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다

배선옥 2010. 5. 11. 23:17

증발

 

 


배선옥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길 건너 가로등을 오래도록 내려다본다. 주황색

불이 켜진 가로등 옆으론 아직 노랑색을 많이 머금은 연두색 가로수들

저녁바람이 심한지 섬세한 나뭇잎들이 격하게 흔들리는 것만 보인다.


볼 수 있다.


가로등 기둥을 타고 불빛이 올라간다. 빨간 불이다. 이번엔 위쪽에서부터

불빛이 기둥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까와는 다른 노란 불. 가로등 기둥을

타고 오르내리는 불빛이 네온사인 같다 불투명한 거울 같다. 그리하여

나는 길을 보지 않고도 길을 보고 있다. 길을 볼 수 있다. 아니, 길이


보인다.


꼭 망막에 물체가 들어서야지만 보이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겠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란 또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고개를 돌리기도 전 눈을 깜박이는 사이

이미 지워져버리고 그러니 보이는 것들을 모두 믿지는 않아야겠다고 나는

지그시 이를 깨물며 다짐을 하는 것인데 그럼 대체 어떤 것들은 믿을 건데?


이런 저녁이면 왠지 마음 한 구석은 더 축축하다. 평생 남자한테 속고만 살다

밑천도 다 떨어진 채 늙어버리고만 여자처럼 내 삶이 갑자기 불쌍해져서는

하릴도 없이 흔들리는 가로수 잎에나 눈을 두고 있는 것인데 가로등 기둥에

어리는 불빛들에선 바스락바스락 시간이 구겨지는 소리.

 




제2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