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춘농로중 2018. 10. 17. 13:17


   옛날 안적이라는 사람이 한 마을을 지나다가 봉이 앉아서 우는 소리가 마음에 들어 안씨가 정착한 곳이라 하여 안재울(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금공리)이라 부른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이팔청춘인 꽃다운 아가씨가 꽃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다. 때는 1943년! 해방되기 이태 전이었다. 살구 꽃 피는 봄 날에 꾀꼬리 소리가 들렸다. 첫 날 밤을 생각하니 설레기도 하고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약간은 두렵기도 했다. 가마 속에 있는 어린 신부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첫 날 밤보다 더 두려운 걱정이 태산처럼 밀려왔다. 시어머니가 호랑이로 소문이 나있기 때문이다. 가마꾼들이 쉬는 틈을 호시탐탐 노렸다. 그러나 도망을 가려다가 붙잡혀서 시집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기도 했다. 이미 맏며느리는 호랑이 시어머니에게 첫 딸과 함께 쫓겨난 판이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시집오셨다.  호랑이 시어머니에게 몇 번이나 집을 나가라는 호통과 모진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견디며 버티셨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하고 힘이 장사셨다. 나무를 제재하는 기술이 탁월해서 근동 에서는 알아주는 기술자이기에 돈을 많이 벌수가 있었다. 아버지가 넓은 집과 밭을 사면, 할머니와 큰 아버지가 와서 가구를 때려 부쉈다. 집과 전답을 내놓으라고 해서 모양새가 안 좋은 큰아버지의 집과 맞바꿔 살아야 했다. 큰아버지는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내다 40대 초반에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께

“제수씨! 그 동안 내가 한 행동을 미안하게 생각해유. 그럼에도 이렇게 편히 떠나게 해주니 제수씨는 큰 복을 받을 것이 구만유.”

라고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추운 겨울날인 크리스마스 때 작고하셨다. 내가 다섯 살 때였는데 큰아버지의 장례를 어머니가 주관하여 치루셨다.

 

  어머니는 슬하에 4남 2녀를 낳으셨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누구네 집 애들은 착하다”

는 말을 듣도록 행동하라고 교육하셨다. 그리고

‘청결하게 살아라. 아픈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마라’

라는 말씀도 하셨다. 매일 같이 개미처럼 쓸고 닦고, 상수도가 없던 그 시절 부엌에 있는 물독에 물이 철철 넘치도록 물을 길어 놓으셨다. 어머니는 한 평생 자식농사에 손끝발끝이 갈라지셨다.

 

  어머니는 꽃을 매우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멀리 직장에 나가셔서 어머니가 농사일을 하면서도 화단에 늘 꽃을 피웠다. 어머니는 벚꽃 구경하는 것을 무척 즐거워하셨다. 해마다 봄이 되면 경주 보문관광단지에서 벚꽃마라톤대회가 열렸다. 어머니께서는

“애비야! 마라송(어머니 발음)하러 언제 가니?”

하고 물으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마라톤여행을 떠났다. 울산에서 사는 누나와 자형이 영덕대게와 해산물, 잘 익은 포도주를 푸짐하게 싸오신다. 콘도에서 만나 얘기를 나누며 맛있게 먹다 보면 어느 새 밤이 깊어갔다. 창 밖에는 벚꽃이 흰 눈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우리의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았다. 이튿 날 아침에 나는 보문호의 넓은 광장에서 출발의 총성과 함께 벚꽃거리를 질주했다. 내가 풀코스를 뛰며 힘겨워 할 때, 어머니와 가족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물 한컵을 건네주면 어느 새 힘이 돋아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때를 맞춰 KBS전국노래자랑을 경주에서 열렸다. 어머니께서 좋아하던 송해와 현철을 보고 매우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바다도 좋아하셨다. 제주도에 오실 적마다 등대가 있는 바닷가 정자에 앉아 밀려오는 파도를 마냥 바라보셨다.

“애비야! 네가 세상을 떠나면 바다에다 뿌려다오!”

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이십여 년 전에 소천하신 아버지께서 외로워하실 것 같아서 그랬다.

 

  어머니가 올 봄!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천국으로 가신 날은 매우 화창한 날씨였다. 꽃샘추위에 장독이 깨진다는 말이 있다. 그 날만은 바람한 점 없이 온화했다. 대전에서 고향 마을에 있는 교회 목사님의 인도로 장례를 치룬 후 장지인 부여로 향했다. 어머니께서 16세에 시집을 오셨으니 나의 개구쟁이 시절! 나의 추억이 서린 고향땅에서 75년을 향유하셨다. 앞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나서, 어머니의 함을 받들고 어머니가 꽃가마를 타고 오던 그 길을 천천히 걸었다. 동네의 모든 분들이 나와서 기다렸다가 평소 인정이 많던 어머니와 작별을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에 묘비를 세웠다.


백창기와 그의 아내 천무순

여기에 잠들다.

두 사람은 다정한 부부로서 지낸 50년

약간의 재산 뿐 명예도 없었지만

남다른 성실함과 부지런함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 가정을 화목하게 일궜다.

여섯 명의 자식과

열다섯 명의 손자 손녀를 남부럽지 않게 키웠으니

하나님의 섭리를 어찌 의심할 수 있으랴.

굳세고 인정이 많던 남편과

“베풀고 살아라!”를 실천한 고운 아내의

자식들이 두 분을 추모하여

이 비를 세우다.

 

 "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속에 얼을 주고 아버지는 빛을 준다." 독일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의 명언을 다시금 더듬어 본다. 어린 시절 알게 모르게 나의 외형에 가려진 내면의 꿈과 욕망, 의욕은 모두 어머니의 영향이었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성격이 어떻든 형태가 어떻든 무죄이며, 몇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부모의 맘 알 길이 없고 그 은혜 다 갚을 길이 없다.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낙엽이 바닥을 구른다. 어머니께서 매년 오시던 제주도에 내년 봄이면 어김없이 벚꽃이 피겠지만 이제 어머니는 오실 수가 없다. 어머니께서 보내 주던 된장과 여러 가지 콩과 곡식, 산나물, 강경 새우젖 등이 바리바리 담겨진 택배상자도 더 이상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으면 바닷가 정자에 가서 바다 먼 곳을 바라본다.


*가을에는 쉼을 얻으세요*

가을에는 쉴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봄 부터 시작해서 수 많은 삶의
무거운 걸음을 쉬지도 않고 왔습니다.

당신의 수고와 짐중에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그 짐을 가을날에는 한번쯤 내려 놓고
마음껏 쉴 수 있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세요.

사랑하고 재물을 모으고
명예를 얻는 일은 인생에게 있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랍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무거운
짐은 보여지는 삶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에 얹어 있는 법일 것입니다.

선하게 살고 싶은데
이웃을 사랑하고 싶은데
정의로운 편에 서고 싶은데

잘 하지 못해서 싸우고 있는
마음의 짐이 삶의 무게의
짐보다 더욱 무거운 짐일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짐이 아닙니다.
하고 싶지만 늘 실패하는
그것이 더 무거운 짐입니다.

가을에는 쉼을 얻으세요
방종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없는 것에서 잠시
자유를 누려 보라는 것입니다.

짐의 무게를 가끔은 떨어내야
마음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짐이라는 것은 쌓아 두면 무게만 더하는 것입니다.

-좋은 글중에서-

가을 바람에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춤추는 가을인가봄니다
깊어가는 가을 아름다운 추억 만드시고 행복하세요>>>
-불변의흙-
감사합니다. 불변의 흙선생님~~~
어머니를 그리시는 마음이 절절하게 묻어납니다.
우리세대의 어머니들
대부분 그렇게 사셨지요.
모진 가난, 많은 자식들, 기약할 수 없었던 미래.
그 바탕으로 이만큼 자랐는데 이제보니 어머니의 세월은 비누거품처럼 꺼지고 말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허 해 집니다.
부모님께서 화목하게 사시다 가셨으니 큰 복입니다.
묘비를 세우신 님의 마음도 같습니다.

올해 101세가 되신 어머니는 이제 거동이 불편하시고 모든 면에서 어눌하십니다.
1년을 제 퇴근시간만 기다리시며 현관 앞 작은 의자에 앉아 계셨는데 이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앞마당 앵두나무와 매화꽃이 피면 그 꽃이 질새라 종일 지켜보시곤 했는데 표현하신대로 소풍이 끝나면 저 나무들이 외롭게 보일 것 같습니다.
쓰신 글을 읽으며
수많은 세월을 건너오신 부모님 세대가 평안하시라고 기도하렵니다.
열무김치선생님께서 저의 마음을 헤아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천국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잠시의 이별이란 생각이 듭니다.
열무선생님은 어머니께 효도를 잘 하여 장수의 기쁨을 누리시는군요.
날씨가 추워집니다.
선생님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먹먹한 느낌이 드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