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 피는 창가

춘농로중 2014. 10. 27. 20:56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이었던 것 같다. 당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석유로 등잔에 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던 시절이었다. 우리 마을까지 들어오는 신작로는 우마차가 겨우 한 대 지나다닐 정도의 길이었다. 신작로는 여름철이 되면 잡초들이 마구잡이로 자라나고 소똥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어 소똥구리들도 간간이 볼 수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질퍽거려서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마을의 첫 집인 우리 집까지만 우마차가 들어올 수 있어서, 마을 안쪽에 사는 사람들은 짐을 나르려면 지게로 일일이 우리마당까지 날라야 했다. 마을 사람들은 대개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마실을 다니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돌아가 잠을 자는 식이었다.

 초가삼간인 우리 집의 마루 끝에 나무 기둥이 있는데, 그 꼭대기에 라디오 스피커가 걸려있었다. 나무상자에 앞면에 천으로 둘러 있고 라디오 소리를 조정하는 버튼만 달려있다. 스피커에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오니까 누나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한테 “저 스피커 속에 사람이 몇 명이나 들어있어요?” 하고 물어 보았다고 한다.

 유선라디오가 마을에 들어오기까지는 면 소재지에 있는 라디오 전파상에서부터 긴 대나무나 나무기둥을 전봇대처럼 30~50m 간격으로 세워서 삐삐선을 연결하여 온 것이다. 지금 일개 면의 전역에 걸쳐 그런 작업을 하려면 인건비가 엄청나게 들어 갈 것이다.

 방송은 오로지 1개 방송만 송출이 되었다. 지금의 KBS 1방송이다. 그러니까 스피커의 기능은 라디오를 틀고, 끄고, 소리를 크게, 작게 하는 것 뿐이었다. 당시의 방송으로서 기억나는 것은 아침에 10분 연속극으로 “안녕하세요”다. 서울의 한 가정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회사에 다니는 아빠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자녀로서 아들 상수와 딸 상희가 등장인물이다. 시골에서 자라는 나로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상수와 상희가 “아빠, 엄마!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고 인사하는 것이 대개 낯설었다. 시골에서는 일어나면 눈만 비볐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답을 할때도 “네!”하는 대답이다. “예”로만 쓰다가 다른 친구들이 라디오 방송을 듣고 “네”하면 몸에 알레르기라도 난 것 같기도 했다. 또 다른 프로로는 낮 11시 50분 쯤에 하는 “김삿갓 방랑기”, 또 밤에 하는 “전설따라 삼천리”도 재미있었다. 처녀귀신이 나와 요사스런 웃음소리를 내면 그 날 저녁에는 무서워서 변소가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유선라디오를 집에다 달면 그 청취 댓가로 여름에는 겉보리로, 겨울철에는 농사지은 벼로 내게 됐다. 그런데 사정이 어려운 집에서는 그 마저도 낼 형편이 안 될 때, 유선방송업주는 라디오를 떼어 가겠다고 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유선라디오 방송의 기능은 라디오 청취 뿐만 아니었다. 지금은 시골 구석까지 대중교통이 운행되고 한 집에 자동차 한 대쯤은 소유하고 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당시는 밤이 되면 가로등이 없으므로 암흑천지였다. 그래서 장을 보다가 늦거나 먼 걸음을 해서 늦게 오는 경우는 낭패였다. 그럴 때 유선방송사에 가서 방송을 해달라고 하면 유선라디오에 그대로 전달이 되는 것이다. “아! 아! 안내방송 드립니다. 00리 00마을에 사시는 아무게 아버지는 따님이 지금 귀가하고 있으니 아리랑고개까지 마중 나오시기 바랍니다. ” 나의 누나 같은 경우도 이웃마을에 묘목을 심으러 갔다가 일을 마치고 시간이 남아서 은산천에서 조개를 잡게 되었다. 잘 잡히니까 재미도 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잡다가 그만 해가 떨어지는 바람에 유선방송국의 방송으로 연락되어 집에 돌아 온 경우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유선라디오 방송은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막을 내렸다.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나오면서 조그만 배터리로도 라디오를 잘 들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지이익 직”대며 잡소리도 많이 나던 유선라디오에서 이제 방송사도 여러 군데가 나오는 것이었다. 민영방송은 대전MBC는 계룡산에 가로 막혀서 잘 나오지 않았고, 군산에 있는 서해방송이 잘 잡혔다.

 유선방송라디오는 7~8년 정도 운영되었으리라 본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에게 일기예보나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연속극과 노래와 음악으로 즐거움을 선사했던 기억이 난다.

 

저도 라디오 속에 사람이 여럿 들어있는 줄 알았지요.
어느날 아버님께서 라면 상자 반 정도 크기의 라디오를 사오셨는데
너무 기뻐서 매일 걸레로 먼지를 닦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 '감삿갓 방랑기', 라든가 '법창야화'를 자주 들었지요. ㅎ
'법창야화'도 생각이 나네요.
그 방송에서 '거창학살사건'을 들은 듯
하네요. 커서 거창에 가보니 사과가 아주
맛있었읍니다.
라디오를 틀어 놓고 육체적인 일을 하면 훨씬 능률적입니다.
양계장에다도 라디오를 틀어 주는 것을 보았네요.
계란이 순풍순풍나온다고 합니다.^^
김삿갓 방랑기와 전설따라 삼천리, 법창야화 등등 저도 듣던 기억이 있네요.
특유의 억양과 리듬...ㅎ
저는 유선라디오에 대한 기억은 모르겠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들었었지요.
배터리를 라디오의 뒤에 붙여 고무줄로 묶어 두었던...
배터리의 무게때문에 라디오가 배를 불룩하게 내밀고 뒤로 자빠질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요. ㅎ

이야기 속에서 참 기억력이 좋으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
고무줄은 꼭 애기지저귀를 찰 때
쓰는 노란것도 자주 썼지요.
문명의 발전으로 나룻터의 배가
다리를 놓으므로써 슬며시 사라지듯
배터리로 인해 유선방송국이 사라질 때
전선을 이었던 장대나무를 철거할 때
종사하는 사람의 힘이 많이 빠졌으리라 봅니다.
물론 전화위복되어 더 큰 사업으로 발전했겠지만요. ......

자민선생님의 기억력도 대단하십니다. ^^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도 어릴 때 시골에서 자랐고 농로중님의 묘사에서 제 고향으로 보는 듯 합니다
제가 국민학교 3학년 때 마을에 전기가 들어왔고, 그 전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갖고 있는 집이
부유한 집이었습니다
그 라디오로 사랑의 계절을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김자옥의 아름다운 목소리로 들었어요. 그런데 어제 별세 소식을 듣고 세월의 무상함을 잠시 느꼈습니다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 것 같았거든요
글에 쓰신 전설따라 삼천리, 저도 꽤 오래 들었습니다 ^^

인사 드립니다.
언덕에서 님의 블로그에서 찾아왔습니다
반갑습니다. 홍애선생님!
전기가 우리 동네보다 훨씬 빨리 들어갔네요.
전기불이 들어오는 집에 놀러가면 밤이 대낮처럼 환해서
공부할 때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러워했습니다.
김자옥씨가 성우도 하여 큰 상도 받았더군요.
저는 성우까지 했는지는 몰랐습니다.
상대배역이 이 정길씨와 잘 어울렸던 것 같아요.

앞으로 자주 뵙도록 하지요. ^^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