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등급

스스로 물러난 도덕 선생님의 못다한 이야기

사랑하는 아들, 하건이에게 / 착하게 사는 게 현명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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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고백/고백 ; 기도 ; 선언 ; 설교 ; 묵상

2017. 2. 20.

사랑하는 아들, 하건이에게


네가 더욱 번민하게 되는 문제를 “착하게 사는 게 현명한 일인가?”로 상상하며 네게 답을 써주겠다고 했는데, 막상 답을 하려니 아빠에게도 벅찬 문제구나.

지난 편지에선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많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와 사회구조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세계로 눈을 돌리더라도 그러한 사회구조와 역사는 늘 있었단다. 성경에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나오지. “정의가 짓밟히는데 왜 하느님은 가만히 계시냐고?” 도처에서 악한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벌어지다 보니, 착하게 사는 게 바보처럼 느껴지고, 제 이익만 추구하는 게 현명한 것처럼 느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더구나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사회체제는 사람들을 욕망의 포로로 만들고, 극심한 경쟁으로 내몰고 있지. 그 때문에 사람들은 선이라든지 정의의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빠가 생각하기에 “착하게 사는 게 현명한 일”이란 대답은 욕망의 포로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하기 어려운 것이란다.

 

사실 ‘이익이냐 손해냐’를 따지는 것은 정해진 기준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있느냐에 달려 있어.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욕구들을 가지고 있어서, 사실 누구에게도 손해가 되지 않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들을 할 수 있단다. 우리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먹거리를 사지. 먹거리를 사면서 손해라고 생각하면 그걸 살 수 있겠니? 먹거리를 파는 사람은 손해를 보면서 먹거리를 팔겠니? 가족 간의 사랑을 생각해도 그렇다. 아기들에게 쏟아 붓는 사랑을 생각해보렴. 그렇게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니?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모든 가치를 화폐라고 하는 교환가치로 치환을 해버려서 모든 욕망이 돈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생각을 퍼뜨리는 것이야. 어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지.

돈을 버는 방법은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정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강도나 사기와 같은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이야.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은 두 번째 방법도 마다하지 않겠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최순실 일당이나, 이전 대통령이었던 이명박 일당은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단다. 이런 사람들은 어쩌면 ‘착하게 사는 게 바보처럼 보이게 만드는’ 원흉들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정당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도 문제가 있어.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채워 줌으로써 돈을 버는 것은 강도나 사기와 같은 짓보다는 나을 것 같지만, 사람들의 어떤 욕망을 채워주고 돈을 버느냐가 문제가 된다.

어떤 이는 사람들의 건전하지 못한 성욕을 채워주면서 돈을 번다. 포르노사이트를 운영하거나 사창가를 경영하거나 하지. 어떤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돈을 벌기도 한다. 이건 모든 사람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기에 가까운 것인데, 간혹 수많은 응모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 1등 당첨의 행운을 안겨주기도 하면서, 욕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 것처럼 광고를 한단다.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욕망을 새로 일으켜서 돈을 벌기도 한다. 새로운 발명, 새로운 일자리가 이를 통해서 만들어지지. 이들은 사람들의 잠자고 있던 욕망을 일깨운다. 이전에는 그러한 욕망을 채우지 않고도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이 새로운 욕망에 눈뜨고 그러한 욕망을 채우지 못하면 불안해하게 되는 거야. 핸드폰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생각해보렴. 아빠의 말이 이해가 될 거야.

자본주의 사회는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채워줌으로써 벌어먹고 살아가게 하는, “배려를 중요한 덕목이 되게 만든 사회”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불필요한 욕망을 일깨우고 끝없이 욕망을 추구하게 만드는 사회”라는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광고가 필수적인 산업으로 등장하는데, 광고란 마치 그 제품을 사용하면 어떤 욕망을 완전히 해결해 줄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실은 광고한 만큼의 효과를 보여주는 경우란 별로 없기 때문에 거의 사기에 가깝다. 오히려 광고는 사람들의 잠자고 있는 욕망을 일깨워 욕망의 포로가 되도록 부추기는 사회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단다. 정직한 정보 전달로 그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게 오늘날의 광고산업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들을 욕망의 포로로 만들고 그 욕망을 무한대로 키워가는 것이 특히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욕망을 채워 줄 자원들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세대가 써야 할 자원들까지 미리 앞당겨 모두 써버리고 있는 셈이지. 자원만 미리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출한 쓰레기의 처리까지 미래세대에게 짐으로 떠넘기고 있단다.

지금 우리나라 근해에서 잡히던 어족자원들 중에 예전에는 잘 잡히던 것들이 지금은 보기 드물어진 것들이 무엇이 있고, 왜 그런 일이 생겼나 생각해보렴.

우리가 핵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발생시킨 핵쓰레기들을 처리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걸리는지 알아보렴. 겨우 잘해야 50년 사용한 핵발전소가 방사선의 위험이 완전히 제거되는데 수십만년이 걸린다는 거 아니? 수십만년 동안 용도폐기된 핵발전소와 그 쓰레기들을 완전 밀봉하여 보존한다는 게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란다. 결국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치명적인 쓰레기를 만들어주고 있는 거야.

정당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욕망을 채워주는 대가로 돈을 벌더라도, 그 욕망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착하게 사는 게 바보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사람들의 대열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가르침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성현들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우리에게 욕망의 절제를 요구하고 있지. 가장 대표적인 가르침은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불교뿐만 아니라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면 거의 모든 종교가 욕망을 제어할 것을 가르친다.

종교만이 아니지. 윤리도덕이라는 것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인격도야를 위해 욕망을 다스릴 것을 요구한다. 스스로 다스려지지 않는 욕망들이 춤추고 있는 사회는 지옥인 셈이야.

바로 이런 점에서 착한 사람이란 욕망을 잘 다스려 억제할 줄 아는 사람, 어쩌면 욕망이 적은 사람, 무욕(無慾)의 경지에 도달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니?

아빠가 ‘사람의 등급’이란 제목으로 사람들의 인품에 대해 했던 말을 생각해보렴. 사람들은 ‘☉人리’라는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 여기서 ‘☉人리라는 세계’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이지.

그런데 내게 있는 무엇을 내어주면서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바보 같은 짓 아니겠니? 아빠는 바로 이것을 묻는 거야. 비록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체제 안에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사랑의 논리에 끌려 살아가기도 하고 있고, 진정한 기쁨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에서 생겨난다는 것이지.

당장 네가 아파하는데 그 아픔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돈을 써야 하잖아? 아빠는 그 돈을 쓰면서 네가 아프지 않았다면 하고 바라면서 아까워 할 수도 있어. 하지만 이미 네가 아픈 게 현실이고, 그 현실을 인정한다면 약값을 지불하고 너를 낫게 해달라고 의사에게 돈을 지불할 거야. 거기서 “아니야. 우리 하건이는 절대 아프지 않아!”라고 현실을 부정하며 돈 쓰기를 거부한다면 나쁜 아빠, 미친 아빠 아닐까?

만일 약값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불러서 우리의 수입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돈을 요구한다면 어쩌면 치료를 포기하고 네가 아픔을 감수하게 하거나, 아니면 약을 도둑질 해야겠지. 네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픔을 잘 견디고 그럭저럭 적응해 살아갈 수 있다면 모르지만, 네가 아픔을 못견뎌한다면 어찌할까? 아빠는 도둑질을 해서 겪게 될 고통과 지금 네 고통을 바라보며 공감하게 되는 아빠의 고통을 비교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 도둑질을 선택하겠지.

약값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부르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 일은 어떻게 생기는 일일까? 그것은 약을 팔아 돈을 버는 제약업자들이 특허를 빌미로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냐, 돈이 중요하냐”면서 돈벌이에 환장한 때문이겠지? 자본주의 사회는 이처럼 ‘돈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바꾸어 생각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사회체제’라고 할 수 있다.

아빠는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뭐시 중헌디? 뭐시 중하냐고?” 질문을 자꾸 던지고 싶다. 아빠는 바로 위에서 예로 든 가상의 현실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약값을 요구하는 사회라면 너의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도둑질을 할 것이고, 그런 방법으로 “도대체 뭐시 중하냐고?” 질문을 던질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에 이웃해 있는 자만벽화마을을 지나 치명자산에 가면 천주교성지가 나온단다. 그곳에는 옛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던 조선시대 후기에 부부가 서로 성관계를 하지 않고 수녀와 신부처럼 살다가 형장에서 처형당한 동정녀부부의 무덤이 있지. 그 밑에 천주교의 순교자기념성당이 있어서 들어갔다가 거기서 동정부부 가운데 한 사람인 이순이루갈다라고 하는 여인이 남긴 편지들을 읽어 보았단다.

그 부부는 순교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살았는데, 남편이 먼저 처형되고 부인은 차마 모두 죽일 수 없었는지 유배형이 내려졌었어. 유배가 끝나면 어느 관청의 노비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었지. 그런데 거기서 유배를 가기 전에 이 여인은 왜 사형이 아니고 유배형이냐고 사형을 시키라고 요구를 했단다. 유배를 가는 도중에 이 여인의 기도가 이루어졌는지 다시 사형으로 형이 바뀌어 결국 원하는 대로 순교를 한 것이지.

아빠가 이 얘기를 들려주는 것은 이 여인의 선택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아빠는 이 여인이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죽음을 선택한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여인은 아빠에게 “도대체 뭐시 중요하냐?”고 묻고 있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사람들의 욕망,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것들은 그만큼 다양하다. 획일적으로 비교거나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건아, 너에게는 무엇이 중요하니?

아빠에게도 벅찬 문제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이제 나이를 먹고 보니 어느 정도 욕망의 포로 상태에서 벗어난 것 같긴 한데, 아빠의 젊은 날을 돌아보면 미련이 참 많았었고, 지금도 욕망을 완전히 벗어나진 못한 것 같아서야.

아빠가 지금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외로움이란다. 옛 선인들이 강조하던 덕목이 신독(愼獨)이란 것이었는데, 아빠도 [희생과 양보의 원리]에 대해 강의하면서 “진정한 사랑이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아빠는 외로움을 견디는 힘이 약하다.

교직을 떠난 이유도 아빠의 수업을 외면하여 아빠를 외롭게 만드는 학생들 때문이었고, 아빠가 가족들에게 불만스러워 하는 점도 아빠의 얘기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 가족들이 원망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아빠는 홀로 있는 시간들을 무언가에 몰두하기 쉬운 게임이나 잠에 취해서 낭비하는 시간이 많았다. ‘신독(愼獨)’이란 홀로 있는 시간에도 외로움을 견디며 자신의 인격수양을 위해 노력하는 것, 자신과 그물코처럼 얽혀 있는 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물코처럼 얽혀 있는 세계”에 대한 확연한 깨달음이 부족하여 외로움을 느끼고, 엉뚱한 것에서 위로를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거야.

“그물코처럼 얽혀 있는 세계”에 대한 깨달음이 확연해지면 더 이상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겠지. 아빠는 좀 더 여기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볼 계획이다.

 

지금까지 아빠가 돌아본 세계에서는 “도대체 뭐시 중요하냐?”는 질문에 ‘사랑’이라고 답하고 있다. 좀 더 나아가면 ‘생명과 평화’라고 얘기할 수 있지. 자유와 평등이 경쟁을 위해서 존재하는 원리가 아니고 생명과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원리인 세상, 그러한 세상이 이상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그러하고 동학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인생이 무상함을 설파하는 붓다도 깨달음을 얻은 뒤 중생에 대한 자비행을 실천하다 돌아가셨다.

우리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CCM을 좋아하지. 그런데 아빠는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착하게 사는 게 현명한 일인가?”라는 질문에 충분한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생존을 염려해야 하는 환경에서는 더욱 쉽지 않은 문제란다. 그러나 단순히 생존을 넘어 ‘존재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 문제도 극복하기 마련이다. 또한 그물코처럼 얽혀 있는 세계는 누군가의 존재가치를 위해 그가 생존에만 얽매여 있지 않도록 서로 돕기도 하지.

오늘의 사진은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하게끔 하는 실상사의 고목들 가운데 배롱나무 사진이란다. 카톡으로 보내주었던 사진인데 그 기둥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라고 함께 묶어 보았다. 잘리우고 속이 비어 한켠에선 이끼가 퍼렇게 끼고 있는데도 여전히 수액을 빨아올리고 있는 나무의 생명력과 그 생명력을 썩히지 않고 아름답게 키워가는 그물코처럼 얽혀 있는 이 세계에 대해 묵상해보렴. 아빠의 노년의 삶도 이 나무를 닮길 희망한다.

아빠는 네가 선택한 연기자의 길을 걸을 때, 너도 세상을 사랑하는 방편으로 연기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 길에서 때때로 꺾이고 잘리우는 고통을 맛보더라도, 네가 사랑하는 힘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고 결국 그물코처럼 얽혀 있는 이 세계에서 너의 존재가치를 꽃피우기를 기도한다.

 

(추신: 아빠에게 답장 쓰는 일로 부담감 갖지 않기를 바란다. 카톡으로 문자로 전화로 아니면 댓글로 간단한 소감 정도만 얘기해도 충분하다. 다만 누군가에게 상담하고 싶을 때, 진실의 편에서 너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너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할 때, 그런 때 긴 편지를 쓰렴. 언제든 너의 상담을 환영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