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강화] 오래된 것들이 간직한 이야기들, '카페 조양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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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인천광역시

2019. 2. 28.


오래된 것들이 간직한 이야기들,

카페, 조양방직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향나무길5번길 12 / 032-933-2192

 

옛 건물이 간직한 이야기들,

문화재까지는 아니지만,

보존할만한 가치를 지닌 옛 건물.

비록 낡고 비루하지만

그 속에 품은 지난 이야기들은 결코 소소하지 않았다.

 



벌써 3번째 방문이다.

처음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나는 길에, 두 번째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함께, 그리고 이번에는 홀로다. 처음 방문 때의 감탄은 잊을 수가 없다. 드넓은 공간의 옛 방직공장의 내부를 온전히 간직하면서 잘 정리된 선반들의 자연스러움에 놀라웠다. 공간속의 뜬금없는 어린이들의 놀이터와 같은 또 하나의 공간에 놀랐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야외 전시장(?)의 멋스러움에 놀라웠다.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거리낌 없는 자연스러움에 놀랐다. 카페 조양방직을 찾을 때마다 그 놀라움은 여전하다.


두 번째 방문에서는 허전함을 느꼈다.

높은 지붕과 드넓은 공간이 주는 허전함이 아닌 듯하다. 옛 건물이 주는 아스라한, 그러한 이야기 한 줄 정도는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분위기인데, 조양방직에는 그 어떤 내용도, 이야기도 없다. 진한 원두커피의 향이 그 빈 공간을 메우기에는 부족했다.


 




조양방직의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강화 최대 지주였던 홍씨 일가가 있었다. 홍씨 집안의 논은 180만평의 규모를 넘어섰으며 소작인만 3천여명이 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들면서 강화지역 최대지주인 홍씨 가문은 쌀의 대일 수출을 전제로 지주경영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자국의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고자 경기도와 강화도에서 생산된 상당량의 쌀을 일본으로 보냈다. 당시 개통된 수인선은 경기, 강화 일대의 쌀을 인천항으로 옮기기 위한 것이었다. (신편강화사, 강화문화원)

 

홍씨 가문은 노블레스 오블리제 (noblesse oblige)’의 대지주들이었다.

1920년대 까지 토지사업을 벌이던 일본은 1934년에 들어서는 조선농지령을 공포한다. 겉으로는 소작인들을 위함이었으나, 대지주와 결탁한 이른바 소작농 죽이기의 일환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소작인들의 반발이 일어나게 되는데, 강화도에서는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유인 즉, 소작인에게 높은 이율의 소작료를 메기지 않았으며, 일제에 의한 폭압적인 수탈들도 막아냈기 때문이다.

일제의 농지령과 세금들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미천한 쌀값에 일제에 넘기더라도 그 손해를 소작인에게 떠넘기지 않았다. 또한, 홍씨 가문은 강화 지역에 재해가 날 때에도 자선금을 내어 공익을 우선했으며, 동정금으로 어려운 소작농을 돕기도 했다.

이는 민초를 위한 대지주로서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진 것이다.


 




그러나 농지령 공포와 함께 일제의 저미가 정책에 홍씨 가문도 타격을 입게 되고, 쌀값 하락으로 이어지면서 지주 경영은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결국은 모든 것이 일제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이 때, 쌀농사의 공황으로 인한 타개책으로 산업자본으로의 전환을 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조양방직이었다.

 

19358, 홍재묵(사장), 홍재용(부사장) 형제가 출자하여 인조견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설립당시 125,000(현 시가 60억원)의 규모였으며, 700여 평의 2층 건물에 50여대의 직조기를 갖추고 인견, 마직물 염색을 주로 하였다. 이는 강화 지역의 전체적인 살림살이를 높이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노동자를 위한 산재보험도 마련하였다고 하니 대 지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중앙일보 1935.08.16자에는 조양방적, 출자금 50만원, 건평 150평으로 기록) 

 

그러나 조양방직의 운명은 순탄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폭압이 계속 되었고, 그나마 1939년에 원인을 모르는 큰 불로 가동이 중단 되었고, 1942년 당시 미쓰비시 산업에서 일하던 이세현에게 공장을 넘기게 된다. 그렇게 대지주와 소작관계가 사장과 노동자가 되어 운영되던 강화도 유일의 봉건적 경영형태의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그렇게 공장은 운영 되어오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공장에서 생산된 인조견은 품질이 좋아 중국에 까지 수출을 하는 등의 성과를 보이면서 이즈음 조양방직 주위로 60여개의 직물공장이 들어섰으며, 4,000여명이 일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양방직은 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해방이후, 홍씨 가문이었던 홍재승이 강화치안대장을 맡았고, 전 부사장이던 홍재용은 제2대 강화군수로 재직 중이었다. 허나 강화군수였던 홍재용이 납북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일을 계기로 조양방직에서 일민주의 청년동지회가 결성이 되고, 공장은 우익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로서 사실상의 방직 산업은 원활하지 못했을 것으로 전쟁당시의 상황과 후유증이 맞물리기도 하였고, 직물산업의 사양길에 들어서면서 1958, ‘조양방직은 폐업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강화를 대표하는 직물회사인 심도직물로 넘어갔으나, 다른 형태로 활용되다가 현대에 들어서면서 버려진 공간이 되었다. (증보강화사, 강화문화원)


 




그러던 2017, 인사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이용철 사장이 공장 일대를 매입하고, 1년여 동안 주요 건축물은 그대로 보전하고, 안전을 위한 보수작업을 통하여 2018, 새로운 모습의 카페 조양방직이 들어섰다.

 

조양방직의 이름의 공장 입구인 창고를 거쳐 보일러실(카운터)을 지나면 공장(실내)이다.

넓디넓은 공간은 옛 방직공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였고, 사장님의 빈티지한 소품들로 가득 채워졌다. 방직공들이 중앙 선반을 따라 길게 앉아 작업했을 공간이 중심부에 길게 이어지고, 얼룩진 나무 벽과 노출된 시멘트, 나무기둥과 맞닿은 나무들보들의 모습이 시원스럽다. 야외 전시장 역시 추위가 물러간다면 어느 곳이든 앉을 자리가 된다.

 

있는 그대로의 옛 모습을 간직한 공간,

자연스러움이 차라리 자연스러운 공간, 더하여 지금의 모습이 가장 좋은 공간이다. 뭔지 모를 허전함은 언젠가 메꿔지기를 기대한다.


 




이 글은 강화뉴스’, ‘통일뉴스의 자료를 기반 하였습니다. 잘못 된 부분 알려주시면 정정하겠습니다.※

 

 



,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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