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등급

스스로 물러난 도덕 선생님의 못다한 이야기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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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백/고백 ; 기도 ; 선언 ; 설교 ; 묵상

2021. 12. 27.

2021년 12월 26일 주일 마가교회 소성리현장예배 설교문

[루가 2:41-52]
41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예수의 부모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42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명절의 기간이 다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에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44 아들이 일행 중에 끼여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갔다. 그제야 생각이 나서 친척들과 친지들 가운데서 찾아보았으나
45 보이지 않으므로 줄곧 찾아 헤매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다.
46 사흘 만에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
47 그리고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품에 경탄하고 있었다.
48 그의 부모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는 예수를 보고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하고 말하였다.
49 그러자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50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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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가 성탄절 이제 막 태어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했는데, 오늘 말씀 본문은 복음서 중에 유일한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묵상합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을 찾아 헤멘 끝에 성전에서 학자들과 문답을 나누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나누는 대화에 주목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먼저 아들을 책망합니다.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아들을 잃어버린 일은 누구 책임이었을까요? 아들입니까, 부모님입니까?
  아들의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나자렛이 아닌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하는 말입니다. "내가 나자렛 아버지 요셉의 집에 어련히 알아서 찾아갈텐데, 왜 마음 고생하며 찾아다녔느냐?"는 말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도 요셉도 아들 예수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고 복음서가 전합니다.
  열두 살 소년 예수의 마음 속에 어떤 꿈이 있는지, 어떤 지향이 있는지 그 부모도 몰랐다는 얘기입니다.

 

  나의 어린 시절, 내가 무엇을 꿈꾸고 그 길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조차 막연하던 그 시절, 부모님과 충돌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상처로 남아 있던 일은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고 교회로 담임선생님댁으로 도망쳤던 일입니다. 
  제 부모님도 제 마음 속에 어떤 꿈이 있는지, 어떤 지향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교회를 떠나면서 제가 어떻게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성탄절, 성육신하신 하느님,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오셨으나 이미 하느님으로 또는 하느님의 아들로 오로지 경배와 찬미의 대상으로만 이해하며, 그분이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당신의 하느님 되심을 드러낸 사건들만 기억해 왔습니다.
  하느님이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이상 캐묻지 않았습니다.

  나는 "양육받는 하느님"을 묵상합니다. "갓난 아기를 하느님으로 키우기"에 대해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2014년 12월 세월호 사건에 충격받아 광장으로 나온 뒤 어느날 하종강님과 조화순 목사님의 대담 행사를 목격하면서부터였습니다. 조화순 목사님은 그날 토크 콘서트에서  "왜 하나님은 다 자란 어른의 모습이 아니라,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까?"라는 질문을 제 화두가 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날의 생각을 블로그에 이렇게 적어두었었지요.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임하셨는데, 그 분은 처음부터 다 자란 어른의 모습으로 임하시지 않고, 여자의 자궁속에 태아의 모습으로 오셨답니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덧입어야 하는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답니다.
그 분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쳐 주신 시간은 길게 잡아야 3년이었다네요.
세상에 임하신 하나님도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의 양육을 받았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애지중지 품고 보듬어 길러내야 할 싹으로 임하신 것이었어요.
지금 성령이란 이름으로 내 안에 함께하시는 하나님도 우리가 그렇게 애지중지 품고 보듬어 길러내야 할 싹과 같은 모습으로 계신 것은 아닐까요?
애달픈 부모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키워 나가야 했던 마리아와 요셉의 역할이 이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난해 성탄절을 앞두고는 다시 블로그의 글을 읽으며 묵상하다가 페북에 이런 글을 남겼었습니다.

『난 '애달픈 부모의 마음으로 하느님을 키워 왔는지' 뼈저린 반성을 합니다.
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별로 소질이 없었습니다. 
말로 해서 설명을 못 알아들으면 답답해하는 내 마음은 폭력으로 표출되기 일수였습니다. 상대가 못 알아듣는 이유를 나에게서 찾지 않고 상대방에게 찾았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나를 엄청나게 미화하며 응원해주는 동생 은총이 옛날 야학을 다니던 시절 오빠에게 수학문제를 들고 설명해달라다가 오빠에게 배우느니 야학 선생님께 다시 묻는게 낫겠다고 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교직을 너무 일찍 떠난 거 아니냐고 묻곤 하는데 사실은 더 일찍 그만두어야 했다는 게 정답이지요.
요즘은 무얼 설명하느라 한참 열을 올리고 있으면 누가 옆에서 '그런데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하고 웃는 얼굴로 얘기해 줍니다. 딸내미가, 아들내미가 엄마와 얘기하는 중인데 그렇게 끼어듭니다. 
'화내면서 가르치기'의 가장 큰 피해자였을 아이들이 이제 그 피해를 극복했단 사실에 감사합니다. 여전한 나의 못된 습관을 깨달으며 부끄러워집니다.
어떻게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하느님 될 수 있도록 키울 수 있을까요?
"애지중지(愛之重之)" 바로 그것이 정답 아닐까요?
'사랑의 매'는 정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의 매를 강조하며 폭력으로 원하는 바를 얻으려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예수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리들도 그러했습니다.
예수의 후예를 자처하는 무리들이 일으킨 전쟁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그들이 바로 마 24:5에서 말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미혹하는 이들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분단을 획책하고 전쟁을 일으킨 무리들이 누군지 겪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곳에 전쟁무기 사드를 들여놓고 이 땅의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리들을 향해 분노하는 게 마땅합니다.
그들을 향한 분노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사랑의 매'같은 폭력과는 다른 방법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요?
사드철회 성주대책위 이름으로 전해진 감사 메시지에 "만 4년 동안 13번의 전투와 4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침탈을 당한 이곳 소성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이 표현은 정확한 진술이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투쟁 방식(화염병을 던지거나 사제폭발물같은) 조차도,우리의 분노, 우리의 저주를 드러내는 하나의 표현방식에 불과합니다. 하물며 소성리에서 우리가 보여준 투쟁방식을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은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까?
우리가 드리는 예수님 가르쳐주신 기도문의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마 6:10)라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때는, 우리 모두가 각자에게 찾아오신 하느님을 보듬어 애지중지 기르는데 성공하는 때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하느님 되도록 키우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오늘은 바로 이 일, "우리 모두가 각자에게 찾아오신 하느님을 보듬어 애지중지 하느님으로 키우는 일"에 대해 더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미 '화 내면서 가르치기'로 실패한 제가 무슨 뾰죽한 방법을 찾아낸 건 아닙니다. 아직까지 '애지중지(愛之重之)'라는 상식적인 표현 밖에 모릅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던 아들의 답변에 침묵으로 가슴에 담아두기만 했던 마리아의 모습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요셉의 면전에서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냐"고 묻는데, 어떻게 네 아비가 요셉말고 또 있느냐고 따져 묻지 않습니다. 예수살렘 성전을 두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 했으니, 내 아버지는 하느님이라고 말한 것인데, 이게 얼마나 참람한 신성모독인지, 얼마나 위험천만한 발언인지 경고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아들이 품은 뜻에 대해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하느님되게 키우고자 한다면,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보니 더욱 중요한 전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네요.
바로 나에게 찾아온 하느님, 아이로 만나고 있는 그 하느님이 자신의 정체성을 하느님으로서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꺾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게 하느님의 뜻을 좇은 분이라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여전히 '애지중지(愛之重之)'라는 표현의 되풀이일텐데요, 사랑을 듬뿍 주는 일입니다. 오늘 말씀 52절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는 말씀은 오늘 성서일과의 사무엘상 2:26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무엘도 예수님도 성장과정에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듬뿍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사랑의 하느님이시니 사랑을 듬쁙 받으며 사랑하는 법을 깨우치지 않고서 어찌 사랑의 하느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말 그대로 청출어람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의 삶을 약육강식 생존경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 익히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 소외된 이들을 향하여 더욱 애끓는 사랑을 보여주시는 분이 하느님인데, 우리는 바로 그런 이들이야말로 우리가 손쉽게 잡아먹을 수 있는 먹이라고, 언제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존재로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바로 그런 가르침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세뇌되어 왔습니다. 하느님을 공경하되 두려워할 뿐, 하느님처럼 되는 일은 신성모독이라고 정죄해 왔습니다. 예수님을 닮자는 구호는 용납할 수 있지만 실제 예수님과 같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예수님이 당신을 지칭하는 말로 늘 '인자(사람의 아들)'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을 품고, 하느님이 뜻하시는 바를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행동하기를 즐거워한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거룩한' 단계에 이르도록 끝없이 노력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후배들, 후손들이 청출어람을 보여주며 우리보다 더 높은 단계의 인격에 이를 수 있도록, 그렇게 키워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곳 소성리에서 사드철회 투쟁에 매진하는 저의 모습이 '내 자녀, 내 손주들을 내팽개치고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을 품고, 하느님이 뜻하시는 바를 마음에 새기고, 하느님을 대신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행동하려 하는 모범'으로 비쳐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가교회 소성리현장예배 (12:00)

 

어린이 찬양

 

지킴이초소에서 드리는 아침평화기도회(07:30)

**이 글은 [새마갈노(http://www.eswn.kr)]에도 게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