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북면] 200m 콘크리트 방파제의 기분 좋은 변화, 흥부장터방파제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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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경상북도

2013. 10. 10.

꿈과 이야기가 있는 방파제 벽화,

흥부장터 갤러리

경북 울진군 북면 부구리 137-2

 

담담한 회색빛에

색을 입혔습니다.

어부의 삶과 애환을 담았고,

추억과 애정을 담아 그렸습니다.

작은 장터의 대형 벽화,

걸음이 편한 야외 전시관입니다.

  

 

  

거친 동해바다의 파도와 해풍에서 울진 흥부장터를 감싸고 있는 길이200m, 높이1~2m의 콘크리트 방파제입니다.

동해안의 부구해수욕장과 육지와의 사이에 놓인 파도막입니다. 방파제의 안쪽으로는 작은 시장이 형성 되어 있습니다. 부구시장, 흥부장터라 불리는 시장입니다. 옛 부터 3일과 8일에 소시장과 소금시장이 열리던 곳으로 영해장과 함께 동해안에서는 가장 규모의 시장이 열리던 곳입니다.

그러나 시장은 쇠락을 거듭하였고 지금은 황량한 80년대 말쯤의 풍경과 함께 시장은 적적하기만 합니다.

  

  

그런 시장의 방파제에 울진원자력본부의 도움으로 꿈과 이야기가 있는 갤러리를 꾸며 놓았습니다. 이른바 흥부장터 갤러리입니다.

낡고 볼품없던 방파제에 색을 입히고 이야기를 더 하면서 탄생한 야외전시장입니다. 더욱이 울진미술협회 출신의 지역 화가들이 동참하면서 그들만의 추억과 애정을 담아내었고, 방파제 가득하게 흥부장터 사람들의 생활과 애환을 담았습니다. 또한 성류굴, 금강송, 오징어, 송이와 함께 고기잡이 모습을 그려 넣어 흥부장터만의 삶을 담아내어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아쉬운 것이 방파제에만 한정이 되어 있는 벽화로 벽화마을의 제 역할에는 미치지 못하여 많은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곳은 아닙니다.

그러나 걸음이 편하고 마음이 넉넉해지는 공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방파제를 따라 걸으며 바다와 시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만나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카메라가 연신 쫒습니다.

  

 

 

  

부구리(富邱理)’에 자리한 흥부장터’,

옛 시절 마을에 5개 성씨가 들어와 살면서 비옥한 농토를 개간하며 부자마을이 될 것 같다.’하여 흥부리(興富里)’라 하였고, 3개 성씨가 또 다른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마을 한가운데 신령스러운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다.’하여 영구리(靈龜里)’라 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두 마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부구리(富邱里)’라 한 것이지요. 그런데 마을 지명의 자가 조금 다릅니다. 이유인 즉, 1914년 일본인 측량기사가 측량을 하며 표현이 불편하다며 제 마음대로 영구리(靈龜里)’염구리(鹽邱里)’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지금의 지명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솔직히 한 낮 일본측량기사가 쓰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지어진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이 못마땅합니다.

부구리(富龜里)’, 옛 이름을 찾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여행자의 생각입니다.

  

 

  

 

 

 

  

조금은 이른 아침,

어딘가 에서는 구수한 아침 해장의 국물내음이 가득합니다. 라면? 짬뽕? 매운탕? 아마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내음만으로도 해장이 될 듯합니다.

200m정도라고 하지만 실제 느끼는 바는 그 보다 깁니다. 벽화 하나하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려함 보다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삶을 담았습니다. 특히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붉은 바탕위에 그려진 그물을 걷어 올리는 어선 한척과 낚시를 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것임에도 삶의 풍경이 살갗을 스쳐갑니다. 또 다른 풍경으로 현실적인 마을의 풍경입니다. 푸른 하늘과 바다를 사이에 둔 작은 마을, 그러나 그 빛은 깔끔한 파스텔 톤입니다. 주머니속의 사정은 딱 하지만 마음만큼은 넓어 세상일을 초연하게 버텨온 풍경이 그대로 담아내었습니다.

방파제 벽화의 풍경은 그렇습니다. 화려하게 볼거리가 가득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매력이 흐릅니다. 짧은 공간이지만 벽화속에는 흥부장터가 가진 삶과 역사를 고스란히 그려져 있습니다. 고단함과 정갈함, 삶과 애환을 그림으로 담아내었습니다.

  

 

  

201210월부터 조성된 방파제 벽화와 함께

인근의 흥부 역사공원2013년 개장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흥부장터 만세 기념탑김언륜 장군의 묘소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울진은 충절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기미년 410일 매화장터에서 시작된 기미만세운동은 413일 흥부장터에서 정점을 이루게 됩니다. 장터의 중간에는 김언륜 장군의 항쟁을 벌이던 마분동이 자리하기도 합니다.

  

 

  

쇠도리깨 김언륜(金彦倫, 1565~1593)장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용맹을 떨쳤으나, 나라에서 본다면 민심을 이용한 민란의 주범이 되는 인물입니다.

임진난 발발 이듬해 1593, 일본의 군대는 울산을 거쳐 북상하였고, 일부는 강릉을 거쳐 남하하여 군대의 연결을 꾀하고자 합니다. 울진은 그 중심에서 난의 피해가 극심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해 8월 김언륜은 의병을 모아 덕천리 벌이골에서 왜군을 방어하였으나 군수의 부족으로 열세하자 쇠도리깨를 들고 육탄전을 벌이며 수많은 왜군들을 죽였고 이에 의병들이 힘을 얻어 3일간의 치열한 전투속에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무기의 부족과 원병이 전혀 없는 싸움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 28세입니다.

벌이골에는 계곡을 따라 피가 흘러 내렸고 전사한 의병과 병마, 왜군과 말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이 마분동(馬墳洞)’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장군의 죽음의 원인이 다른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였지요. 바로 토정 이지함의 조카 이산해(李山海, 1539~1609)’아계유고(鵝溪遺稿)’집 가운데 기성록(箕城錄)’편에서 장사의 원통함이라는 시에 나타난 김언륜 장군과 관계된 내용 때문입니다. 시의 내용에서 보면 적의 탄환에 전사한 것이 아닌 부정부패의 관리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 탐욕한 관리에 재물 바치기를 거부하자 모함하여 장군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문관에 무관은 대항할 수 없었고 벼슬도 낮았습니다. 장수보다는 선비를 더 위했던 조정의 정치색을 그대로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암튼, 원래의 묘소는 마분동 입구의 분투골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도로개설로 사라지게 되자 묘소의 모퉁이로 이전하여 어린아이 묘소처럼 만들어 지키게 됩니다. 묘소에는 김공언륜지묘라 새겨진 묘지서과 투구, 긴 칼등이 발견 되었으나 일본인이 수탈을 해갔습니다.

이 후 5번의 묘소이전이 진행 되면서 유해마저 사라지고 당시 묘소를 이루던 흙을 2010년에 흥부역사공원으로 이전하면서 기마상과 함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지금도 흥부 역사공원에서는

매해 413일이면 ‘4.13 흥부만세제를 펼치고, 매해 음력10월이면 북면 청년회에서 김언륜장군 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이었으면 더 좋았을 풍경,

그러나 그러한 궂은 날씨도 여행하기에 좋았던 울진의 여행길입니다. 더 선명한 색과 더 진한 삶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www.gilso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