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순흥면] 쏟아져 내릴듯한 푸르름, 소수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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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경상북도

2012. 5. 15.

'노군자(老君子)' 선비정신으로 길을 걷다.

소수서원(紹修書院)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151 / 054-639-7691

 

한참을 푸른 빛과 함께 걷습니다.

소수서원의 푸르른 송림숲이지요.

울창한 수림속의

솔향 가득 가슴에 담고 나면

머리속까지 맑은 기분입니다.

그렇게, 천천히 걸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쏫아져 내릴듯한 푸르름이 가득합니다.

영주 부석사 가는길에 자리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소수서원입니다. 인근의 선비촌과 연계되어 같이 둘러 볼 수 있어 더욱 좋은 곳이지요.

5월의 소수서원은 우거진 송림의 푸르름이 압도합니다. 시원한 송림의 그늘에서, 그 빛과 같은 물빛에서, 물빛과 같은 서늘한 바람속에서 지나는 봄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지요. 소수서원을 지나 선비촌입니다. 현재 '2012 영주선비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옛 사람들의 살아가는 법을 현장에서 체험하고 느기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을 더 나아가면 선비문화수련원이 자리합니다. 수련원 일대에서는 영주선비문화축제를 기념하며 유등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의 넉넉함을 즐기고, 옛 선인들의 삶과 풍습들을, 그리고 아름다운 유등축제까지 겸하여 여행을 쩌날 수 있는 좋은 시간입니다. 길손은 선비촌과 선비문화수련원은 잠시의 걸음으로 대신하고 소수서원 역시도 역사적의의 담은 건물들의 무거움보다는 가벼운 걸음을 갖고 싶어 숲을 위주로 걸어 보앗습니다. 

봄, 스산한 한기가 어린 늦봄바람이 참 상쾌하던 날의 방문입니다.

    

 

 

 

소수서원(紹修書院),

백운동 서원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적 제55호로 그 최초의 기록은 세종대에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종38년(1543년), 풍기군수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1495~1554)이 영주지역의 교화를 위하여 풍기출신의 유학자 안향(安珦)을 배향하는 사당을 설립한것이 그 최초로, 지역의 유생들의 위한 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1546년에 이르러 경상도관찰사 안현(安玹)이 서원의 근간이 되는 '사문입의(斯文立義)'를 만들어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두고 운영방침을 보완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명종3년(1548년) 단양군수를 거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이황(退溪 李滉, 1501~1570)에 의해 독서를 위하던 서원의 운영방침을 확대하여 학문과 교화, 후진 양성을 통한 일종의 학파를 형성함으로서 강학공간을 이루게 됩니다. 이는 을사사화로 인한 고초를 격은 퇴계선생이 왕실에 대한 반감이었던 것으로 판단되는 대목이지요. 이때 당시가 명종이 즉위하였으나 실제의 권력은 문정왕후와 그녀의 외척들이 정세를 간섭하고, 내정이 부정에 휩쓸려 다니던 시기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쉽게 알 수 있는 대목이 됩니다. 당시 퇴계 이황뿐만이 아니라 많은 신하들이 낙향하여 고향에 은거하였고, 나라의 부름을 거부하던 때 입니다. 

암튼, 붕괴된 교학을 바로잡고, 선비들의 정신을 올곧게 하기 위해서 퇴계선생은 서원의 보급이 필요하다 하여 명종5년(1550년)에 백운동서원을 송나라의 예에 따라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소수서원(소수서원)의 현판과 사서오경등의 서적과 노비, 토지등을 하사받게 됨으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사원이 됩니다.

이후 소수서원은 지역 사림들의 집결지가 되었고, 향촌의 중심기구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소수서원의 뒤를 이어 수 많은 사액서원들이 난립하게 됩니다.

이는 당쟁 격화로 인한 자파 정치세력을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서원의 형세는 강학공간에서 벗어난 점차 학연과 지연을 근거로 둔 붕당세력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자파의 학문적 우월성 내지는 자파에서 읶르어낸 역량있는 지도자를 배출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이는 것이지요. 또한 자기 문중의 인물을 서원의 사당에 모셔 배향함으로서 문중의 권위를 높이는데 한 몫을 하였으며, 가문의 결속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나라가 인정한 사학으로 지방사림들의 정치적, 사회적인 근간을 이루는 곳으로 정착이 되면서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된것입니다.

결국, 지금의 지방색을 띠게 한 단초가 된것이 서원이라 한다해도 틀린말은 아니라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서원이 늘어나면서 문중의 색이 짙어져 이내 자신의 후손, 후학이 아니면 등단을 허락하지 않는 폐단을 낳게 되었고, 숙종21년(1695년)대에 들어 지방관의 연대에 들여 서원의 동일계파의 동일 서원을 세우는 첩설(疊設)을 금하게 하였으며, 영조3년(1727년)에는 아예 서원의 사액을 허가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고종5년(1868년) 대원군의 명에 따라 비사액서원들이 강제 철폐 되었고, 사액서원 중에서도 붕당을 만들었다면 조사를 하여 철폐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전국에 47개의 서원만이 남고 모든 서원들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소수서원은 서원철폐령에도 존속된 47개의 서원 중 한곳으로,

강학당을 중심으로 많은 건물등이 들어 서 잇습니다. 특히, 소수서원입구에서 부터 경내로 들어서는 길의 소나무숲은 일년내내 장관을 이룹니다. 소수서원 소나무들은 붉은 적송으로 일본인들에 의해 많이 벌목되어 사라졌으나 지금도 울창함을 잃지 않고 서원을 향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 배움이 나무였으며, '노군자(老君子)'라 하여 나이 들어서도 배운다는 선비정신과도 이어집니다. 

실상 소수서원의 송림은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평평한 대지위에 세워진 소수선원의 뒤가 허하다 하여 서원의 주변에 송림을 만든 것으로 서원의 학풍을 이어가고 끊임없이 학문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환경을 조성한 것이지요. 

 

흐르며 지나는 봄,

5월의 중턱에서 찾은 소수서원의 푸르름은 그리도 시원스러웠습니다. 반팔로 걷다보면 한기 마저 느낄수 있는 소수서원의 송림, 그보다는 느긋한 마음이 먼저 일것입니다.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수령500년의 보호수 소수서원은행나무

 

죽계천과 취한대(翠寒臺)

서원의 입구에 들어서기 전 죽계천의 건너편에 자리한 정자로 퇴계선생이 경자바위의 위쪽에 소나무와 대나무, 잣나무를 심고 취한대라 한것을 1986년에 건립된 정자입니다. 

 

백운동 경자바위

단종 복위실패로 죽어간 영혼들의 울음소리가 밤마다 이어지자 주세붕 풍기군수가 영혼을 달래기 위해 '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내니 울음이 그치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白雲洞'은 퇴계선생의 글씨로 전해집고 있습니다.

 

소수서원의 입구,

입구에는 호연지기와 시연을 배풀던 주세붕이 세운 '경렴정'이 자리합니다. 서원을 세울 당시 세워진 정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자로 손꼽히고 잇습니다.  

 

성생단의 옆 소나무 숲

 

 

 

 

소수서원 또하나의 죽계천, 탁영지(濯靑池)

 

탁청지를 돌아나와 죽계천을 따라 걸으면 선비촌의 입구에 닿습니다.

 

 

 

 

 

 

 

선비문화수련원

 

 

 

by 박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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