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거창한 詩쓰기

배선옥 2013. 3. 26. 21:29
<link rel="stylesheet" href="http://editor.daum.net/services/blog/css/contents4view.css?ver=1.1.114" type="text/css"/><link rel="stylesheet" href="http://editor.daum.net/services/blog/css/theme4view.css?ver=1.1.114" type="text/css"/>

키치(kitsch)적 사고를 먹고 자라는 문학적 ‘낯설게 하기’

키치(kitsch)란 고급 예술품에 대비되는 대중 문화 상품을 말한다. 대중가요나 장식품, 춤 또는 영화, 소설, 시 등 창조성이 없이 예술 작품을 모방하는 모든 상품들을 일컫는 말로 이는 싸구려 물건 이른바 이발소 그림이나 페인트 그림, 조악한 것, 이상야릇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19세기말 뮌헨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것으로 헤롤드․로젠버그는 이를 값싸고 감상적인 복제품 전부를 지칭한 저속과 천박(淺薄)이 그 이미지라고 보고 있다. 서구사회의 이국적인 삶을 현대성의 원형으로 삼은 ‘튀기문화’의 키치와 이를 흉내낸 소시민의 ‘통조림문화’라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미적 이데올로기가 일상화된 문화 현상일 것이다. 따라서 키치는 고급문화를 모방한 위조된 대중적 취향이라는 부정적 의미로부터 산업사회의 소비문화를 수용하는 대중들의 삶의 태도를 특정의 철학적․미학적 범주로 보아 저속한 취미로 정의된다.


키치의 대중성

키치(Kitsch)는 1872년경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용어로 ‘속된 것’,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것’ 등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국미술연감사>>(미술사전, 1989년)에 서도 이는 ‘속악한 것’, ‘속임주의’, ‘모조품’ 혹은 ‘본래의 목적에서 빗나간’ 것을 가리키는 영어의 ‘ketch’ 또는 의미가 모호한 독일어의 동사 ‘kitschen’ 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해롤드․로젠버그는 이를 우리 시대의 일상적인 예술로 정의한 바 있으며, 서구의 산업화된 사회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값싸고 감상적이며 귀여운 복제품 전부를 지칭한다고 하였다.
특히 패션에서 사용되고 있는 키치의 어원은 ‘저속․치졸’이라는 뜻의 독일어로, 고상하고 품위 있는 패션과 반대의 개념으로 세련된 맛을 외면하고 지나치게 산만한 장식을 통해 일부러 저속함을 보이고자 하는 패션을 의미한다. 이런 감각은 주로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맞은 나라에서 갑자기 물질적 풍요로움에 권태를 느껴 일어나게 되는 경우일 것이다.

이런 키치는 주로 이발소 그림으로 설명된다. 조악한 미술 작품의 경우다. 식당 벽에 걸려 있는 돼지그림이나, 이발소에 걸려 있는 물레방아 도는 풍경화, 버스운전기사 좌석 옆에 매달려 있는 기도하는 성자가 그것이다. 이런 키치는 다른 어떤 예술 관련 용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부정적 의미로 쓰여진다. 그래서 키치는 ‘훌륭한 예술품’과는 거리가 있는 ‘하찮고 천박하며 조야한 미완성 예술품’으로 정의되며, 그 결과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위조, 기만, 거짓말’ 등의 특성들을 갖게 된다.
현대인은 집중적인 예술 경험보다 일종의 이완작용으로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쾌락의 경험을 요구하는 측면이 비교적 강하다. 그래서 새로운 것, 예쁘장한 것, 신기한 것, 감각적인 것 등 개방적 쾌락의 경험을 추구하는 중산층의 특수한 쾌락주의에 가치를 둔다. 여기에 이발소 그림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키치가 등장하게 된 19세기 말엽은 브르조아의 시대로 소비 사회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소비 사회란 소비를 위한 생산이 이루어지며 ‘생산 / 소비’의 순환이 가속화되는 사회를 말한다. 그런 사회에서 신분 과시용이든, 예술에 대한 욕구에서 시작됐든, 이런 키치는 여러 가지 양식과 모습으로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다.
문제는 이런 키치가 일종의 중독 현상을 일으킨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온갖 키치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키치는 바람직한 미적 취향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이 그림이 되었건 도자기든, 문학이나 음악이든 상품 가치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거나 대량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린버그가 견해를 피력한 지도 이미 60년이 지났다. 그의 예언과 같이 우리는 지금 키치의 휘황한 밀림에서 살고 있다. 아브라함․몰르가 ‘키치의 성전’이라 부른 바 있는 대형백화점이나 슈퍼마켓, 할인매장, 길거리의 행상, 유흥업소, 커피 전문점, 교회의 첨탑을 거쳐 가정에까지 키치가 넘치고 있다. 아마도 이런 키치의 생산과 소비량은 현대인의 비만과 자동차에서 내뿜는 배기 가스량과도 정비례할 것이다. 어찌 보면, 키치는 우리 시대의 운명이라고 해도 좋을 만하다. 이런 숙명과도 같은 키치의 미학은 모더니즘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민속예술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환각적 힘, 가짜 꿈, 용이한 카타르시스에 대한 약속” 일 것이다. 그래서 키치의 미학은 대량, 자동화 생산이 가능한 이 시대의 기만이요, 자기 기만의 미학일 수도 있다. 에코의 지적과 같이 그것은 “예술성을 간직한다고 사칭하는” 허위의 미적 형식이라 하겠다.


문학에서의 키치

최근의 광고들을 보면 촌스럽고 모자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은 선남선녀가 아니다. 어딘가 좀 모자란 듯 어눌한 표정과 말투지만, 감초와도 같은 역할을 부여하여 시청자를 즐겁게 하는 그런 배우가 있다. 작중 인물의 성격적 특성을 중시해야 하기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고전적 광고문법은 옛일이다. 예전에는 음지보다 양지를 부각시키고 촌스러움보다 세련미를 강조하는 게 관례였다. 그런 관례가 지금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키치에는 좋은 취향(good tastes)에 대한 ‘비꼼’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종전의 가치관에 딴죽을 걸면서 풍자의 날을 세우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제는 키치가 더 이상 질 떨어지는 하위 미학이 아니라, 대중미학의 주류로 자리매김 되면서 당당한 미적 즐김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은 그저 간과할 일이 아니겠다. 광고 면에서 보이는 키치의 적극적인 수용의 경우를 김홍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쭉 빠진 여성과 근육질 남성은 미디어가 전파해온 성적 욕망의 원형질이다. 그 남자에게 다려드는 나이든 여성들. 마치 남성들이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스튜어디스의 옷을 한 꺼풀씩 벗기듯 알고 보면 여성의 내면 풍경 역시 소돔의 성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투다. 그에 비해 오른쪽 앞에 앉은 디젤 진 제너레이션으로 대변되는 젊은 두 여성은 그 아수라자의 난투극에 아랑곳 않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또 한 편의 광고에선 비정상적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그로테스크한 인물로 망가져 버린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 앞의 기다란 테이블 양쪽엔 풍선으로 된 섹스인형이 빽빽이 들어앉아 있다. 변태적 성욕의 극점을 보여주는 한 컷이다.
이처럼 디젤 광고는 키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과장, 광란의 요소르 에로틱한 소재와 접목시켜 디젤 특유의 그로테스크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선보이고 있다.
―김홍탁의 <키치, 가볍지만 통쾌한>

이는 광고가 제품 자체의 기능적 특징보다는 제품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한다. 이처럼 키치는 아방가드르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른 점이 있다면 키치는 놀이를 통한 역문화의 정신을 드러낸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대량으로 복제되는 이른바 키치의 조야(粗野)한 대중문화상품은 오늘날 아주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근대문명의 산물이고 또 그 안에 무시할 수 없는 내재적 모더니티를 갖고 있어서다. 언뜻 보면 이는 엘리트 문화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키치가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차용되었음은 의미심장한 일이겠다. 키치가 전통적 문화 중심에 새로운 에너지를 수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광호의 말과 같이 전위적인 예술 운동은 키치의 반(反)엘리트적이고 전복적이며 반어적인 형식을 이용한다. 여기서 그는 시인 유하의 예를 들어 “그는 대중을 길들이기 위한 키치와 지배체제의 공모와 그러한 키치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적 자아 자신에 대한 반성을 동시에 밀고 나간다.” 라고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쭉 빠진 여성과 근육질 남성은 미디어가 전파해온 성적 욕망의 원형질이다. 그 남자에게 다려드는 나이든 여성들. 마치 남성들이 끈적끈적한 시선으로 스튜어디스의 옷을 한 꺼풀씩 벗기듯 알고 보면 여성의 내면 풍경 역시 소돔의 성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투다. 그에 비해 오른쪽 앞에 앉은 디젤 진 제너레이션으로 대변되는 젊은 두 여성은 그 아수라자의 난투극에 아랑곳 않고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또 한 편의 광고에선 비정상적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그로테스크한 인물로 망가져 버린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 앞의 기다란 테이블 양쪽엔 풍선으로 된 섹스인형이 빽빽이 들어앉아 있다. 변태적 성욕의 극점을 보여주는 한 컷이다.
이처럼 디젤 광고는 키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과장, 광란의 요소르 에로틱한 소재와 접목시켜 디젤 특유의 그로테스크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선보이고 있다.
―김홍탁의 <키치, 가볍지만 통쾌한>

이는 광고가 제품 자체의 기능적 특징보다는 제품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한다. 이처럼 키치는 아방가드르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다. 다른 점이 있다면 키치는 놀이를 통한 역문화의 정신을 드러낸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대량으로 복제되는 이른바 키치의 조야(粗野)한 대중문화상품은 오늘날 아주 중요한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근대문명의 산물이고 또 그 안에 무시할 수 없는 내재적 모더니티를 갖고 있어서다. 언뜻 보면 이는 엘리트 문화와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키치가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차용되었음은 의미 심장한 일이겠다. 키치가 전통적 문화 중심에 새로운 에너지를 수혈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광호의 말과 같이 전위적인 예술 운동은 키치의 반(反)엘리트적이고 전복적이며 반어적인 형식을 이용한다. 여기서 그는 시인 유하의 예를 들어 “그는 대중을 길들이기 위한 키치와 지배체제의 공모와 그러한 키치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시적 자아 자신에 대한 반성을 동시에 밀고 나간다.” 라고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인은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1)에서 첨단의 자본주의적 문화가 집결된 공간인 압구정동의 패션과 스펙타클을 탐색한다. 이 시집에서도 역시 키치에 대한 그의 시적 탐구는 계속되는데 특히 “주윤발, 심혜진, 최진실” 등의 대중스타에 관한 시들이 흥미롭다. 시의 화자는 어떤 언어적 절제도 포기한 채 대중 스타의 이미지 뒤에 숨어있는 문화적 의미 맥락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이 수다스러운 진술을 이끌어 가는 동력이 되는 것은 인과적 논리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시적 대상에서 출발하여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상작용이다. 이미지의 끊임없는 연쇄와 변환은 유하의 키치적 상상력의 한 핵심적인 문법이다.
그렇다면, 이런 키치적 발상을 문학에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이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겠다. 이렇게 문학에서의 키치는 이른바 소재적 접근방식으로 이광호는 이에 대하여 “고급 문화의 소재가 대중 문화의 양식을 그대로 차용하거나 모방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라고 하여 ‘시적인 것’을 과감하게 일상서의 결박한 요소인 키치적인 것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키치적 사고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우리 문학의 중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 어느 때보다 문학의 위기, 작가의 죽음이란 담론이 무성한 시대에 문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런 키치적 발상에 젖어야 하는가. 아니면, 이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인가? 말 할 것도 없이 새로운 변화 즉 발상의 전환에 서야 할 것이다. 그 길 중 하나가 바로 ‘문학적 낯설게 하기’일 것이다.


키치와 문학적 ‘낯설게 하기’

러시아의 쉬클로프스키는 ‘낯설게 하기’ 또는 ‘생소화’야말로 문학성의 요체라고 지적하였다. 즉 문학의 형식적 요소인 소리, 이미지, 리듬, 구문, 음보, 운, 서술기법 같은 장치들이 모두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언어는 ‘일상언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며 문학언어를 다른 어떤 담론(談論) 형식들과 구별해주는 것은 일상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키고 뒤틀어 놓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낯익은 것을 낯설게 함으로써 사물들을 더욱 인식 가능하도록 했다. 예술의 목적은 수용되는 대로의 사물의 감각 및 지각을 전달하는 것이지만, 그 장치나 기술은 대상을 낯설게 하고 형식을 어렵게 하여 지각의 어려움과 지속을 증가시키는 데에 있다. 여기서 쉬클로프스키는 지각 과정 자체가 예술의 목적이고 또 그것이 가급적 오래 가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정상적으로 걸려있는 그림에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적당히 비스듬하게 걸려있는 그림에서 찾아내는 자동적 영상(These:그리이스어 Thessis=첫번째 주장)과 새로운 영상(Antithese:그리이스어 Antithesis=반대 목록)의 교합에서만이 이루어지는 새롭고 복합적인 기호의 탄생이라는 것이다. 이 기호를 낯설게 된 기호 또는 ‘낯설게 하기’로 정의한다. 이런 ‘문학적 낯설게 하기’는 언어 기호로 된 모든 종류의 낯설게 하기로, 언어 기호는 여러 가지 방법과 층위에서 낯설게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위르겐․링크는 이를 문학적 낯설게 하기, 복합적 낯설게 하기, 반어, 패러디, 비유와 상징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끝에 /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 아아 누구던가 /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전문

② 별들은 연기를 뿜고 / 달은 폭음을 내며 날아요 / 그야 내가 미쳤죠 / 아주 우주적인 공포예요 // 어둠의 촛불에 몸 씻듯이 / 깊은 밤 속에 잠겨 있으면 / 귀 밝아오노니 / 지하수 같은 울음소리…
―정현종, <심야통화․3> 전문

①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은 공감적 은유로 ‘낯설게 하기’의 절묘한 예라고 유종호는 말하고 있다. 이런 비유는 병치(竝置)를 통해서 생소화의 효과를 보여준다. 신선한 충격은 생소화의 효과로 깃대를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라고 할 정도의 ‘낯설게 하기’로 나타난다. 그런가하면, ②의 생소화는 평면적인 차원에서도 우리에게 풋풋한 해방감을 준다. 이런 ‘문학적 낯설게 하기’는 언어 기호로 된 모든 종류의 낯설게 하기로, 여러 가지 방법과 층위에서 낯설게 될 수 있다.
수필의 경우, 정여송의 <천자문>을 예로 들어본다.

千字의 글자를 갈고랑이로 긁어모은다. 구백구십구 자도 안되고 한 자가 덤으로 얹혀도 싫다. 반드시 千 字라여 한다. 그것을 매고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나선다. 매의 눈초리가 닿지 않고 야수의 왕자도 밟지 않은 길. 거닐면서 남다른 생각을 건져올리고 낯선 언어를 찾아내 새로운 文型을 그린다. 야물 차고 익살스러우면 더없이 좋겠지.
한석봉 필 천자문. 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言才乎也로 끝나는 그 속에는 세상의 온갖 것이 들어 있다. 해와 달과 별의 이야기,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와 규칙, 책임과 의무 등.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가득 차서 넘친다. 자연현상과 인간사회의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질서와 체계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내가 쓰려는 천자문은 그런 대단한 글이 못된다. 천자문에 감히 견줄 수조차 없는 어린아이의 장난질이요, 소꿉놀이다. 하지만 쌓아 올린다. 정자든 초가든 슬래브든 빌딩이든 글자로 집을 짓는다.
(중간 생략)
文을 세운다. 건축가가 되어 집을 짓는다. 닮으면 큰일이라도 날 듯 겉모양만 다르게 줄지어 선 카페들은 질색이다. 볼품은 없지만 들어서면 편안해지는 집. 누구든 눈길을 주지 않아도 참 멋을 아는 사람이 멀리서도 찾아오는 집. 외형보다 내면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조심스럽게 말을 걸듯 겸손하게 다가오는 마음들이 살고 있는 집. 그런 집을 짓는다. 그 곳에서 사람을 읽고 자연을 느끼고 세상을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보수가 있다면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 등의 평가가 아니다. 언어를 다듬어 집을 짓는 즐거움이고, 마음속에 진득하게 또아리를 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해방감이다.
무엇이 부러우리. 무엇이 두려우리. 열 손가락으로 자판 전부를 다루니 세상이 손안에 있지 않은가. 정령 엽기다. 가로열쇠와 세로열쇠를 풀어가며 퍼즐게임 하듯 열 손가락은 신이 나서 뚝딱 文을 세운다. 千字文이란 현판을 내어 건다. ―정여송(태귀), <천자문(千字文)> 전문

발상의 전환이다.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식상한 현실을 그는 벗어난다. 그만의 ‘성(城) 쌓기’라면 어떠할까. 이 수필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로움에 있다. ‘신변’이라는 취약성과 정서에 경도된 서정의 옷을 훌훌 벗고 지성의 옷을 입되 아주 내밀한 작가의 목소리를 감지하게 한다. 물론 이런 언어적 형식주의가 조급증을 일으킬 저급한 독자에게는 정서적 고갈이나 논리적 오류를 낳을 수도 있겠지만, 변형적 일상 언어의 낯섬 즉 생소함이 그의 수필을 수필답게 만드는 견인차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작가의 관심은 이런 새로움에 있다. 관습화된 신변의 노예의 역할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을 읽어내려는 작가의 고뇌와 진통이 보인다. 수필 <천자문>은 먼저 그 발상의 탁월함이 경이롭다. 천자문으로 집을 짓는다. 그러기 위해 그는 낯선 언어를 찾아낸다. 그리곤 이를 조합하여 새로운 문형을 찾아낸다. 발견의 기쁨이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이 기발한 착상은 실상 착상만으로는 쉽지 아니하다. 바로 언어의 ‘낯설게 하기’의 경우라고 하겠다. 고정관념과 사고의 경직성을 벗어 던진 자유로움이 넘친다. 위대한 생명이 위대한 진통에서 태어나듯 이렇게 좋은 수필은 소재를 작가의 정서와 상상 속에서 여과시키는 창작에의 진실된 진통과 고뇌로부터 피어난 한 송이 꽃일 것이다.

저속과 천박에서 벗어나는 길
이제 이 논의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키치는 저속과 천박(淺薄)이 그 이미지로 지금 우리는 서구의 이국적인 삶을 현대성의 원형으로 삼아 배태시킨 ‘튀기문화’와 이를 흉내낸 소시민의 ‘통조림문화’라는 키치의 미적 이데올로기가 일상화된 문화 현상 속에 살고 있다. 여기서 키치는 고급문화를 모방하여 위조된 대중적 취향이라는 부정적 의미로부터 산업사회의 소비문화를 수용하는 대중들의 삶의 태도를 특정의 철학적․미학적 범주로 보아 저속한 취미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키치는 우리 시대의 운명이라고 해도 좋을 만하다. 이런 숙명과도 같은 키치의 미학은 모더니즘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대량, 자동화 생산이 가능한 이 시대의 기만이요, 자기 기만의 미학일 수도 있다. 게다가 대량으로 복제되는 이른바 키치의 조야(粗野)한 대중문화상품은 그 안에 무시할 수 없는 내재적 모더니티를 갖고 있지만, 본격예술을 지향하는 입장에서는 문학이 키치를 꿈꾸거나 이를 먹고 자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오늘의 지배적 문화 현상의 하나라고 볼 때 이 또한 도외시할 수만도 없다. 키치가 독이면서도 약이라는 사실은 오늘의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리라 여겨진다. 따라서 대중문학이냐, 순수문학이냐 하는 논의가 구체적으로 상정되어야 할 것이며, 그 어느 때보다 문학의 위기, 작가의 죽음이란 담론이 무성한 시대에 문학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이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 길은 말 할 것도 없이 새로운 변화 즉 발상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길 중 하나가 바로 ‘문학적 낯설게 하기’로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곧 키치적 사고를 먹고 자라는 문학적 낯설게 하기야말로 문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소향 정윤희 문학의 쉼터
글쓴이 : 所向 정윤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