야 했다는 게 정답이지요.
요즘은 무얼 설명하느라 한참 열을 올리고 있으면 누가 옆에서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하고 웃는 얼굴로 얘기해 줍니다. 딸내미가, 아들내미가 엄마와 얘기하는 중인데 그렇게 끼어듭니다. 
'화내면서 가르치기'의 가장 큰 피해자였을 아이들이 이제 그 피해를 극복했단 사실에 감사합니다. 여전한 나의 못된 습관을 깨달으며 부끄러워집니다.
어떻게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하느님 될 수 있도록 키울 수 있을까요?
"애지중지(愛之重之)" 바로 그것이 정답 아닐까요?
'사랑의 매'는 정답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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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랑의 매를 강조하며 폭력으로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리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리들이 일으킨 전쟁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들이 바로 마 24:5에서 말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미혹하는 이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분단을 획책하고 전쟁을 일으킨 무리들이 누군지 겪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곳에 전쟁무기 사드를 들여놓고 이 땅의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리들을 향해 분노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들을 향한 분노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사랑의 매'같은 폭력과는 다른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요?
사드철회 성주대책위 이름으로 전해진 감사 메시지에 "만 4년 동안 13번의 전투와 4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침탈을 당한 이곳 소성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이 표현은 정확한 진술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투쟁 방식(화염병을 던지거나 사제폭발물같은)조차도,우리의 분노, 우리의 저주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방식에 불과합니다. 하물며 소성리에서 우리가 보여준 투쟁방식을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수님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마 6:10)라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때는, 우리 모두가 각자에게 찾아오신 하느님을 보듬어 애지중지 기르는데 성공하는 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하느님 되도록 키우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진밭교위 초소에서 드리는 아침평화기도 (2020.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