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교동] 멈추어진 옛 시간을 걷다. 교동향교(喬桐鄕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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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인천광역시

2013. 3. 26.

마음의 짐 벗고, 느릿한 걸음이 어울리는 옛 집,

'교동향교(喬桐鄕校)'

인천광역시 교동군 읍내리 148  /  032-932-6931

 

시간여행을 하는 곳,

교동도.

피난 떠나 온 섬 사람들만의

차분함이 있는 섬입니다.

고요하고, 그만큼 넉넉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최초의 향교

교동향교가 있습니다.

 

 

교동향교 외삼문

 

 

 

 

강화도에 달린 조그만 섬, 교동도(喬桐島).

그 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유적지이자 교육의 산실이었습니다. 지금의 교동도는 남국의 대치 상황에 접근해 있는 작은 섬입니다. 그러나 여행자가 줄러 본 교동도는 참으로 평안합니다. 사람, 풍경, 그리고 역사가 공존하고 있는 작은 섬은 시간을 멈추고 40년전의 그 시간 속에 머물고 있는 듯합니다. 

 

교동도는 아직까지 배를 이용하여 접근 할 수 있습니다.

연육교가 건설 중입니다만, 언제 쯤 일런지는 불확실 합니다. 선착장에서 내려 삼엄한 군의 경비를 받고 나면 교동도에 들어 서게 됩니다.

제일 가깝고 접근 하기 쉬운곳에 자리한 '교동향교(喬桐鄕校)'입니다.

 

교동향교의 시작은 '회헌 안향(晦軒 安珦, 1243~1306)'선생이 시초입니다. 그러나 '안유(安裕)'로 이름이 알여져 있는 분이지요. 그 당시 '문종(文宗, 1414~1452, 조선 제5대왕)'의 이름이 '향(珦)'이었기에 그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어릴때 이름인 '유(裕)'를 사용하였고, 때로는 한자음을 달리하여 '향(向)'으로 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경북 영주 출생으로 부친은 의술(醫術)에 뛰어 났다고 전합니다. 선생은 충렬왕12년(1286년)에 유학제거(儒學提擧)가 되어 왕을 따라 원나라로 건너갔습니다. 그 곳에서 주자전서를 보았고, 유학의 정통이라 생각하여 손수 베껴 쓰는 가하면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직접 그려서 가지고 돌아와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였습니다.

주자에 심취한 선생이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의 앞글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은 고려말 유학의 발전에 큰 이바지를 하였고, 훗날 현인 18인에 속하게 됩니다.  

 

 

교동향교 홍살문

 

 

 

교동 화개산 자락에 자리한 '교동향교(喬桐鄕校)',

처음에는 공자의 신위를 모시던 '문묘(文廟)'였습니다. 즉, 처음부터 향교는 아니었습니다. 고려 충렬왕12년(1286년), 문선공 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다녀 오면서 '공자(孔子, BC551~ BC479)'와 '주자(朱子, 1130~1200')의 화상을 그려 가지고 왔으며,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유학의 정통이라 하여 직접 옮겨 쓴 것을 가지고 들어 와 교동의 향교골에 문묘한것이 시초였습니다. 그리고 충렬왕29년(1303년)에 송도로 모시면서 수위(首位)를 이루게 되면서 ans묘는 정식적인 교동향교로서 '수묘(首廟)'라 하게 됩니다.

그러던 영조17년(1741년), 부사 조호신(趙虎臣)에 의하여 향교골에서 화개산 남쪽에 위치한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오성위(5聖位)'인 '공자(孔子, BC551~BC479)', '안자(晏子, ? ~ BC500)', '증자(曾子, BC505~436)', '자사자(子思子, BC483~BC402)', '맹자(孟子, BC371~BC289))''송조2현(宋朝2賢)'으로 불리는 : '정자(程子, 1032~1058)', '주자(朱子, 1130~1200))'를 모셨으며,

우리나라 '18현(18賢)'인 '홍유후 설총( 弘儒候 薛總, ? ~ ? )', '문창후 고운 최치원(文昌候 孤雲 崔致遠, 857~ ? )', '문성공 회원 안향(文成公 晦軒 安珦, 1243~1306)', '문충공 포은 정몽주(文忠公 圃隱 鄭夢周, 1337~1392)', '문헌공 일두 정여창(文獻公 一蠧 鄭汝昌, 1450~1504)', '문경공 사옹 김굉필(文敬公 簑翁 金宏弼, 1454~1504)', '문정공 정암 조광조(文正公 靜庵 趙光祖, 1482~1519)', '문원공 회재 이언적(文元公 晦齋 李彦迪, 1491~1553)', '문순공 퇴계 이황(文純公 退溪 李滉, 1501~1570)', '문정공 담재 김인후(文正公 澹齋 金麟厚, 1510~1560)', '문간공 묵암 성혼(文簡公 默庵 成渾, 1535~1598)', '문성공 율곡 이이(文成公 栗谷 李理, 1536~1584)', '문열공 중봉 조헌(文烈公 重峯 趙憲, 1544~1592)', '문원공 사계 김장생(文元公 沙溪 金長生, 1548~1631)', '문성공 신독재 김집(文成公 愼獨齋 金集, 1574~1656)', '문정공 동춘당 송준길(文正公 同春堂 宋浚吉, 1606~1672)', '문정공 우암 송시열(文正公 尤庵 宋時烈, 1607~1689)', '문순공 남계 박세채(文純公 南溪 朴世彩, 1631~1695)''의 위패를 봉안하였습니다. 

 

 

교동향교 하마비

 

 

 

이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가 자리를 잡게 됩니다.

교동도에서 교동향교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앞 서 말씀드린대로 선착장에서 내려 길 하나를 그대로 따라가다보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교동 '비석군(碑石群)'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면 홍살문이 보입니다. 그곳이 향교가 지리한 위치입니다.

 

홍살문의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고 홍살문의 안쪽으로 들어서고 나면 굥교향교의 전경이 눈에 듭니다.

"참 단아하다." 길손의 교동향교에 대한 첫 인상입니다. 건물의 전체적인 규모는 크다기 보다는 높은 편에 속합니다. 시원한 바람보다는 찬 바람이 더 많은 지역적인 특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바람을 막기 위한 구조를 중심으로 형성 되어 있습니다.

단 높은 곳에 '외삼문(外三門)'이 자리하고, 삼문을 지나자 마자 '명륜당(明倫堂)'이 바투 붙어 서 있습니다. 강론을 논하는 자리로 보통은 대청마루로 지어지지만 이 곳에서는 문을 달아 놓았습니다. 이 역시 바람을 막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또한 좌우로 온돌을 놓아 난방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명륜당의 왼쪽으로 돌면 '서무(西無)'가 자리하고, 오른쪽으로 '동재(東齋)'가 자리합니다. 동재에는 유생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이 역시 온둘을 놓았는데, 어염집 양반가에서나 볼 수 있는 커더란 굴뚝이 연결 되어 있습니다. 공부하는 유생들을 위한 스승의 배려라고 할까요? 향교 전체중에 가장 큰 굴뚝을 가진 공간에 가장 넓은 공간입니다.

명륜당의 뒷 공간은 제향공간입니다.

높은 계단 위에 '내삼문(內三門)'이 자리하고 그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대성전(大成殿)', 좌우로 '서무(西無)''동무(東無)'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각으로 둘러 싼 공간의 바깥으로는 동무의 뒤로는 '제기고(祭器庫)'가 자리하며, 서무의 뒤로는 '성전약수(聖殿藥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작은 섬, 교동도.

그러나 작은 섬이 가진 역사적 의의는 참으로 깊습니다. 한국전쟁에 피난 온 삶들은 시장을 만들었고, 그대로 눌러 안게 되었습니다. 섬만이 간직한 애환은 민초들의 삶과 어울리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근래 들어 북한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지요. 그러나 교동도에서는 그러한 불안함은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차분합니다. 

아마도, 피난민들의 삶이 가득 베인 섬이기에 드러내기보다는 치착함을 잃지 않는 섬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섬에 자리한 향교의 고고함이 놀라울 정도로 정갈하고 정감 어림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꿈꾸어 본 한옥, 선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동도의 여행길에 꼭 들러 보게 되는 교동향교,

잠시나마 마음의 짐 내려놓고 옛 시간속을 걷는 것도 좋겠습니다.  

 

 

향교 앞 연지 

 

 

 

명륜당(明倫堂)

경기도 북부의 섬답게 추위와 바람을 막고자 문을 달았습니다. 양쪽에는 온돌을 놓았습니다. 

 

서무(西無) 

 

동재(東齋) 

 

동재 뒷편의 장독대 

 

교동향교 외삼문(外三門) 

 

노룡암(老龍巖)

원래는 교동현 동쪽헌의 북쪽 뜰에 있었던 것으로 숙종43년(1717년), '충민공 이봉상(忠愍公 李鳳祥, 1676~1728)'이 '노룡암'이라 지었고, 영조49년(1773년) 그의 손자 '이달해(李達海)'가 그 고적에 글을 새겨 놓은 것입니다. 이 후 순조20년(1820년) 통어사 이규서가 '호거암 장군이 풍기를 깨끗히 하였다.'라는 뜻의 '호거암장군쇄풍(虎距巖將軍灑風)'이라하여 7자를 새긴 이후 석대로만 쌓아 있던 것을  1987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교동향교 제기고

 

교동향교 제향공간 가는 길

길손이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공간입니다. 흙, 담, 돌, 문의 조화가 참 아름답게만 느껴졌습니다.

 

 

교동향교 제향공간

 

대성전(大成殿)

 

동무(東無)

 

서무(西無)

 

성전약수(聖殿藥水)

대성전의 아래에서 발원하여 나오는 약수라 하여 성전약수라 불리는 약수로 불립니다.

위장병 치료에 효엄이 있다고 전하는 용출수로 조선시대 유학생들이 이 물을 마시면서 학문에 열중하여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아토피성 피부염에도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INFO..

교동향교(喬桐鄕敎)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148  /  032-932-6931, 향교관리사무소 032-932-9457

관람시간 : 향교를 방문할 경우 향교 앞에서 전화 하시면 됩니다.

관람요금 : 무료

주차요금 : 무료

※관리주체는 마을 어르신들입니다. 농번기등의 시기에는 방문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가는길 :

 

 

 

by 박성환

www.gilso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