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삼장면] 핏빛을 씻어낸 여울의 단아함, 지리산 내원사(智異山 內院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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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경상남도

2013. 2. 15.

계곡 물소리 청아한 작은 가람

'지리산 내원사(智異山 內院寺)'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586  /  055-972-9444

 

장단골과 내원골이 함류하는 지점에

자리한 작은 절집입니다.

청한 계곡물소리가 울리고,

깊은 산바람이 불어 대는 곳입니다.

양반집의 정원쯤으로 보이는 작은 절집,

그러나 그 속내는 깊고도 깊습니다.

 

 

반야교에서 내려 본 여울풍경

 

 

 

지리산에 자리한 절집, 내원사(內院寺),

그러나 여느 절집의 입구와는 달리 인적이 드뭅니다. 물론, 길을 오르는 동안의 주위 풍경은 그리 곱지 못합니다. 펜션과 식당들이 자리하고 있지요. 뭐 이런 풍경이야 웬만한 명산에 명찰이라면 익숙해진 모습이니 그 보다는 좀 한가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다만, 여느 동네들은 자신들을 홍보하는데 열중인 반면 이곳에서는 '임대'라는 현수막들이 좀 안 스럽습니다.

 

그만큼 내원사는 인적이 드문 절집입니다.

절집의 규모도 작습니다. 전각으로 대웅전과 비로전, 삼성각과 요사가 전부입니다. 그 규모 또한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절집은 처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전각들이야 1959년에 들어 섰으나, 그 보다 오래도록 머물던 보물 2점이 그러하고 그러한 인고의 세월을 굽어 본 지리산이 감싸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리산 내원사(智異山 內院寺)',

내원사라는 이름처럼 절집은 어느 양반네의 후원과도 같은 풍경입니다. 그만큼 소박하고 단아한 모양새입니다.

내원사 자리의 원래 절집의 이름은 '덕산사(德山寺)'입니다. 신라 태종 무열왕4년(657년)에 창건 되었으며, 진성여왕2년(888년)에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가 머물며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절집입니다. 그러나 1609년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가 되었고, 풍수지리에 의해 복원이 미루어지며 폐사지로 남아있다가 1959년, 원경스님의 불사로 전각을 짓고 내원사라 이름하였습니다.

당시 화재 이 후 스님들은 전각들을 다시 세우는 대신 덕산사에서 30리 떨어진 '석남암사(石南巖寺, 또는 수선암)'에서 수행하였다고 합니다.

덕산사 터는 풍수지리상의 명당터로 전국에서 찾아오는 수 많은 신도들로 인하여 스님들의 수행이 불가능에 이르자 주지는 고승을 찾아 묻게 되었고, 고승은 "장단골 개울에 다리를 놓으라."고 합니다. 이 후 스님들은 개울에 통나무 다리를 놓았지요. 그러자 정말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줄어 스님들은 수도정진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그 전에 없던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울음소리가 늘수록 찾아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 들었구요. 이를 이상하게 여겨 풍수가에 물으니, 앞산은 쥐의 혈이며, 뒷산은 고양이의 혈로 다리를 놓으니 고양이들이 건너가 쥐들을 다 잡아 먹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절집에 큰 불이 난것입니다. 

걷 잡을수 없게 번지는 불길을 끝내 잡지 못하고 절집은 완전히 전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덕산사의 스님들은 모두 장수였다고 전합니다. 지금의 반야교 아래에는 장군수라는 용천수가 있어 이 물을 마시면 장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장사들의 스님들은 화재를 막지 못하자, 더 이상 덕산사터의 수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너럭바위로 장군수를 막아  놓았다고 합니다.   

 

 

 

 

 

 

내원사 경내에는 보물 2점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1113호 '내원사삼층석탑'은 1950년대 도굴꾼들에 의해 옥개석이 부서지고 상륜부가 사라진것을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이고, 보물 제1021호 석조여래좌상은 옛 석남암 폐사지에 발견 된것으로 내원사와 옛 덕산사를 이어 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 석조여래좌상에서 발견된 사리함은 '영태이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라 이름으로 국보 제233호로 지정 되어 현재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원사는 그러한 보물의 귀중함 보다는 단아한 절집의 풍경이 더욱 매력 있습니다.

장단골과 내원골에서 흘러 내리는 두 계곡이 어울려 만나는 합수지점에 위치한 이유입니다. 품세 좋은 지리산의 자락이 뒤에 병풍을 치고, 앞으로 졸졸 흐르는 여울의 소리가 그리도 맑고 청명한 곳입니다. 느긋한 찬바람이 부는 시간에 찾은 내원사의 여울소리는 유독 더 맑았던 이유입니다.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반야교를 건너면 내원사의 마당입니다.

반야교의 아래에는 너럭바위가 떡 하니 버티고 서고, 그 위에는 '명옹대(明翁臺)'라 새겨진 글씨가 있습니다. 밝은 노인이라..아마도 내원사에 들어 수행하면서 몸과 마음이 밝아진 노스님이 자리한 곳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만큼 내원사의 풍경과 여울소리가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바위가 '장수(군)바위'로도 추정 되고 있습니다. 덕산사터의 풍수를 흐트리지 못하게 하려 막아 놓은 바위이지요.

너른 마당의 좌측으로 요사가 자리하고 그 뒤로 '비로전(毘盧殿)'이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보물 제1021호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한 전각입니다. 그 팡 한단 아래에 보물 제1113호 내언사삼층석탑이 자리하고, 그 옆으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한 '대웅전(大雄殿)'입니다. 한축의 뒤 우측으로 칠성각七聖閣, 천왕각天王閣, 산신각山神閣이 하나로 이루어진 '삼성각(三聖閣)'이 자리합니다.

그리고는 너른 마당과 절집을 드나들수 있는 반야교와 내원교가 이어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작고 아담하게 지어진 전각,

욕심 없이 지어진 전각입니다. 화려하거나 문양의 복잡한 기교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단아합니다. 너른 마당은 넓게 펼쳐져 누구든 들어 올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맑고 단아한 절집, 소박함이 가득한 정감 넘치는 절집이지만, 내원사가 자리한 지리산골은 근대 핏빛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마지막 조선인민유격대, 즉 빨치산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내원사 풍경

좌측이 장단골방향의 내원교, 우측이 내원골 방향의 반야교 방면입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이로서 조선인민당,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등 3당이 합동하여 결성된 '남조선노동당(남조선노동당)', 이른바 남로당으로 불리는 단체의 활동을 불법으로 정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2.7사건에 이어 제주 4.3사건, 여순반란 사건으로 이어지며 남로당은 사실상 지하세계로 숨어들게 됩니다. 특히 국군 내부에 침투항려 좌익군인들이 일으킨 여순사건을 거치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지하활동을 벌이게 된것이지요. 이들이 바로 남조선유격대, 즉 빨치산이 됩니다. 그런데 빨치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리산 일대에서 소작농을 하고 있는 빈민들이었습니다. 바로 지주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가난한 백성들이었지요. 이러한 불만은 빨치산들의 회유와 유혹속에 산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그 수가 2만을 넘을 정도였다고 하지요. 

 

그 중 한 사람, 한 여인이 있습니다.

'정순덕(鄭順德, 1933~2004)',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 출신의 키 150cm의 다부진 체격을 가진 여인입니다.

18세의 나이로 성석근과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지리산 일대는 혼전을 겪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세상이었지요. 식량이 필요하다면 민가로 내려와 닥치는 대로 가지고 갑니다. 그러다 너무 많은 양이 되면 사람을 시켜 이동하도록 하였지요. 그렇게 성석근은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염없이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아내는 지리산으로 남편을 찾아 들어 갑니다. 그러나 쉽게 나올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남편의 곁에 있겠다며 지리산에서 생활하기 시작 합니다. 그로부터 한달도 채 되지 않아 남편을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나 끝내 남편의 무덤이라도 지키기로 합니다. 

 

그러던 1951년 12월, '백선엽(白善燁, 1920~  )'장군은 국군과 경찰의 합동사령부인 '백(白)야전 사령부'를 두고 빨치산 토법작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일명 '쥐불작전'입니다.

수도사단(1기갑연대, 1, 26보병연대)는 남쪽에서, 8사단(10, 16, 21보병연대)은 북쪽에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107, 110, 117 예비연대와 1, 2, 9 경비대대, 200, 207, 203, 205 경찰연대와 함께 남원치안국사령부가 합세하여 퇴로를 차단하는 포위전술입니다. 1952년 3월까지 약 1년여 벌어진 토벌작전으로 지리산에서 대부분의 빨치산은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토벌작전에도 정덕순과 이홍이는 살아남게 됩니다. 마지막 빨치산인 셈입니다. 그러던 1963년 11월 12일, 지리산 내원골에서 이홍이는 도주중에 사살 되었고, 정덕순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체포가 됩니다.

결국 빨치산이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아낙은 마지막 빨치산으로 낙인 되며 전향을 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전향이라는 것 자체를 모른 아낙은 끝내 거부를 하였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복역하게 됩니다. 복역 중 전향공작에 의하여 전향을 하게 되었고, 1986년 8.15특사로 석방 되면서 23년의 복역생활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런던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이 있자 비전향장기수들과 함께 북한으로의 송환을 요구합니다. 자신의 전향은 남한의 고문과 강요에 의한 강제적인 것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다고 말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그녀의 고향이 대한민국이며 전향서를 이미 썻다는 이유로 송환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2004년 4월 1일, 인천 길병원에서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의 유해는 파주 고령산 보광사의 빨치산유해안치소에 잠들어 있습니다. 

 

세상물정 모르는 소박하고 간나하던 촌색시는 결국 마지막 빨치산이 되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반야교

 

 

이렇듯 맑고 단아한 절집의 주위 풍경에는 이러한 아픔이 있습니다.

계곡을 따라 오르면 내원골이지요. 또 다른 계곡을 따라 오르면 장단골입니다. 산청의 마지막 비경이라고 일컬어 지는 곳으로 때묻지 않은 비경이 20km가 이어지는 천혜의 자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출입이 통제 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올 해 열리는 '2013 산청의약엑스포' 기간중에는 임시 개방을 할수도 있다고 합니다. 갈수만 있다면 꼭 들러 보고 싶은 곳입니다. 

 

맑은 단아함,

핏빛을 모두 깔끔하게 씻어내리고 맑은 여울소리와 청아한 물소리만이 남아 있습니다. 내원사의 풍경은 그렇게 아름다웠습니다.

 

 

 

'명옹대(明翁臺)'

반야교 아래 너럭바위에 새겨진 것으로 '이곳에서 수행하며 몸과 마음이 밝아진 노스님이 자리한 곳'정도로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이 바위가 일명 '장군바위'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내원사 전경

작고 소박합니다. 

 

 

내원사 '대웅전(大雄殿)'

정면3칸, 측면2칸의 익공계 팔자직부을 하고 있는 건물로 1960년대에 지어졌습니다. 뒤로 언덕형태의 봉우리를 두고 앞으로는 작은 화단을 꾸며 놓아 산중에 들어선 절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내원사 '삼층석탑'

보물 제1113호로 지정 된 석탑으로 신조성년대는 신라시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950년경 도굴꾼에 의해 파손 된것을 1960년 내원사를 창건하면서 복원 한 것입니다.

높이 4.8m의 석탑으로 2층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얹고 옥개석이 부서져 있으나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탑의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또한 화재로 인하여 탑신 마저 심하게 손상이 되어 몸돌의 새김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원사 '삼성각(三聖閣)'

산신각(山神閣), 천왕전(天王殿), 칠성각(七聖閣)이라는 편액이 함께 걸려 있는 전각입니다.

정면3칸, 측묜2칸의 익공계 팔작지붕으로 산신각가 천왕전에는 빗살무늬3분합문이 달렸고, 칠성각에는 빗살무늬4분합문이 달았습니다.

산신각에는 산신탱화와 독성탱화를 걸었고, 천왕전에는 동불입상1구와 석불좌상2구를 봉안하였으며, 칠성각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칠성여래를 협시하고 있는 칠성탱화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내원사 '비로전(毘盧殿)'

정면3칸, 측면2칸의 이공계 맞배지붕으로 내원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안에는 보물로 지정 된 석조비로자나불만 봉안하였고, 다른 장엄은 하지 않았습니다.

 

'석남암수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南巖藪 石造毘盧那佛坐像)'

보물 제1021호로 지리산 중턱의 '석남암수(石南巖藪)'에서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던 것을 1970년에 옮겨온 것입니다.  대좌속에서 발견 된 사리함에 '신라 혜공왕2년(776년)에 비로자나불을 조성하여 석남암사에 모신다.'는 내용이 발견 되었습니다.

비바람에 의하여 마모와 마멸이 심하지만 전체적인 굴곡와 어깨와 팔의 부피감등이 사실감 있게 표현 되었고, 법의주름이 촘촘하게 표현 되었다고 합니다. 광배에는 연꽃과 불꽃의 모양을 새겼고, 팔각의 하대에 연꽃무늬를, 팔각의 중대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상대에는 2겹의 연꽃무늬를 새겨 놓았습니다. 

 

 

내원사 요사에서 잘 익어가는 메주

 

 

 

 

내원교에서 바라 본 계곡

 

 

 

 

 

by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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