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내곡동] 돌보살의 은은한 미소가 이리도 아름다울수가 있나, '신복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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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 旅行自由]/강원도

2019. 10. 7.

공허함이 아름다운 옛 절터,

신복사지(神福寺址)’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 403-2

 

설화만이 남은 터()가 있다.

옛 절터가 남긴 흔적은 석물뿐이다.

석탑과 보살좌상,

평온한 보살의 표정을 내려보는 석탑의 든든함이

잘 어울리는 신복사지의 풍경이다.

 


신라 때 양가집 딸이 굴산에 살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도록 시집을 가지 못하고 우물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햇빛이 뱃속을 비추자 돌연히 산기가 있었다.

지아비가 없이 아들을 낳자 집안사람들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아기를 얼음위에다 버리니 새들이 날아와 아기를 덮어 감싸고 밤이 되어 상서로운 빛이 하늘에 비치자 아기를 도로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범일이라 하였다.

나이가 들어 성장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니 신통하고 부처의 세계에 든 것 같아 오묘한 조화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신복과 굴산 두 산에다가 두 개의 큰 절을 창건하고 탑산을 축조하여 지맥을 보충하였다.

후에 오대산에 은거하다가 입적하였다.

이는 강릉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를 집대성한 강릉시사 상편, 증수영림지에 나오는 범일에 관한 설화다.


범일(梵日, 810~889)’은 신라의 승려로 신라시대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를 만들었으며, 15세에 출가하여 당나라로 떠났다가 847년 신라로 돌아와 경주에 머물다가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두 개의 절집을 세우니, ‘굴산사신복사.

 

신복사지 전경


오늘은 먼저 신복사지(神福寺址)’를 둘러보기로 한다.

내곡동 119안전센터 뒤편의 작은 길을 따라 오르면 신사임당 어린이집을 지나 좌측에 절터가 자리하고 있다.

너른 사지에 남아있는 것은 하단의 삼층석탑과 석불좌상뿐이다. 그마저도 테두리로 가두어 놓아 절터의 휑함은 더욱 넓어 보인다. 그래도 쓸쓸해 보이지 않는 자리다. 오히려 좋은 기운이 모여 있는 모양새다. 드나드는 길 쪽을 제외하면 울창한 숲으로 막혀 있어 조용하다.


터진 길이 좁은 것이 아니다. 숨기려 하지 않았으며, 가리려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내어 보이는 여유를 부리는 곳으로 홀로 앉아 사색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절터의 용혈이 흐르는 좋은 기운이 왕성하여, 한동안 복을 찾는 곳심복(尋福)’ 혹은 신이 앉은 땅이라 하여 신복(神伏)’이라 불렸는데, 일제강점기에 정비를 하면서 신복(神福)’이라고 쓰인 기와가 발견되면서 신복사(神福寺)임이 밝혀졌다.

이 후 2~3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총 3단의 절터의 중단에 대웅전이, 석탑의 양편으로 가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북서향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이러한 가람배치로 인하여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절집의 형식이며, 조선 중기에 폐사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50(문성왕12), 설화 속 범일의 창건에도 끝내 세대를 잇지 못한 절집의 터에는 현재 삼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이 보물 제87, 보물 제84호로 지정되어 남아있다.

 

신복사지 삼층석탑(神福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87)’

화강암의 석탑으로 높이 4.55m. 2층의 기단(基壇)을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것으로, 각 부분의 모습들이 특이하다. 바닥 돌의 윗면에는 연꽃이 엎드려 있는 듯한 조각을 새겨 넣었고, 아래층 기단의 4면에는 안상(眼象)3개씩 새겨 넣었다.

탑신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얹어 놓았다. 탑신에는 부처의 사리나 불경 등을 모셔 두는데, 1층의 몸돌에 이를 안치하는 방인 감실(龕室) 모양의 조각이 있다. 1층의 몸돌에 비해 2, 3층은 갑자기 그 크기가 줄어들어 매우 얇다.

지붕돌 역시 얇아서 귀퉁이 끝은 치켜올림이 희미하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3단이다. 상륜부는 온전히 남아 있는데 각 부분의 높이에 비해 폭이 넓어 안정감을 준다.

탑의 기단과 몸돌의 각 층 밑에는 널돌로 괴임을 넣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에 보이는 형태 중 하나이다. 또한 아래층 기단에 안상이 새겨진 것이나,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가 3단인 점도 고려 전기의 석탑 양식을 잘 따르고 있다.

[출처 : 강릉디지털문화대전]



잘 생긴 삼층석탑은 보살좌상의 앞에 늠름하게 서 있다.

더하지 않고 모나지 않은 삼층석탑은 안정적이다. 웅장하지 않지만 당당하다. 당당함이 더해져 믿음직스럽다. 기운으로 기를 눌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운으로 끌어 들인다. 참 잘생긴 석탑이다.


그를 바라보는 보살좌상의 얼굴은 만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비웃거나 남루한 웃음이 아닌 가득 퍼져 있는 온화한 미소다. 한 낮 석물에 불과한 돌 조각이건만, 옛 사람들의 솜씨는 놀라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저러한 미소를 조각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석공의 표정이 닮은 보살상의 모습이리라, 일그러짐 없는 미소, 둥글게 퍼진 풍성한 미소는 그 어떤 불미스러움도 숨어 있지 않다. 옅은 미소로 석탑을 향해 두 손 모아 공양하는 보살의 모습은 그저 바람이 없는 평온한 공양, 기도 일뿐이다.

참 보기 좋은 모습, 보는 사람이 오히려 평온해지는 풍경, 신복사지의 석탑과 보살좌상은 그리도 잘 어울린다. 그리도 사람의 가슴속에 파고든다. 그리고 그리도 아름다웠다.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神福寺址 石造菩薩坐像, 보물 제84)’

삼층석탑을 향하여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보살상을 표현하고 있는데, ··하대석을 구비한 8각형의 대좌 위에서 탑을 향해 왼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발은 꿇어앉은 공양상(供養像)의 자세이다. 원통형의 높다란 관()을 쓰고 있는 얼굴은 미소를 가득 머금어 부드럽고 복스러우며, 체구도 풍만하다. 관 밑으로 드러난 머리카락은 어깨너머로 길게 늘어져 있으며, 양 어깨에서부터 걸쳐 내려진 옷자락은 몸의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보살상의 사실성을 더해준다. 왼팔은 왼쪽 무릎에 걸치고 오른손을 마주 잡아 가슴에 모아 붙이고 있다. 가슴에 모은 두 손에는 철심이 남아 있어 원래 지물을 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양식과 조각 수법, 풍만한 몸의 굴곡을 잘 표현한 옷자락과 단순해진 장신구, 신복사지 삼층석탑과의 관계, 그리고 월정사 9층석탑 및 보살상과 비교해 보았을 때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은 동시기인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 강릉디지털문화대전]



언젠가 깊은 가을에 한번 찾은 적이 있던 신복사지’.

한 여름의 끄트머리에서 다시 찾은 절터는 여전히 휑하다. 그리고 그리도 조용하다. 메마르지 않은 공허함이 절터에 부는 바람과 함께한다. 비리지 않은, 역겹지도 않은 공허, 어떠한 욕심도 없고, 상처도 없다. 소원과 같은 쓸데없는 희망도 없다. 공허속의 허공에서는 남아 있는 옛 절터의 기운이 상상 속에서 그려진다. 자박자박 거니는 스님들의 흙길 걷는 소리, 아니면 어느 늙어버린 노스님의 잔잔한 독경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은은해지는 풍경소리여도 좋겠다.


옛 절터를 찾는 여행은 그러한 공허함의 아름다움에 있다. 무슨 상상을 하든, 하고 싶든지 옛 사지는 기분 좋은 공허함을 준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공허함을 사랑한다.

 




,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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