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등급

스스로 물러난 도덕 선생님의 못다한 이야기

["뜻밖의 사람, 바디매오"](백목사의 예수읽기(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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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속에서/어떤 분의 깨달음을 고마워하며

2021. 10. 24.

오늘(2021.10.24) 소성리 아침평화기도회를 준비하며 성서일과를 읽었습니다.
눈먼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

옛날에 읽었던 글이 생각나서 다시 읽었습니다. 백창욱 목사님이 2012년 강정에서 싸우던 시절에 "백목사의 예수읽기"라는 제목으로 써나가던 목회칼럼 중 한 편입니다. 

[마가복음 10:46-52 "뜻밖의 사람, 바디매오"] - 백목사의 예수읽기
http://newmj.kr/xe/column/17809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오늘 복음말씀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내용은 예수님이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뜨게 하는 치유이적이야기이다. 그런데 좀 새삼스럽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서 이적치유이야기는 앞부분 1-3장에 모아놨기 때문이다. 또 마가 8:22-26을 보면, 벳새다에서 눈먼 사람을 치유하는 이적이야기가 있다. 그렇다면 다시 이적치유이야기를 소개하거나, 소경치유를 중복해서 말할 필요는 없다. 그럼 무엇인가?

오늘 이적이야기의 특징이 있다. 고침 받은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디메오의 아들 바디매오라고. 예수의 치유이적을 경험한 사람 중에, 이름이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 악한 귀신들린 사람, 나병환자, 중풍병환자, 한쪽 손 오그라든 사람,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 벳새다의 눈먼 사람... 모두 이름없는 사람으로 나왔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만 특별히 고침 받은 소경의 이름이 바디매오라고 소개한다. 이 뜻은 복음저자가 바디매오라는 사람을 조명하겠다는 뜻이다. 왜 저자는 이 사람을 주목하고 조명하려는 것인가? 더군다나 눈먼 거지를.

바디매오 이야기가 나오기 전 예수가 겪은 일들은 실망의 연속이었다. 세 번의 수난예고 때마다 제자들이 보여준 모습-그들은 논공행상을 다투고, 김칫국부터 마셨다. 또 잔뜩 기대했지만, 실망을 안겨준 부자청년, 마지막으로 노골적으로 자리를 요구하는 야고보와 요한 등 하나같이 예수님 뜻과는 반대되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덧 여리고까지 왔다. 이제 예루살렘은 코앞에 다가왔다. 이대로, 이런 진용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하나님나라 운동은 어떻게 될까?

예수는 매우 심란했다. 예수께도 새로운 활력소가 절실한 시점이었다. 이때, 바디매오가 등장한다. 예수가 제자들과 큰 무리와 함께 여리고를 떠나려고 하는데, 바디매오가 예수의 소식을 들었다. 바디매오는 즉시 무조건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바디매오는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하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은 게 분명하다. '다윗의 자손'이 그것을 말해준다. 메시아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다윗의 자손이 등장했다는 사람들의 말을 단단히 붙잡은 거다. 바디매오는 이때부터 이미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작동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바디매오의 외침은 큰 무리의 소음을 넘었다. 사람들은 소경의 소리에 짜증을 내고 윽박질렀다. "조용히 하라고"

무리가 바디매오를 꾸짖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일이 급한데,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바로 가야 하는데, 이 소경이 행보를 방해한다는 거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하나님나라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이 소경거지를 위해 멈추는 일이 예수가 추구하는 나라이다. 하나님나라는 목적 못지않게 과정에서 약자들이 소외당하지 않는 게 또 다른 목적이다. 

사람들이 윽박지르지만, 용케도 바디매오는 주눅들지 않고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첫 번 외침과 똑같이. 즉 소원의 내용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예수는 바디매오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가 예수를 신뢰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대목이다. 약한 자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소리에 반응하는 점이다. 이것이 정치인이나 이 땅 집권자와 다른 점이다. 정치인은 표가 되지 않는 곳에는 절대 반응하지 않는다. 강정현장은 매일매일 아수라장인데 그 누구도 이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다. 거짓선전만 일삼는다. 분단, 안보, 기득권 사슬에 매여서 참 해방을 위한 일을 하지 않는다. 김범일 대구시장은 대구시 잘못으로 생긴 그 숱한 분쟁에도 한 번도 약자들의 원성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오직 공권력으로 차단하는 게 능사이다. 예수가 좋은 이유는 권력이 설정해 놓은 경계, 규정, 제한을 기탄없이 뛰어넘는 데 있다. 예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소리친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다.

첫째로 바디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졌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겉옷은 여러 기능을 한다. 낮에는 옷이고, 밤에는 이불이다. 가난한 사람에게 겉옷은 마지막 보루이다. 신명기 24:12-13 말씀에 따르면, 채권자도 가난한 채무자의 겉옷은 가져가지 못한다. 그런데 이 옷을 벗어 던졌다는 것은, 바디매오가 인생전환을 선언하는 거다. 지금까지 인생을 떨쳐 버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지의 미래에 전적으로 자기 몸을 던지겠다는 의미이다. 무엇을 믿고 이리 무모한 결단을 하는 걸까?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이름이다. 바디매오는 예수이름에 자기 전부를 걸었다.

둘째로, 바디매오가 취한 행동은 "벌떡 일어났다." 조금도 미적대거나 주저하는 기색이 없다. 벌떡 일어나서 자리를 비우면 빌어먹기에 좋은 그 자리는 남이 차지할지도 모른다. 장사하든 빌어먹든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가는 모두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자기 자리에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는 그 자리에 돌아와서 앉지 않겠다는 기세로 벌떡 일어났다. 새로운 길을 나설 때 뒤돌아보지 않고, 과감히 앞만 보고 가는 자세는 참으로 중요하다.

셋째로 바디매오 행동에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이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을 때, 일 초도 주저하지 않고, "선생님, 내가 다시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한 것이다. 여기서 바디매오의 정신세계를 조금 분석해보자.

소경이었으므로 보는 것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런가? 불법적이고 불의한 상황도 세월이 오래 흐르면 사람들 마음이 화석이 된다. 민주공화국 시대에 독재가 통하는 이유는 폭력적 지배에 겁을 먹은 탓도 있지만, 오랜 세월 독재에 순응하는 세상만 살아서,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다. 한 예로 유신 때 택시기사가 승객이 체제 비판적인 말을 하면 곧바로 경찰서로 달려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면 개인면허를 줬다나 어쨌다나... 코 앞 이익에 눈 먼 사람들은 유신독재든 자기가 신고한 사람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그 지배방식에 장단을 맞춘다. 

만약에 오랜 세월 상황에 굳어버린 눈먼 거지라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뭐, 이렇게 오래 살았는걸요, 그저 지금 이대로 좋은 자리에서 적선을 받아서 살다 죽으면 그만이지요. 내 가족이나마 부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라고 할 수도 있다. 얼마든지.

그러므로 바디매오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구한 것은 남다른 요구였다. 자기 처지에서 가장 정확하고 분명한 소원이었다. 그동안 무수한 사람의 적선으로 살아왔지만, 눈을 볼 수만 있다면, 다른 세상을 살겠다는, 무엇보다도 세상에 유익을 끼치는 그 무엇을 하겠다는 다짐과 결의가 온전히 담긴 탁월한 요청이었다.

마지막으로 바디매오의 행동에서 주목할 것은 그가 예수를 따라나선 것이다. 예수는 바디매오를 부르지 않았다. "가거라" 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자발적으로 예수의 뒤를 따라나섰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의를 위해 사는 사람이다. 바디매오의 추종으로 예수는 제자들에게서 겪은 실망, 또 부자청년에게서 겪은 상실감을 한꺼번에 상쇄했다. 예루살렘 상경 길을 모두가 두려워하는 중에,(마가 10:32) 너무도 귀한 동반자를 얻었다.

결론이다. 이름값 하는 사람들이 모두 예수에게 실망만 안겨주는 상황에서 전직 눈먼 거지가 운동의 든든한 일군이 됐다. 이처럼 가치의 전복이 일어나는 곳이 하나님나라 운동이다. 오늘날도 운동은 늘 고비에 직면해 있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하는 뜻밖의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직하게 묵묵히 길을 걷다 보면, 그 기운에 하늘이 감복하고, 뜻밖의 동지도 만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목적하는 곳에 당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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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던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요? 그들의 기도 내용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소성리 사람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조용하라고 한 사람들과 비슷한 부류라 할 수 있나요?

오히려 투쟁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귀담아 듣고 싶지 않은 사람들, 투쟁의 대의를 흐린다거나, 공적인 투쟁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말문을 막아버린 당신이 바디매오에게 조용히 하라 꾸짖은 사람과 닮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