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612 identity/인간의 무늬-人文

    B612임수영 2014. 7. 7. 19:15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다]

     

    주사위던지기를 '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학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학자들은 주사위를 100번정도 던져서 숫자1이 나올 확률을 따지고, 통계를 얻는것에 의미를 둔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번 나오는 숫자1이 다 새롭다.
    그것이 떨어질때마다 상황은 달라진다.
    매번 나오는 숫자1이 다른것임을 아이들은 알고있다
     
    둘다 반복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학자들은 그것을 통해 동일성의 반복,확인을 하고
    아이들은 차이의 반복을 통해 새로움을 느낀다. 

     
    동일성의 반복을 확인하면
    무언가 생겨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상실한다.
    그것을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구속한다. 
     
    우리의 삶이 반복되는 주사위라면  집중해야할 것은 '주사위대상이나 숫자의 눈'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던지고 땅을 향해 떨어지는 '과정'
     바로 주사위놀이 그자체다. 
     
    아이들은 연속해서 나온 똑같은 숫자를 보고도
    다른  즐거움을 경험한다.
    반복되는 놀이에서 생산되는 것은  반복되는 차이다. 
     
    매번 주사위가 던져지는 세상,
    주사위를 던지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알수없다. 
     
    중요한 것은 용기를 내는 것.
    누군가가 학자들의 필연의 법칙을 들이밀며
    겁준다고 해도 과감하게 굴하지 않고 주사위를 던져야한다. 
     
    주사위는 누군가를 위해 던지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의 나은 삶을 위해,
    삶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힘껏 주사위를 던져야한다. 

     

    반드시 존재하는 행복도 선택하고 결정..행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사위놀이를 할수록 건강해지는 것은 던지는 사람..나 자신이다.

    나 자신을 위한 행동..생산적 활동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로 해석된다.

    그 즐거움이 지속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된다.

     

     

    [사자가 못한 일을 어린아이가 한다]

    산에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가 사람들에게 전한 첫 선물은 '신의 죽음' 이었다.

    "신은 죽었다.  이제 너희들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위버멘쉬'를 직접 가르친 것이 아니라.

    '위버멘쉬'를 이해하기 위해서 새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들에 대해 가르친 것이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서 공식적 첫번째 수업내용은 무엇이었는가?

    바로 변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처음 낙타가 되고, 낙타에서 사자, 마침내 사자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정신의 변신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첫번째 동물은 낙타다.

    이미 알고 있듯이 낙타는 인내력이 아주 강한 동물이다.

    사막의 더위 정도로는 그를 쓰러뜨릴 수 없다.

    설령 오아시스가 며칠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그는 끄덕없다.

    그가 사람을 태우거나 물건을 실을때 얼마나 많이 무릅을 꿇었는지..그의 무릅의 굳은 살이 말해준다.

    그는 정말로 공경심이 강하고 예의 바른 착한 동물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이 동물의 그 자신의 마음, 특히 그 자존심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었을지 생각해 본다.

    그는 무릅을 자주 꿇어 주인의 자존심을 영광되게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자존심에는 큰 상처를 주었다.

    이 동물이 주인에게 한 번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나는 이 착한 동물이 자기 삶에 얼마나 못된 고문을 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그의 희생은 정말 그의 착한 마음씨에서 온 것인가.

    혹시 희생이라 부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기 삶을 고된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닐까.

     

    자기 스스로가 삶을 '견뎌야 할' 고통으로 만들어 놓고 '삶은 고된 것이다'라는 말을 진리라고 믿는건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사막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중력의 영은 그런 착한 당신을 원한다고.

    이들은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감별해낼 수 없어서 무엇을 줘도 "예"하고 받는다.

    (중력의 영 : 스스로를 왜소해지도록  끌어당기는 영 / 인간을 규제하는 강제, 율법, 필요와 귀결, 목적가 의지, 선과 악을 규정지어 점점 작은 존재로 만든다)

     

     

    두번째 단계인 동물인 사자를 소개한다.

    나는 이 동물처럼 남의 말을 안 듣는 동물을 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시키려 하면 우선 으르렁거리기부터 한다.

    이 동물에겐 자유를 향한 열망이 있다.

    만약 아까 그 낙타가 변신에 성공해서 사자가 되었다면, 그는 이제 더 이상 어떤 주인도 섬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사막을 자기의 왕국으로 만들 것이다.

    아마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너는 해야만 한다." '이것만은 지켜야한다."라는 의무나 당위에 대해 말할 것이다.

    도덕.법.관습.제도의 목소리로 옳고 그름, 귀하고 천함은 오로지 신이 정하는 거라며 따르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 사자는 으르렁거리며 "나는 하고 싶다."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따를 것이다.

     

    그럼 절대 권위를 가진 이는 말한다.

    "모든 가치는 이미 창조되었고, 이 창조된 일체의 가치, 그것이 바로 나다"라며 위협, 협박, 강제가 있을 것이다.

    외롭고 굶주리고 고독하더라도 용기를 내는 것. 바로 사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자는 절대 권력자와 격렬히 싸우지만. 완전히 물리칠 수가 없다.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지만 계속 되는 싸움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낙타처럼 삶을 사막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삶 역시 웃고 즐길 만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절대권력에 맞서 '나는 싫다'고 반항했지만 그리고 나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말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싫어하는 것만을 알고 있었을 뿐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많이 알고 있지 못했다.

    자유를 찾아왔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몰랐다.

     

     

    세번째 단계, 정신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어린아이는 욕망에 충실하다.

    도덕이나 법률, 제도는 아이의 행동을 심판할 수 없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을 뿐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없다. 그는 비도덕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그가 악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라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도덕을 갖고 있지도 않다는 의미이다.

     

    사자와의 차이를 알겠는가?  아이는 으르렁대지 않는다.

    그냥 웃을뿐이다. 절대 권력 앞에서도 그냥 웃음을 짓는다.

    모든 것은 그들에게 장난감으로 보인다.

    아이의 무기는 으르렁이 아니라 웃음이다.

    "아이의 정신으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스스로 자기 욕망에 주인인 자만이 자기 세계를 갖는다.

     

    (그때 청중 중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걸 잊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른이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다.

    "우리 안에는 어린아이가 있다. 우리 안에는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낙타도 있고 사자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가 그 모든 것을 제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구름 한 점 없이 확 트인 하늘처럼 "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폭풍처럼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네게 주었다.

     

    새로운 사원을 건설하고 싶은 자는 낡은 사원을 부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삶을 조각하고 싶은 자는 낡은 삶을 지워낼 수밖에 없다.

    긍정안에 있는 부정은 사자의 부정과는 다른 것이다.

     

    (자 여기 망치가 하나 놓여 있다. 

    이것은 긍정의 도구인가 부정의 도구인가. 이것은 창조와 생성의 도구인가 파괴와 해체의 도구인가?)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그 다음을 보아야 한다.

    망치가 무너뜨린 건물 자리에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파괴를 하고 있을 때조차 창조와 생성의 도구이다.

    그것은 부정의 도구가 아니라 긍정의 도구이다.

     

    누군가 현재의 삶에서 일탈하고 있다면 그것은 긍정일까 부정일까?

    그가 단순히 현실에서 도피했을 뿐이라면 그것은 부정이지만 그가 새로운 삶을 생성시키고 있다면 긍정이다.

     

    우리는 긍정의 아주 중요한 성질을 발견한다.

    어떤 행위가 긍정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음의 긍정에 의해 긍정될 때이다.

    파괴가 긍정의 질을 갖기 위해서는 다음 번 생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 번의 생성은 다음 번의 생성에 의해 다시 긍정의 질을 획득한다.

    한번의 생성으로 그친다면 다음 번부터 그것은 집착을 의미하게 된다.

    긍정은 꼭 다음 번의 긍정을 불러 온다.

    긍정은 자신을 긍정해 줄 긍정이 계속 반복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우리는 자주 오해를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계속 자라고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허물을 벗고 봄마다 새로운 껍질을 입는다.

    우리는 계속해서 젊어지고, 더 커지고, 더 강해진다. (즐거운 지식)

     

    인간이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고 주목할 수도 없었던 것.  바로 인간 자신이다.

    모든 것의 존재의 원인으로 간주되어 왔던 신의 존재. 그 원인이 인간이다.

    황혼녁에 드리워진 자신의 긴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 그것을 섬기고 있는 게 아닐까.

    행위가 이루어진 후..결과, 극복의 방법으로 신을 출현시킨 것이다.

    '위대한 정오' 그 시간은 자기 '그림자의 그림자'로 존재했던 인간이 스스로를 극복, 위버멘쉬의 시간이다.

    '위버멘쉬'라는 말 자체가 인간을 넘어섬. 인간을 극복함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결국 인간이다.  인간이 인간을 극복할 수 있는가. 꿈꾸는 자가 스스로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가.

     

    우리는 먼저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자신을 지구, 아니 우주의 특별한 존재로 느끼는 인간의 놀라운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약 우주에서 누군가 지구 대표를 보내달라고 하면 인간은 자기 이름을 부른 줄로 알고 뛰쳐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생물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들이 과연 자신들과 공존할 줄 모르는 망나니를 대표선수로 인정해 줄까?

    만약 어떤 생물이 일어나서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다수결로 하자고 하며 어떻게 할 것인가?

    무식하게 힘으로 붙어보자고 할 텐가.

     

    니체는 지구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는 인간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숲 속 개미도 숲의 존재 목적이 자기 자신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지구 나이가 몇인지 알고나 있는가?

    지구라는 행성이 인간을 낳기 위해 그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은 "세계의 코미디언"이다.

     

    근대 이전에는 인간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책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19세기에 와서 인간을 하나의 종으로 사유해서 질문을 던진다.

    칸트는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원해도 좋은가' 

    여기서 '우리'라는 말은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가리킨다.

    생물학은 진화론을 통해 진화의 정점에 있는 인간을 발견했고,

    경제학은 '노동가치설'을 통해 가치의 원천인 노동의 주체로서 인간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인간에 대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 인문학이란 말도 생겨났다.

     

    인간은 자신의 잣대로 자연을 측량하면서 자신이 그 주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잣대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척도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자연은 인간이 자연의 이름을 부를 때 느끼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척도와 맞지 않는 자연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망각은 세계안에 존재하면서도 세계를 자신의 저울대 위해 제멋대로 올려 놓을 수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오만함과 연관되어 있다.

    니체는 "마치 (인간 세계)가 '과'라고 하는 귀여운 글자에 의해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작은 글자에는 인간의 뻔뻔함이 들어있다."<즐거운 지식>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너희들이 '인간적' 이라며 자부심을 갖는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라.

    너희가 그것들을 다시 느낄 때에 비로서 너희는 이전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너희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희는 스스로를 결코 극복할 수 없다.

     

    인간의 변신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은 인간 자신의 오만이다.

    자신보다 나은 존재의 출현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그 자체로 위대한 자이고 싶어한다.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현실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미래가 만들어 질 수 있는 출발점이 된다.

    '보다 높은 인간들'은 모두 '인간적인 것'에 대한 경멸을 보여 주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데 주저했다.

    그들은 '인간적인 것' 을 비웃은 것까지만 할 뿐 막상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에 대한 넘어섬은 역시 '인간'인 자신들까지 넘어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변신이라는 불확실한 과정에 자신을 내맡기기보다는 뭔가 의지할 것을 찾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쪽을 택한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 이 아니라 '자기극복' 이라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보다 높은 인간들'은 두려움에 무서워 모두 달아났으나 차라투스트라의 마음속은 지극히 평화로웠다.

    차라투스트라에게 마지막 깨달음은 '연민' 과 '집착' 에 대한 것이었다.

    구원해주고 싶은 그 누군가에 대한 연민과 집착, 이 모든 것들이 매 순간의 변신을 가로막고 있음을 깨우친 것이다.

     

    위버멘쉬라는 말은 숨쉬고 있는 생물학적 존재인 사람들의 사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많은 규정들이 있다.

    그런 규정들은 '우리'를 만들어 주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들이다.

    위버멘쉬란 이런 규정들로부터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장자..도를 행하는것은 자기의 신념을 날마다 하나씩 버리는것. 니체와 흡사한 장자는 누구인가..떱떱)

     

    위버멘쉬라는 말속에 '넘어섬'이라는 단어는 사실상 '변신'을 뜻한다.

    이 '넘어섬'은 한 번으로 끝나는 걸까?

    변신은 한번으로 족한가?

    차라투스트라는 자기극복을 한 번이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을 규정하는 정체성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정체성 자체를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것을 요구한다.

     

    "정체성을 극복하는 것만을 정체성으로 갖는다"

    그래서 위버멘쉬를 동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위버멘쉬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 혹은 '인간적인 것'으로 변신하기

    정체성의 끊임없는 변화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