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순 교수 옛노래 칼럼

인동 2016. 12. 19. 11:33

여러분께서는 아득히 흘러간 시절, 앳된 신혼부부였던 가슴 설레는 청춘의 추억이 있으시지요? 그 시절 그 광경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장면들이 하나둘이 아닐 것입니다. 마치 흑백사진 앨범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아련한 실루엣들도 많을 테지요. 돌이켜 보노라면 참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시절이었습니다. 이제 그 과거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서 다시는 우리 앞에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지난해 7월9일 광주 유니버시아드 파크에서 신랑 박지훈, 신부 발레리(프랑스)가 전통혼례를 하고 있다. 지금은 드물지만 1960년대만 해도 전통혼례는 흔한 신혼풍속도였다.©2015광주하계유니버시아드 조직위

1960년대까지 신부는 족두리 쓰고 신랑은 사모관대 차려입어

1960년대는 일반서민의 가정에서 대개 구식결혼들을 했었습니다. 족두리를 머리에 얹은 새신부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늠름하게 차려입은 신랑의 모습, 그리고 초례청(醮禮廳)의 정겨운 광경들이 떠오릅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예식장으로 장소가 바뀌고, 드레스와 양복을 갖춰 입은 서양식 결혼풍습들이 일반화됐던 것 같습니다.

제가 1970년대 후반, 장가를 들어 처가에 갔더니 벽에 걸린 연로한 장인장모 내외분의 결혼사진이 서양식이라 적이 놀라서 물어보았지요. 그런데 노인들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당연히 구식결혼을 했지만 서양식 결혼예식 사진으로 바꿔준다는 어느 장사꾼이 마을을 돌아다닐 때 요청해서 새로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포토샵일 텐데요. 그 상인은 미리 만들어진 예식사진의 틀에서 얼굴만 바꿔치기한 영상으로 다시 꾸며 마치 예식장결혼을 한 것처럼 사진을 제작해주었다고 하는군요. 그때 비용을 지불하고 기념으로 한 장 만들어서 벽에 걸어둔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사진을 자세히 보니 장인장모의 얼굴이 비뚜름하게 붙어있어서 과연 부자연스런 합성사진인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진은 볼 때마다 우스꽝스럽고도 흐뭇한 미소를 머금게 했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 큰 누님이 구식결혼으로 집 마당에서 초례를 올리던 날 저녁, 매형이 처가 쪽 친척되는 청장년들에게 강제로 끌려나와 거꾸로 매달린 광경이 있었습니다. 그날 매형은 마른 북어로 발바닥을 사정없이 두들겨 맞으며 비명을 질렀지요. 고분고분한 남편을 만든다는 것이 매질의 취지라고 했는데, 애처롭게 비명을 지르던 매형의 모습을 보는 저의 가슴은 사뭇 애가 탔습니다.

한국전쟁 때는 참전한 미군병사가 초례청에서 신랑을 두들겨 패는 집안 청년을 공산당원인 줄 착각해서 곧바로 총탄을 발사한 일이 있었다는 기막힌 일화조차 있을 정도이니 이것은 진작 사라졌어야 할 악습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이제 이런 야릇한 풍습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만 예식장에서는 아직도 이따금 신랑 친구들이 결혼하는 주인공을 가혹하게 다루는 비천한 해프닝으로 하객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이런 낡은 구태를 보노라면 과거의 괴기적 잔재는 아직도 꼴을 달리해서 여전히 남아있는 듯합니다.

1930년대 복면가수의 원조였던 장옥조. ‘미스리갈’이라고 쓴 안대로 눈을 가리고 나와 큰 인기를 끌었다. ©이동순

1930년대 신혼 부부 풍속과 새댁의 앙탈 담은 ‘신접살이 풍경’

오늘은 1930년대 식민지 후반기의 신혼부부 풍속도를 소상하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노래 하나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1938년 3월, 서울의 리갈레코드사에서는 고마부 작사, 유일 작곡으로 ‘미스 리갈’이란 예명을 갖고 있던 가수 장옥조(蔣玉祚)가 ‘신접살이 풍경’이란 노래를 취입 발표했습니다. 전체 3절 구성으로 펼쳐지는 이 노래는 신혼부부 중 새댁의 불만과 앙탈, 투정의 화법으로 전개됩니다.

오늘은 일찍 오마 약속하시고
자정이 지나 한시 반인데 왜 인제 오세요
내일도 그렇게 늦게 오시면 싫어요
네 꼭 일찍 와요 네 얼른 오세요 네

회사에 취직할 때 월급을 타면
핸드백하고 파라솔하고 사주마 했지요
가을이 다 가도 안 사주시면 몰라요
네 꼭 사주세요 네 사다 주세요 네

가을에 황국단풍 곱게 물들면
석왕사 들러 금강산 구경 가자고 했지요
거짓말 하고서 안 가신다면 안 돼요
네 꼭 가주세요 네 같이 가세요 네
-미스 리갈(장옥조)의 노래 ‘신접살이 풍경’ 전문

노래의 중심인물은 신혼의 아내인데 서방님은 직장에서 퇴근 후 곧바로 귀가하지 않고 늘 바깥으로만 맴돕니다. 뿐만 아니라 자정이 지나도록 친구나 직장동료들과 어울려 밤거리 술집을 전전하고 있네요. 결혼 초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이것저것 원하는 모든 것을 사주겠노라고 큰소리쳤는데 정작 세월이 지나자 그 약속은 덧없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네요. 아마도 이것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세상의 모든 부부들이 겪는 일상적 갈등이 아닐까 합니다. 어젯밤에도 친구들과 한잔하다가 자정이 넘어서 귀가한 서방님들은 지금 이 노래를 들으며 가슴이 뜨끔하셨을 테지요.

2절에서는 아내에게 선물을 사주겠노라고 큰 소리를 치는 남편들의 표상이 그림처럼 떠오릅니다. 아내가 바라는 선물은 핸드백하고 파라솔입니다. 이것은 1930년대 젊은 여성들의 기호품으론 으뜸가는 물품이었나 봅니다. 지금도 최고급 외제 핸드백은 그 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지만 파라솔은 현재 완전히 대중화되어서 특별한 기호품으로서의 품격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는 파라솔조차도 아무나 갖기가 어려운 매우 귀한 사치품이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그토록 갈망하는 선물을 말로 약속해놓고 차일피일 세월만 보내는 남편들의 무심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3절에서는 1930년대의 흥미로운 유람풍습(遊覽風習)이 확인됩니다. 당시 가을이 되면 함경남도 안변군 설봉산에 있는 사찰 석왕사(釋王寺)로 단풍놀이 다녀오는 것이 유명한 가을관광 코스였나 봅니다. 요즘의 내장산 단풍관광에 비견될 수 있겠지요. 석왕사는 조선 태조 때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지은 절인데 이성계(李成桂)와의 인연으로 조선왕실로부터 상당한 보호를 받았던 큰 규모의 절입니다. 남편은 여러 언약을 남발해놓고 단 한 가지도 제대로 지키는 것이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이런 무심함에 대해서 몹시 서운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서방님께 화를 내거나 거칠게 앙탈을 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양과 애교 섞인 귀여운 말투로 콧소리까지 섞어서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꼭~’이라든가 ‘네~’라는 콧소리 섞인 대목에서 그러한 사랑의 애틋함이 곡진하게 느껴집니다. 이 부분의 섬세한 감정 표현은 오로지 ‘미스 리갈’ 장옥조만이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는 세간(世間)의 평을 받았습니다.

‘매일신보’에서는 가수 장옥조에 대해 이렇게 기사를 썼습니다.

콜럼비아사에서는 제1인자로 손꼽히는 명가수들이니 첫손에 장옥조 양을 손꼽게 된다. 그동안 부민관 스테이지와 혹은 레코드에서 그 연연한 목소리로서 퍽으나 정열적이요 유순한 듯한 낯이 익은 목소리를 들었거니와 이번 특설무대에서 꾀꼬리와 같은 노래를 부르게 되었으니 이에 대한 인기는 또한 놀라운 바가 있을 것이다.

1938년 서울 리갈레코드사에서 내놓은 ‘신접살이 풍경’ 레코드판 ©이동순

한때 눈을 안대로 가린 ‘복면가수’의 원조 장옥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인기

가수 장옥조(蔣玉祚)는 1935년 10월 가요작품 ‘울어도 울어도’(유영일 작사, 강구야시 작곡, 리갈 C-298)를 발표하면서 리갈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되었습니다. 이때 나이가 18세 무렵이었는데, 장옥조는 대구시 중구 대봉동에서 출생했고, 태어난 해는 1917년 전후로 추정됩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고 하네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력은 보통학교를 겨우 마쳤고, 졸업 후에는 여러 해 동안 상점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틈만 나면 줄곧 노래를 불렀습니다.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그 상점을 들렀던 서울 콜럼비아레코드사 직원의 눈에 띠게 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뒤 가요계에 정식으로 발탁된 것입니다. ‘미스 리갈’ 장옥조가 가요계에서 발표한 노래는 콜럼비아레코드에서 6편, 리갈레코드 19편 등 도합 25편입니다.

콜럼비아사의 자회사(子會社)였던 리갈의 전속으로 활동할 때 회사에서는 장옥조의 눈을 안대로 가리고 안대 위에는 ‘미스 리갈’이라고 써서 대중들의 궁금증을 한껏 자극시켰습니다. 이 방법은 레코드회사에서 기획한 마케팅과 관련된 일종의 상업적 판매 전략이었는데, 이게 제대로 먹혀들었던 것입니다. 대중들은 미스 리갈의 안대를 벗기라고 레코드사에 항의전화를 걸며 소동을 부렸습니다. 마침내 회사에서는 안대를 풀게 하고 본명 장옥조를 밝히도록 했습니다.

아무튼 장옥조는 1938년 4월 유행가 ‘첫사랑의 노래’(소월평 작사, 정진규 작곡, 리갈 C-454)를 마지막 음반으로 발표한 이후로 홀연히 가요계에서 사라졌습니다. 장옥조가 가요계를 떠난 까닭은 그 어디에서도 더듬어 확인할 길 없습니다. 결혼과 더불어 무대를 아주 떠나 자취를 감춘 것이 아닐까 짐작이 됩니다.

그로부터 무려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갔으나 ‘미스 리갈’이라 쓰인 안대를 눈에 가리고 얼굴을 감춘 복면가수(覆面歌手)의 깜찍한 용모로 당시 대중들 가슴을 설레게 하던 한 여성가객의 귀여운 모습이 새삼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노래 ‘신접살이 풍경’ 이후로 무려 80년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찬찬히 음미하시면서 옛날과 오늘의 신혼부부 풍속도는 서로 어떻게 같고 또 달라졌는지 한번 비교하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논객닷컴=이동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