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춘농로중 2014. 1. 6. 18:26

어린 시절에 산골에서 자라서 자동차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차를 보고 싶으면 장에 가는 것이 제일 빨랐다. 오일장이 서는 면사무소소재지까지 가려면 4Km정도의 거리였다. 가로질러 가는 길은 장고개가 있다. 인적이 드문 길이라서 가끔씩 머리가 쭈뼛하고 서는 기분이 들 때도 있지만, 산꼭대기로 길이 나있기 때문에 멀리 까지 볼 수 있어서 자동차가 이따금 보였다. 장에 가면 자동차배기구에서 뿜어내는 매연냄새가 매우 좋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은 초가삼간에 헛간과 잿간, 변소와 돼지우리, 안마당, 그리고 바깥마당이 있었다. 20여 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우리 집은 마을 입구에 있는 큰 소나무를 지나면 첫 번째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바깥마당은 지금으로 말하면 동네의 주차장으로 쓰이는 셈이었다. 도로가 협소해서 자동차나 우마차가 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우리마당까지 지게를 이용하거나 머리에 이고 와서 정미소에서 온 우마차를 이용하였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고구마를 좁디좁은 윗방에다 통가리를 만들어 그 곳에 저장했다. 통가리는 멍석처럼 빈틈없이 엮은 것은 아니고 싸리나무나 수수깡, 또는 쑥대 따위로 촘촘히 엮은 발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주로 벼를 탈곡하고 난 후 그 짚으로 엮어 만들었다. 지름 1~3m, 높이 1~2m의 울을 만들고 그 안에 고구마를 담는데, 가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바깥에서 새끼로 잘 동여매면 겨우내 잘 버티어 냈다. 그 중간쯤에 조그마한 구멍을 내어 고구마를 꺼내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써 겨울양식으로 톡톡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 때 당시는 고구마를 어른들이 감자라고 부르고, 감자를 하지쯤에 나온다고 하여 하지감자라고 불렀다. 우리 집의 고구마는 솥에 찌면 물고구마라서 질고 별로 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먹을 것이 귀하기 때문에 맛을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또 요즘처럼 자녀를 하나 둘 낳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대여섯 명씩 낳던 베이비 붐 시절이기에 먹는 것도 경쟁이 치열했다. 옆집에 사는 친구 경철이네는 고구마를 찌면 얼마나 딱딱하고 맛이 있는지 지금의 밤고구마였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경철이네 고구마 씨를 얻어다가 심었다면 우리도 그런 맛있는 고구마를 많이 먹었을텐데......

가끔은 물고구마를 맛있게 먹으려고 고구마를 쪄서 칼로 길게 자른 다음 채반에 얹어서 지붕위에 널어놓았다. 햇볕에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말리면 갱엿같은 맛이 나서 주전부리로서는 일품이었다.

 

 이제 나이가 드니 경철이네 집의 맛있던 밤고구마도 먹어보면 목이 맺혀서 많이 먹을 수가 없다. 얼마 전에 이웃에서 전남고흥호박고구마를 한 박스 선물로 가져다주었다. 밤고구마보다 목도 맺히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간다. 삶아먹어도 구워먹어도 맛있다. 색깔도 탐스럽다.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도 많이 나지만 감자도 많이 난다. 감자는 지실(地實)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작년에 상영되었던 영화지실이 바로 감자의 다른 이름이다.

폐암을 예방하고 혈압을 낮추며 변비해소에 도움을 주는 고구마를 먹으며,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본다.

음...
저도 차 매연 냄새가 좋아서 차만 보이면 꽁무니를 종일 따라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행동들이었지요.
찐 고구마... 금방 담은 김치와 함께 먹으면 눈물 나도록 맛이 좋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화롯불에다 흰떡살과 함께 고구마를 동그랗게 썰어서 구워먹어도 제법 맛이
있었읍니다.
시골에도 보일러가 들어오고 나서는 화롯불이 없어진 모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