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강화] 언제 찾아도 매력있는 절집, '정족산 전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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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인천광역시

2019. 2. 25.


잠시 들러도 언제나 매력있는 절집,

정족산 전등사

  인턴광역시 강화군 전등사로 37-41 / 032-937-0125

 

언제 찾아도 다른 모습의 절집,

계절과 시간을 타는 풍경,

그 운율에 따라 보는 눈은 매번 다르다.

보여주는 절집의 풍경은 또 다르다.

전등사는 그러한 매력을 가진 절집이다.

 

전등사 범종(보물 제 393호)

1097년 중국에서 제작된 종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많이 다른 면모를 보인다. 한때 일제 수탈에 의해 공출 되었으나, 광목 이후 부편에서 발견되었다.

많이 낡고 마모되어 현직에서는 물러나고 새로운 범종이 대조루 옆 동종각에 세워져 있다.


강화도 여행에 누구나 들러 가는 절집이 하나 있다. 바로 정족산 전등사.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11(381),

아도화상이 중국에서 건너와 신라로 가던 중, 강화에 머물면서 창건한 진종사(眞宗寺)’가 그 시작이다. 고려 충렬왕8(1282)에 들어 정화궁주가 인기스님을 통해 대장경과 함께 옥등을 시주하면서 등을 전하였다하여 전등사라 불리게 되었다. 조선 선조 때와 광해 때에 연이은 화재로 가람들이 모두 소실되었고, 이듬해 광해군7(1615)에 들어서 중창을 시작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른다.

동문


전등사 가는길


따지고 보면 국내 절집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절집으로,

세발 달린 솥을 엎어놓은 모양이라는 산세의 정족산(鼎足山)에 단군의 세 아들(三郞)이 토성을 쌓았으니 이를 삼랑성(三郞城)’이라 한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석성을 쌓았으며, 전등사는 정족산성 안에 자리한 전통 사찰로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도 왕실의 비호-까지는 아니지만 왕실의 도움을 많이 받은-를 받으며, 호국가람으로의 면모를 과시하는 사찰이 되었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전등사는 들을 거리와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역대 왕실의 피난처 역할을 해오던 강화도에 가궐들이 세워졌으며, 도처에 돈대를 설치하여 수력방어에 힘쓰게 된다. 자연스럽게 섬 안에도 산성을 쌓았는데, 산성 안에 자리한 전등사는 호국 가람의 역할도 수행한 절집으로, 1866년 프랑스 함대를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비각이 남문에 자리하며, 당시 병사들의 이름을 낙서처럼 기록한 글씨가 대웅전 내부에 남아 있다.

 

윤장대


대조루

절집의 불이문 역할을 하는 가람으로, 대웅보전을 향해 낮고, 위로 보게 되어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이게 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절집의 이름이 전등사라 불린 사연이 있다.

정신부주 왕씨(貞信府主 王氏, ? ~1319)’로 정화궁주로 더 알려진 한이 서린 이야기가 있다.

궁주는 고려 25대왕 충렬왕의 , 그 이전 이미 태자비로 책봉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왕으로 즉위하기 1년 전, 몽골(원나라)의 세조는 고려를 자신의 손아귀-사위로 삼는-에 넣기 위하여 자신의 딸을 태자의 아내로 보내게 된다. ‘장목왕후(莊穆王后)’라 불리는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1259~1297)’. 그로 인해 정화궁주는 제2비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듬해 장목왕후가 아들을 출산 하였고훗날 충선왕- 이날을 축하하기 위해 연화가 베풀어졌는데, 왕은 과거의 연을 잇고자 같은 궁주를 같은 위치의 자리에 앉게 하니 이를 두고 장목왕후는 노여워 성질을 부리며 기어이 자리를 옮기게 하였고, 궁주가 공주에게 술잔을 올리는 모습이 불편했던 왕을 향해 왜 흘겨보시느냐며 따지는 통에 연회는 끝나버렸다.

이 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40년을 제2비로 지내던 궁주, 그녀가 바로 정화궁주다.


그렇게 한을 간직하며 살던 궁주가 진종사에 들러 기도하던 중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자,

그 보답으로 인기스님을 통하여 경전을 구하여 옥등과 함께 전하니, 그 때부터 전등사로 절집의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정화궁주의 원찰이 되기도 했다.


 

대웅보전(보물 제178호)

광해군 13년에 지어진 정면3칸, 측면 3칸의 곡선이 심한 팔작지붕의 전등사 중심 가람이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안으로는 닫집의 화려함이 으뜸으로 천장에는 물고기를 양각해 놓았고, 밖으로는 '나부상', '동물조각', '연꽃조각'등의 다양한 장식등이 있다. 


나부상

대웅보전 처마 네 귀에 각각의 형태로  걸려 있다.




전등사에는 두 그루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데

이른바,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물리는 은행나무인데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다. , 수가 함께 있어 열매를 맺을 법도 한데,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다.

 

조선 철종때, 조정에서 전등사에 은행을 20가마를 공출하라 요구하였는데, 절집의 은행나무에서는 10가마의 은행밖에 생산이 되질 않았다. 이에 스님은 도력이 높기로 소문난 백련사 스님을 찾아 물으니, 추송스님은 직접 전등사를 찾아 기도를 드리겠다고 하자 일대에서는 도력 높은 스님이 절집에 나타났으니, 이제 은행나무에서 두 배는 더 열릴 것이라는 기대로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그로부터 3일 기도 후, “이제 이 은행나무에서는 더 이상 은행이 열리지 않을 것이다.”라며, 그 자리를 떠났다.


결국, 최상의 해결책이 된 셈이다. 그러한 연유로 전등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전한다.


 

정족서고



 





절집 대웅전의 나부상(裸婦像)’에 얽힌 전설도 흥미롭다.

1700년대 말, 당시 나라에서 으뜸가는 도편수가 대웅전 중축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고향 떠나 온지 오래되다보니 사하촌(寺下村:절집의 논밭을 빌어 농사를 짓는 민초들의 촌락)에 있는 주막을 드나들다 주모와 눈이 맞았다. 주모에게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두 전해주며, 일이 끝나는 대로 살림을 차리기로 기약을 한다. 그날을 손꼽으며 대웅전 불사를 마무리 짓던 막바지, 주모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동안 모아온 도편수의 돈을 들고 야반도주를 한 것이다.

배반감과 분노, 허탈함으로 며칠을 보내던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불사를 마무리 한다. 그러면서 대웅전 처마 네 곳에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었다. 모두 옷을 걸친 것과, 양손, 왼손, 오른손만으로 처마를 받드는 조각들로 모두가 제 각각의 표정이다.


야반도주한 주모를 능멸하려는 의도와 잘못을 뉘우치고 평생을 바르게 살라는 염원도 담긴 도편수의 해학-그 모습이 나부로 보이기도, 원숭이로 보이기도 하는-이 담겨 있는 것이다.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공간이지만 스님들도 그대로 두어 자비의 마음이든, 웃음을 짓던, 그저 편안하기를 바라는 절집의 미덕이라 하겠다.

 

고려 가궐지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도읍을 강화로 옮기면서 세운 궁궐터다.

왕의 임시 거주처를 전등사 내에 만들면서 국난극복을 위한 호국불교으ㅢ 요람으로 이어진다.



전등사 느티나무

수령 약 400년으로, 화재로 소실 된 절집을 중창하면서 풍치목으로 심은 나무다.




전등사 가는 길은 동문과 남문 두 곳이다.

어디로 들어서든 관계없으나 동문으로 드는 것이 호젓한 길과 만나 있어 주로 그 길로 들어선다. ‘양헌수 비각을 지나 숲길과 흙길의 여운이 지나고 나면 운장대를 지나치고, 의젓하게 서있는 대조루의 아래를 지나고 나면 절집 마당이다. ‘대웅보전이 정면에 서고 좌측 뒤로 약사전명부전의 전각들이 들어서있다. 그 끝으로 극락암명부전이 위에, 아래로 동종각이 서고, 그 아래로는 종무소로 사용되는 적묵당이다. 맞은편 마당으로 항아리가 멋스럽게 자리한 템플스테이 월송요’, 아래에는 무설전이고, 본당과 약사전의 사이 길로 오르면 삼성각이 그 뒤로 취향당정족서고.

 

일반 절집의 가람배치와는 많이 다른 모습으로, 많은 가람이 자리하다보니 번잡스럽기도 한데, 너른 마당이 주는 휑함이 있어 여유가 있고, 마당에 잘 자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허전함을 안아준다.

 

너른 공간이 아닌 만큼 많은 시간과 수고로움을 들이는 절집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벼이만 보기에는 아까운 절집이다. 세세하게 만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휘뚜루마뚜루 지나치면 아쉬운 절집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산책이기도 하며, 묵직한 마음으로 만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애닮은 이야기와 해학 넘치는 이야기가 공존하기도 한다.


매 계절, 시간마다의 다른 모습이기에 오늘과 내일의 풍경이 달라지는 매력이 그대로 남아있는 절집인 이유다.

 




,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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