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기성] 순풍(順風)을 기다리는 집, 대풍헌(待風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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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경상북도

2013. 9. 16.

울릉도를 수토하기 위해 머문 역사적 건물,

대풍헌(待風軒)’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202 / 울진군 문화관광 054-789-6921

 

독도영유권

조선시대부터 우리의 땅임을

증명하는 공간입니다.

울릉도와 독도로 향하던 수토사들이

바람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던 곳,

대풍헌입니다.

 

 

 

 

옛 시절,

울릉도 태하리에 유인등대가 있으며, 그 아래에 대풍령(待風嶺)’ 또는 대풍감(待風坎)’이라 불리는 고개가 있었는데 그 아래는 깊은 바다입니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바람이 불어야 항해가 가능한 범선이 드나들던 곳으로 바람을 기다린다.’ 하여 대풍령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울릉도의 뱃길과 맞닿아 울릉도로 향했던 육지는 어디일까요?

경북 울진의 작은 포구, 구산포구입니다.

500년 역사의 구산포는 신라말기 중국의 한 장수가 귀화하여 이 마을의 형세를 보아 언덕아래 끝마을이라하여 구미(丘尾)’라 하였습니다. 그려 말에는 평해군수가 거북의 꼬리와 닮았다.’하여 언덕을 구미산(龜尾山)’, 마을은구미(龜尾)’로 개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을 개편에 구산리(邱山里)’가 되었습니다. 마을의 뒤로 있는 구미산은 여전히 그 이름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을의 중심에 대풍헌(待風軒)’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풍헌(待風軒)’,

구산리 마을의 중심에 구미산을 등지고 동해를 바라보며 남향으로 선 건물로 조선시대 울릉도로 가던 수토사들이 순풍이 되기를 기다리며 머물던 장소입니다. 그 이전에는 마을의 종사를 회의 하는 동사(洞舍)’였습니다.

정면4, 측면3칸의 일자형 팔작지붕으로 중앙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으로 부엌과 제기고를 두었고, 우측으로 통간의 온돌을 두었습니다. 좌측의 부엌에도 원래는 온돌을 두었으나 현재는 막혀 있습니다. 시멘트 기단위에 자연석을 놓고 그 위에 배흘림기둥을 놓았으며, 뒤와 좌측의 기둥은 네모기둥을 사용하였습니다. 기둥상부에는 출목 없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를 끼워 초익공으로 꾸몄으며, 보머리에는 수서를 창방과 도리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으며 원래는 단청이 없던 건물이었습니다.

건물 중앙 우측으로 대풍헌(待風軒)’의 현판이 달려 있고, 좌측으로 기성구산동사(箕城龜山洞舍)’의 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건물의 정확한 건립연대를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철종2(1851)대풍헌현판을 걸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 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많은 부분이 개조, 변형 되어 2010년 해체, 복원 한 건물로 사실상 원형을 알아보기 어려운 건물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울릉도를 관할하던 수토사(蒐討使)’들의 출발지점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어, 2005년 문화재자료 제493호로 지정 등록 되었습니다.

    

 

수토(蒐討)’수색하여 토벌 한다.’는 의미이며,

대풍헌(待風軒)’바람을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 울릉도와 독도를 관리하기 위하여 파견 된 수토사가 손쉬운 항해를 위하여 머물던 광아가 되는 것이지요. 이로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왕조의 관할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재 자료가 됩니다.

구산동사중수기(邱山洞舍重修記)’의 기록에 의해 철종12(1851)대풍헌현판을 달았다는 것과 문화재자료 제511호인 울진 대풍헌 소장문서완문(完文)’수토절목(蒐討節目)’에 의해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에 의한 실제적 지배를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완문(完文)’은 순조11(1811)수토절목(蒐討節目)’은 순조23(1823)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완문이란, 조선시대 관부에서 발급한 공문서로 특정한 사실이나 권리, 특권등을 인정하는 확인서로서 대풍헌 소장문서들에는 수토사 일행들을 접대하기 위한 각종 경비를 담당했던 구산 백성의 요청에 따라 부담을 덜어주는 방책에 대해 삼척부에서 결정한 내용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완문에 삼척진영의 사또나 월송만호가 3년에 한 번씩 울릉도와 독도 수토를 위해 대풍헌에 머무는데, 배를 띄울 형편에 따라 머무는 기간 동안 발생하는 경비를 조달하는 방식을 담은 것으로 당시 9개의 마을이 경비를 공동 부담하였는데 바람에 따라 수토사들이 머무는 기간이 달라지면서 마을마다의 형세가 달라 민원이 자주 제기가 되자 관에서 해결방안을 논의하여 결정지은 것입니다.

이 기록으로 삼척진영(수토사)와 월송만호가 3년에 한 번씩 울릉도로 떠났으며, 구산포구가 그 기점에 해당한다는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조선은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서 정기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증명이 됩니다.

대풍헌은 역사적 현장의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 작은 포구가 아담한 그림처럼 그려지는 구산마을,

1970년대 이전까지는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갔으나, 정치망어장 어업이 발달하면서 주민의 80%가 어업으로 전환 마을입니다. 500년 역사를 굽어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땅인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대풍헌의 고문서와 함께 주민들의 화합의 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는 대풍헌입니다.

한 때는 그 모습이 예스럽지 못하여 시멘트로 바르고, 알루미늄세시에 창을 달아 현대화 시켜 놓은 건물이었으나 2010년 해체와 복원을 통하여 어엿한 옛 관가의 모습을 하고 섭니다.

단촐한 건물 한 채, 그러나 그가 가진 역사적의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증명이 되는 공간입니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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