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춘농로중 2014. 2. 12. 17:27

 

 

투르게네프 지음 이동현 옮김 /삼성출판사

 

 

*나는 측면에서 처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거동에는 그 어떤 기막힌 매력이 풍겼으며, 명령하는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는 것 같고, 조소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말할 수 없이 귀여운 데가 있었다. 나도 저 아름다운 손으로 이마를 얻어맞아 봤으면!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세상 모든 걸 당장 내동댕이칠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16쪽

 

*그녀의 얼굴은 어제보다도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어느 모로 보나 섬세하고, 그러면서도 귀여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어느새 그녀는 내게 더없이 귀중하고도 친근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으며, 그녀와 알기 이전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에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전엔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지도 않았던 것 같았다. - 26쪽

 

*공작 부인네 정원에는 절대 접근하지 않기로 맹세한 바 있지만, 물리칠 수 없는 어떤 힘이 나를 그쪽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것은 헛일이 아니었다. -32쪽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그녀와 나의 머리는 갑자기 반투명의 향긋한 안개 속에 휩싸여 버렸다. 그 안개 속에서 그녀의 눈은 바로 내 코 끝에서 부드럽게 빛났으며, 흰 이가 약간 드러나 보일 만큼 방긋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신비스러우면서도 야릇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가 드디어 가느다랗게 속삭였다. - 42쪽

 

 

*내가 이날 느끼고 맛본 것은 참으로 새롭고도 감미로운 것이었다. 나는 시선을 거의 고정한 채 한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호흡했다. 그리고 이따금 오늘 저녁의 일을 상기하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사랑에 빠졌나 보다, 이것이 연애라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면 가슴속이 섬뜩해지는 것이었다. 지나이다의 얼굴이 웃음 속에 조용히 떠올라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어둠 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뜻 모를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며, 눈은 무엇을 묻고 싶은 듯, 혹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좀 전에 그녀와 헤어지던 순간과 똑같은 눈이었다. - 44쪽

 

*그러고 있노라면 형언할 길 없는 어떤 느낌이 가슴속에 그득히 채워지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우수와 환희, 미래에 대한 예감과 희망, 삶의 공포 등 온갖 것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그런 것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발효하고 있는 것 중의 어느 한 가지에도 이렇다할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모든 것을 통틀어 하나의 이름으로, 지나이다의 이름으로 부르는 편이 적절했는지 모른다. - 53쪽

 

*주위는 온통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람은 나뭇잎에 산들거리고, 지나이다의 머리 위로 뻗친 기다란 딸기나무 가지를 이따금 흔들고 있었다. 어디선지 비둘기가 구구 울었다. 꿀벌 등은 듬성듬성한 풀 위를 낮게 날아다니며 웅웅거렸다. 눈을 들면 푸른 하늘이 부드럽게 펼쳐 있었다. 나는 슬펐다. ······ - 56쪽

 

*그날 하루 종일 나는 몹시도 유쾌하고 자랑스러운 기분이었다. 내 얼굴에 지나이다의 키스의 감촉을 생생하게 느끼며, 나는 환희의 전율 속에서 그녀가 한 한마디 한마디의 말을 되풀이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뜻하지 않은 행복을 너무나 소중히 간직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행복의 원인인 그녀를 보는 것조차 두려웠다. 아니, 차라리 보고 싶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이제는 이 이상 운명한테 바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오직 마지막 숨결을 깨끗이 거두고 죽어 버리면 그만이라는 심정이었다. - 71쪽

 

*지나이다는 장미꽃을 얼굴로 가져갔다. 나는 꽃잎의 반영이 그녀의 뺨에 떨어진 것같이 생각되었다. -80쪽

 

*나는 한참 동안 꼼짝 않고 서 있다가 얼마 후 내 방의 싸늘한 잠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이상스러운 흥분을 느꼈다. 마치 애인을 만나러 갔다가 고독 속에 홀로 남은 것 같은, 다름 사람의 행복 옆을 지나와버린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 91쪽

 

*그녀는 홱 하고 나에게 몸을 돌리더니 두 팔을 크게 벌려 내 머리를 끌어안고는 뜨겁고도 힘찬 키스를 퍼부었다. 이 열렬한 작별의 키스가 누구를 찾는 것이었는지 그것을 누가 알 수 있으랴. 그러나 나는 굶주린 듯 그 단맛에 취했다. 나는 그것이 다시는 반복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103쪽

 

*그러나 호기심보다도 강하고 시기심보다도 강하며 공포보다도 강한 감정이 내 발을 떼지 못하게 했다. 나는 그쪽을 유심히 바라보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무엇인지를 우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지나이다는 아버지의 의견에 따르려 하지 않는 눈치였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그녀 얼굴을 눈앞에 똑똑히 그려 볼 수 있다. 슬프고도 심각한 표정을 한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형용할 수 없는 우수와, 몸도 마음도 모두 바쳐 버린 듯한 애정과 함께 그 어떤 절망의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짤막한 말로 간단히 대꾸하고는 눈을 내리깐 채 엷은 웃음을 띠고 있을 뿐이었는데, 그것은 온순하면서도 완고한 결심이 서린 미소였다. - 108쪽

 

*나는 조용히 한길로 나와서 정처 없이 걸었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눈앞을 가로막았다. 그 젊고 열렬하고도 빛나던 생명은 그렇게 끝장이 낫단 말인가! 그처럼 조급히 흥분하면서 애타게 달려간 궁극의 목적이 이런 것이었던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이제는 축축한 땅 밑, 어둠 속에 묻혀 좁은 관 속에 들어 있을 그 귀한 모습, 그 눈, 그 머리카락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무심한 사람의 입으로부터

나는 들었노라, 죽었다는 소식을.

그리고 나는 역시 무심히

그 말에 귀를 기울였노라. - 113쪽

 

*어쩌면 그대가 지니는 아름다움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가능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해내리라고 생각할 수 있는 패기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대의 충만한 힘을 다른 무엇에도 기울여 보지 못하고 바람결에 따라 흩날려 보내는 점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음속으로부터 ‘아아, 만일에 내가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냈을 것인데!’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믿는 그런 점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 114쪽

그 여인을 사랑했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의 애인이었지요.
아버지가 그녀를 때라는 장면도 목격했구요.
그 여인은 사랑하는 남자의 아들에게 관심을 표현했을 뿐이었을 겁니다.
소년이 느꼈던 좌절감은 어떠했을까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 명작입니다.
중3때 담임선생님이 졸업을 앞두고
앞으로 읽어야 할 책들 중에 하나입니다.
기억이나서 이제야 읽어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나
'소나기'같은 단 둘만의 첫사랑에서
경쟁체제의 첫사랑을 대하니
새로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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