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하점면] 빈터에 홀로 남은 보물을 만나다. 봉은사지(奉恩寺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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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인천광역시

2013. 3. 25.

천년고찰을 지키던 석탑, 그리고 석조여래좌상

봉은사지 오층석탑, 석조여래입상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일대

 

옛 국찰(國刹)의 면모속에

남은 오층석탑과

그 절집과 관계가 있었을

석조여래좌상을 만났습니다.

강화도의 여행길,

스치고 지나가기에는 참 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점면 석조여래입상(河岾面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315호)

 

 

 

강화여행길에 알게 되어 둘러 본 보물들입니다.

처음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성에서 옮겨와 대찰의 면모를 과시하던 '봉은사(奉恩寺)'의 남은 유적으로 추측 되고 습니다. 하점면 오층석탑과 하점면 석조여래입상이 그것입니다.

 

먼저, '강화 하점면 석조여래입상(江華 河岾面 石造如來立像)'을 만나 봅니다.

고려 봉은사지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2.8m 높이의 마애불입니다. 둥근 얼굴로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를 얹었고, 전체적으로 미소를 머금은 온화한 표정입니다. 목에 삼도가 표현 되었고, 법의가 몸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두광에 화염문이 장식 되어 있것으로 보아 11세기경에 제작 된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잘 표현되어 다듬어진 상체와 달리 하체는 대략적인 표현으로 마무리 되어 있습니다. 보물 제615호로 지정 되어 '석상각(石像閣)'이라는 이름의 보호각과 돌담을 두르고 있습니다.

봉은사가 강화도로 천도 이 전부터 자리하고 있던 불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도처였겠지요. 이 후, 인근에 봉은사가 들어 서면서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을 테고요. 그러나 지금은 봉은사터에는 덩그러니 놓여진 오층석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어찌보면 하점면 마애불은 사람들에 더 많은 관심과 기도의 대상이 되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지금의 절집들이 만간신앙과 함께 내려오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민초들의 믿음의 근간이 되어 왔다것으로 증명 될 수도 있기 때문일듯 합니다. 

 

그리고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江華 河岾面 五層石塔)'입니다.

일명 '봉은사지 오층석탑(奉恩寺地 五層石塔)'으로도 불립니다. 봉은사는 원래 개성에 있던  고려국찰이었으나, 고종19년(1232년)에 강화도로 천도를 하면서 함께 옮겨졌었습니다.

발견 당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196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으나, 3층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상륜부가 유실 되어 현재는 3.5m의 높이를 갖추고 있습니다. 고려후기 석탑의 특징을 간직한 석탑으로 보물 제10호로 지정 등록 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석탑의 자리를 생각한다면 주변 산세가 거의 봉은사의 절터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옛 절집의 규모를 대강 짐작 할 수 있는 것이 마을에서 석탑까지 들어 오는 길이 꽤나 길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길에 일주문부터 절집의 전각을 세웠다고 한다면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잡았을만한 석탑의 자리로는 꽤나 깊고 높은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들게 됩니다.

'제 모습도 찾지 못한 석탑이 어찌 보물로 지정 되었을까?' 라는 의문입니다. 답은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라는 것과 석탑이 존재하던 절집, 봉은사(奉恩寺)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38권 7장에 '성전사원'에 해당하는 일곱개의 사찰에 대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성전사원(聖殿寺院)'이란, 왕실에서 세운 절집으로 관리와 운영이 남다른 곳입니다. 즉, 특수한 관청의 소속으로 관직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호칭으로 왕실을 위한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원찰(願刹)'보다 규모가 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일곱개의 사찰은 사천왕사, 감은사, 봉선사, 봉덕사, 영모사, 영흥사와 위의 보물들과 관계 된 봉은사입니다.

 

그리고 봉은사는 시대별로 나타납니다.

신라시대에는 '봉은사'는 왕실에서 관라감독하던 성전사원이였으며, '봉은사'의 고려시대는 수도 개성에 자리하여 태조 이래 역대 왕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국사와 광사의 책봉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가장 큰 원력을 키우게 됩니다. 조선시대의 '봉은사'는 숭유배불정책으로 소외시 되었으나, 문정왕후와 보우대사의 숨결이 남아있는 공간이 됩니다. 그리고 현재는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맞은편의 '봉은사'가 됩니다. 

 

'봉은사(奉恩寺)'는 신라 원성왕10년(794년)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 하였습니다.

실제 그 처음의 출발은 신라 '진지왕(眞智王, 신라25대왕)'의 추복을 위한 원찰의 형태로 '혜공왕(惠恭王, 신라36대왕)'대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선덕왕(宣德王, 신라37대왕)'을 거쳐 '원성왕(元聖王, 신라38대왕)'대에 이르러 완공이 된 절집입니다.

봉은사는 배불정책 속의 조선시대에 수 많은 선사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합니다. 태종6년(1406년), 국가 인정 사찰을 242개로 줄였는가 하면, 세종6년(1424년)에 다시 전국 사찰 중  선종(禪宗), 교종(敎宗) 각 18개, 총36개만을 선정함으로서 그 곳에 머물던 스님들만 승려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연산군에 들어서면서 선교양종(禪敎兩宗)제도는 무너지지요. 

그렇게 쇠락을 걷던 불교계는 명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일어서게 되지요. 바로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의 활동에 의해서였습니다. 

 

명종5년(1550년),

중종에 니어 명종이 보위에 올랐으나, 어린 나이에 오른 이유로 문정왕후가 섭정을 하였지요.

'문정왕후 윤씨(文定王后 尹氏, 1501~1565)'가 누구인가요? 중종의 제2계비로 조선13대 명종의 친모이기도 합니다. 바로 조선의 역사를 '당쟁의 역사'로 만든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러한 문정왕후가 불교에 심취하여 '나암 보우(懶庵 普雨, 1515~1565)'와 함께 불교계는 다시 부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선교양종을 부활하였고, 연군대에서 아예 사라졌던 '승과(僧科 : 스님들의 과거시험)'제도를 부활시키기도 합니다.

이로서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禪宗 首寺刹)이 되어 교종 수사찰(敎宗 首寺刹)인 봉선사(奉先寺)와 함께 불교계를 이끌게 됩니다. 이로서 봉은사 주지, 보우스님이 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 都大禪師), 봉선사 주지, 수진스님은 판교종사 도대사(判敎宗事 都大師)가 됩니다. 이러한 직함들은 스님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게 된것이지요. 이로인해 '서산대사 휴정(西山大師 休靜,1520~1604)', '사명대사 유정(泗溟大師 惟政,1544~1610)'과 같은 고승들이 배출되기도 합니다.

 

또한, 정치적으로 결함이 많던 문정왕후의 친정에 진절머리가 나던 시대는 문정왕후에게 등을 도리는 양반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즉, 성리학의 발달로 이어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선생 같은 큰인물이 배출 되기도 했으며, 궁핍한 생활의 민초들앞에는 '의적 임꺽정'이 나타나기도 한 시기입니다.

그러던 명종20년(1565년), 문정왕후가 65세로 승하합니다. 그러자 그동안 불만을 품어 오던 사림들의 상소가 빗발치지요. 결국, 문정왕후의 측근들이 유배되거나 사사 됩니다. 그 중에 보우스님은 요승으로 몰려 제주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목사 변협에게 장형으로 북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연히 선교양종도 폐지가 되었고, 이로서 봉은사도 자연스럽게 쇠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그러한 질곡의 세월을 지나 온 봉은사,

지금은 강남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지요. 바로 앞 코엑스는 옛 승려들의 시험장이었습니다.

 

절집은 지금의 자리로 옮기었으나, 옛 고려시대의 유물은 강화도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석조여래입상은 그 이전시대부터, 오층석탑은 봉은사와 함께 지내 온 것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덜렁 부서지고 깨져 남은 석탑만이 오롯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실제 두 자리에 올라서 보면 분위기가 참으로 엄숙합니다.

산 골짜기를 내려 보며 선 오층석탑, 야산에 둘러쌓여 감추어진 석조여래좌상이지요.

 

 

 

 

 

 

하점면 오층석탑(江華 河岾面 五層石塔, 보물 제10호)

 

 

 

 

 

 

 

 

by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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