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거창한 詩쓰기

배선옥 2013. 3. 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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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좌 : 수필의 첫걸음

수필을 쓰는 일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다. 소설처럼 꾸며내거나 시처럼 응축시키는 작업이라면 차라리 허구적 세계로의 추상이나 가상 세계에 대한 동경을 마음껏 꾸며 펼쳐 보일 수도 있겠지만, 수필은 그런 이상세계를 창조해 내는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필은 바로 그 사람이 겪는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자기가 겪은 사실을 진솔하게 표현하는 글이므로, 그가 내 놓은 수필은 바로 그 사람의 전부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좋은 수필을 쓴다는 것은 지은이가 얼마나 진실된 삶을 살며 의미 있는 생활을 해 왔는가에 달려 있다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경험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땐, 그 사람은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훌륭한 수필작품은 값진 체험에다 탁월한 표현기술을 가진 이에게만 산출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서 진실한 체험이란 해석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이해될 수가 있다. 즉 작가의 올바른 사고와 도덕적 가치, 자연과 인생에 대한 애정, 사회를 바라보는 바른 안목과 가치관, 객관적 분석력과 비판력, 심오한 철학적 지식 등이 하나의 행동으로 작용되었을 때 그 결과로 비치는 객관적 평가를 말한다.
그러므로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여지는 글이라고는 하지만, 그 작품 속에는 그 사람의 참모습이 들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붓 가는 대로 쓰여지는 글이란 기교를 부렸으되 그 부림의 티가 나지 않아야 하고, 형식을 갖추었으나 자연스럽게 흘러간 것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소재의 갈무리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각기 그것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있고, 그것 만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있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강줄기, 높게 낮게 솟아난 산봉우리, 우뚝우뚝 솟은 기암괴석과 산비탈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 길가에 피어 있는 풀꽃, 강가에 굴러다니는 작은 조약돌…. 이 모두가 인간의 손길을 거치지 않고도 그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느끼듯이, 수필도 꾸미거나 억지로 기교를 부리지 않고서도 그 속에 진․선․미가 조화롭게 담겨 미적 가치를 자아내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해박한 지성인일수록 그의 표현은 쉽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연의 질서를 달관한 사람일수록 그의 설법은 평범한 일상의 진실에서 쉽게 인용되듯, 수필의 소재도 그런 일상의 진실거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대자연일수도 있고, 나 자신의 경험이나 타인의 경험일 수도 있다.
어떤 때 남의 체험담을 들으며 크게 감동한 나머지 ‘그것은 정녕 수필감’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감동은 나의 심신을 정화시키며 나로 하여금 오랜 기억 속에 담아 두게 한다. 이것이 하나의 소재가 되었을 때 좋은 수필로 표현된다.
날마다 오감을 통하여 우리가 느끼는 사실에는 “저것은 참이다, 저것은 휴머니티하다, 그것은 정녕 아름다움의 사례다.” 라고 충동을 받는다. 그러나 그때그때 받는 그 신선한 충격은 그리 오래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충격이나 감흥이 선험적 사실을 지우며 자리를 잡기 때문이다. 이런 신선한 충격이나 감동은 그때그때 놓치지 않고 메모해 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책속에서 찾아낸 지적요소나 감동적인 체험들은 망각되기 전에 노트와 메모로 갈무리 해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구양수(歐陽修)의 문장수업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그가 말한 삼다(三多)의 문장 수업은 오늘날까지도 불변의 원리로 통하기 때문이다. ‘많이 생각한다는 것과 많이 읽는다는 것, 많이 지어본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변의 이치로 통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사색하는 것과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사색이란 공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탐색이요 추구다. 그때마다 포착한 상념들을 차마 버릴 수 없는 글감이 되어 남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어떤 사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수필의 소재다.

(예문)

어느 오두막에서
법 정

올 봄에는 일이 있어 세 차례나 남쪽을 다녀왔다. 봄은 남쪽에서 꽃으로 피어난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매화가 그 좋은 향기를 나누어주더니 산수유와 진달래와 유채꽃이 눈부시게 봄기운을 내뿜고, 뒤이어 살구꽃과 복사꽃, 벚꽃이 흐드러지게 봄을 잔치하고 있다.
메마른 가지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더니, 그 꽃에서 고운 빛깔이 생겨나고 은은한 향기가 들려오다니, 생각할수록 신기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살아 있는 신비는 그대로가 우주의 조화다. 이 우주의 조화에는 가난도 부도 상관이 없다. 모든 것이 그 때를 알아, 있을 자리에 있을 뿐이다.
꽃은 무심히 피고 소리 없이 진다. 이웃을 시새우거나 괴롭히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꽃에 비하면 그 삶의 모습이 너무 시끄럽고 거칠고 영악스럽다. 꽃이 사람들 눈에 띄는 것에서 피어나는 것은, 묵묵히 피고 지는 우주의 신비와 그 조화를 보고 배우라는 뜻일 수도 있다.
사람도 그 삶이 순수하고 진실하다면 한 송이 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겠다고, 한 스님이 살다 간 빈 오두막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 절에서 십 분쯤 숲길을 따라 올라간 곳에 자리잡은 오두막은 벼랑 아래 돌과 흙과 나무로 지어졌다. 마당에 들어서면 앞이 툭 트여 멀리 바다가 내다보이는 그런 곳이다. 빈집인데도 뜰은 말끔히 비로 쓸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집 구조는 수행자가 단출하게 살기에 알맞도록 간소하고 질박하다. 높지 않은 마루를 올라서면 방 두 개가 장지문으로 이어져 있는데, 한 칸은 선방으로 썼음인지 빈방에 달랑 방석 한 장뿐, 불단으로 쓰기 위해 네모로 벽을 파 놓았는데, 불상은 없고 방석만 좌대 위에 도도록하게 올려져 있었다. 그 빈자리가 그 방에서 눈길을 끌었다.
장지문을 통해 들어선 작은 방은 유리 대신 투명한 비닐로 창을 바르고 안으로 창호지를 드리워 놓았다. 드리워진 창호지를 걷어 올리면 방안에 앉아 차를 들면서 멀리 바다를 내다볼 수 있게 하였다. 한쪽에 조촐한 다기가 다포에 덮여 있었다. 그 창으로 달빛도 들어오고 봄바다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도 내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방 안은 더 소개할 거리가 없을 만큼 텅 비어 있었다.
추녀 밑에는 다음에 와서 살 사람을 위해 장작과 삭정이를 넉넉하게 준비해 두었다. 반듯하게 쌓아올린 장작더미를 보면 그 일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했는지 훤히 짐작할 수 있다.
절에서 오두막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길에도 사람들이 미끄러지지 않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방 안은 말끔히 도배를 해 놓았다.
그 스님은 지난 겨울 한 철(석 달)을 이 오두막에서 지내다 갔는데, 그 자취를 보니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청정한 승가의 규범이 그곳에서 행해진 것을 보는 마음도 맑고 청정해졌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도 그 청정의 메아리가 울리게 마련이다.
뒤에 올 사람을 위한 이와 같은 배려는 예전부터 전해 온 전통적인 승가의 말없는 규범인데, 요즘에는 절에서도 마을집에서도 이런 아름다운 규범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 오두막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맑은 가난 속에서 길러진 따뜻한 그 마음씨다. 자기 한 몸만을 위하지 않고 뒤에 와서 살 사람을 배려한 그 마음씨는, 우리에게 보여준 말없는 그의 가르침이다. 오두막을 내려오면서 말없는 그의 가르침이 이 오두막에서만이라도 두고두고 이어지기를 염원했다.
간소하고 질박한 삶의 모습에서 우리는 절제된 아름다움을 숲향기처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모자람이 아니라 충만임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거룩한 가난의 성자, 프란치스코는 수도자의 집과 오두막이 그들의 신분에 어울리도록 보다 작고 간소하게 그리고 편리하게 지어지기를 항상 염원하면서 그런 집에서 머물기를 좋아하였다. 마지막 임종에 이르렀을 때에도 가난과 겸손을 보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수도자의 집과 오두막은 꼭 나무와 흙으로만 짓도록 당부하였다. 그러면서 이런 집을 개인의 소유로 삼지 말고 그 속에서 순례자나 나그네처럼 살기를 원했다.
절제된 아름다움인 이와 같은 맑은 가난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생활방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맑은 가난은 우리가 두고두고 배우면서 익혀 가야 할 항구적이고 지속적인 청정한 생활 규범이 되어야 한다.
절제된 아름다움은 우리를 사람답게 만든다. 불필요한 것을 다 덜어내고 나서 최소한의 꼭 있어야 될 것만으로 이루어진 본질적인 단순 간소한 삶은 아름답다. 그것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모습이기도 하다.

법정수필집, 『 오두막편지』, 이레, 2000, pp.126-129.




고승의 설법을 듣는다. ‘무소유’. 법정의 법어다. 그뿐인가. ‘마음을 비워라.’ ‘버리고 떠나기’ 이런 화두들이 머릿속에 와 안는다. 하지만 부처님의 설법처럼 그렇게 마음 깊이 고인ㅇ 물을 퍼야 할 정도로 난해한 철학은 아니다. 그저 어느 오두막집의 스케치를 통해 독자는 화자의 발길을 따라가며 눈으로 보고 마음을 새기면 된다. 그야말로 소박하고 질박하다. 정작 수필가의 글이 아님에도 언어가 지닌 미학적 형상화에 감격하는가? 수필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정한 애정과 진실이 담겨야 한다고 한다. 이 수필은 감상하면서 독자의 가슴을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인간의 진실과 애정이 담겨 있어서다.




수필도 좋은 구성이 필요하다

수필이 아무리 무형식의 글이라 하더라도 한편의 작품인 이상 짜임새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물론 전개방법이 귀납적이거나 연역적이거나 하는 논설문적 구성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주제를 선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짜임새를 갖출 필요가 있다.
주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조적 주제를 제휴해야 하고, 자연스런 문장을 짜 나가기 위해 부수적 보조문장이나 관련사실을 열거할 필요가 있다. 또한 하나의 사실을 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잠재된 체험을 연상적으로 피워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한 감동은 그것이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수많은 선험적 연상을 일으키게 된다. 그것은 한 낱의 씨알에서 발아한 초목이 줄기가 뻗고 잔가지를 치며 거기 잎을 피워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주제를 싹틔운 사고의 줄기는 그것과 연관된 유사 관념들이 곁가지를 치며 뻗어나게 된다.

이때 이런 많은 작은 소재들을 어떻게 취사선택하고 어떻게 짜아가느냐 하는 문제가 뒤따르기 때문에 이것이 적절한 조절과 조합이 필요하다.
잡다한 나열은 의미 개념을 혼란하게 만들고 주제의식을 흐리게 하며, 단조로운 평면이나 측면적 묘사는 입체적 형상화를 이룰 수 없어 한 편린을 그리는데 그치고 만다. 무질서한 단어의 나열이 완전한 문장을 이루는 데 장애요인이 되듯, 잡다한 문단의 결합은 작품 전편의 미를 감소시키는 결과가 된다. 아무리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글이 수필이라 하더라도, 불필요한 단락이나 중복되는 문단은 과감하게 잘라내어야 할 것이다. 왕골자리는 왕골로만 짜여져야 하고, 비단은 비단실로만 짜여져야 하는 것처럼, 수필의 자임도 잡다한 주제를 담은 문단으로 짜여져서는 안 된다.

질서 있는 문장과 문체들

문장이라 일컬어지는 스타일은 그 사람의 개성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리 개성적인 문장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문장에는 질서가 있고 법도가 있다.
그런 질서가 무시된 문장은 벌써 표현 능력을 상실한 문장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문장에는 주어, 서술어, 목적어, 관형어, 부사어, 독립어들이 있고, 이것들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조사가 있다. 이런 각 부분을 빠뜨리거나 뒤바꿔 놓으면 그것은 알맹이 없는 문장이 되거나, 벼슬과 꽁지가 빠진 장닭이 되고 만다.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은 이런 문법 지식이 없이는 명료한 문장을 창작해 낼 수가 없으며, 문장가로 대성할 수 없다.
한 낱 한 낱의 단어는 생각과 의미의 덩어리요, 그 생각의 덩이가 하나의 끈에 질서 있게 꿰어질 때만 작가의 생각과 감정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구체적인 묘사를 위해서는 관형절, 부사절, 목적절 등이 복잡하게 얽히는 복문으로 엮어지지만, 이런 복문에 질서가 서지 않는다면 의미개념의 혼동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긴 문장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는 백자 이내이어야 하고, 그것이 이백 자를 넘어서게 되면 이미 의미 표현력은 그만큼 흔들리게 된다. 그러므로 적절한 곳에서 문장을 끊고, 접속부사를 통하여 의미의 연결을 이루어야 한다.
수필문장은 지시적 명령적 문장이나, 교훈적인 문장이 되어서는 안 되며, 유연하고 산뜻하며 명쾌해야 한다.
수필은 작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문학이므로, 한 편의 수필에서 느끼는 문장의 맛과 멋은 각기 다른 특성이 있음은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좋은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거기 몇 가지 공통된 유의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많은 수필가들이 오랜 경험을 통하여 얻어낸 이론이자 보편적인 원리라 하겠다.

1) 글은 우선 간결해야 한다.
“글은 짧고 뜻은 깊다(文短意長)”는 말이 있다. 이렇게 쓴 글은 함축미가 있고 여운이 있어 읽을 맛이 난다. 글이 짧으면 산뜻하고, 뜻이 깊으면 유연하다는 것이다.
수필의 문장은 깔끔하고 간결하여야 한다. 한 자라도 덜 쓰고도 같은 효과를 낸다. 덜 쓰는 편이 좋은 수필이 된다. 그래야만 읽는 이들에게 상상을 통해 음미해 볼 수 있는 여백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2) 수필 문장은 평이해야 한다.
속뜻은 깊고 깊어도 말은 알기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심오한 철학적 진리를 나타낸 글이라 하더라도 표현하는 말만은 쉽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3) 글은 정밀해야 한다.
특히 사물을 묘사하거나 정경을 서술할 때, 혼미한 표현을 하거나 애매모호한 표현을 해서는 좋은 글이 안 된다는 뜻이다. 구체적인 실감을 주도록 치밀한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4) 솔직해야 한다.
글에서는 수식이나 과장이나 변명이 그다지 필요치 않다. 거짓으로 자신의 격을 높이려 들거나, 자기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표현 등은 문장의 품위뿐만 아니라 작자의 품위까지도 격하시키게 된다. 글은 참된 것에서 피어나고 거짓으로 만드는 데서 시든다는 말이 있다. 간결, 평이, 정밀, 솔직 이 네 가지는 문장 수업의 4대 원칙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이런 원칙이 있고 작법이 있다 하더라도 수필을 쓰는 이는 언제나 삼다(三多)의 기본 자세를 성실하게 실천해 나갈 때만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김영배, <<수필문학론집>>, 수필문학사 PP.13-18. 참고)

**작품평설 / 검댕이 // 이 은 희

검댕이가 긴 여행을 떠났다. 먹보인 녀석이 좋아하는 젤리도 마다하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덩그러니 보금자리만 남았다. 그런데 나는 놀라지도, 슬프지도 않다. 가족들은 두 눈에 쌍불을 켜고 그를 찾느라고 야단이다. 그러나 베란다와 온 방을 구석구석 찾아보아도 녀석은 나타나질 않는다.
검댕이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사슴벌레의 애칭이다. 유난히 검고 두개의 집게가 커서 붙인 이름이다. 이 녀석이 우리 집에 오기까지엔 할머니의 영웅담이 한몫을 했다.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와 손자가 나를 따돌리고 뭔가 작전을 수행하려는 눈치였다. 아이가 난데없이 사슴벌레에 관해 연구를 하려는 것도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았다. 나 몰래 아빠에게 용돈도 얻어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날 벌어진 일을 흥분하신 할머니가 가족들에게 영웅담처럼 풀어놓으셨다.
도시에서는 흔하지 않은 곤충인지라 부르는 게 값이었다. 검댕이 한 마리의 가격은 만 오천 원인데 아이의 주머니엔 만 삼천 원밖에 없었다. 문방구 주인은 모자라는 이천 원을 가져오라고 했다. 하지만 검댕이를 빨리 갖고 싶어 주춤거리는 아이에게 그는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다. 뽑기를 하면 만 오천 원이 나올 수 있다는 말에 아이는 귀가 솔깃하여 순순히 빠져들어 갔고 결국, 가지고 있던 돈마저 몽땅 뽑기 기구한테 빼앗겨 빈손이 되고 말았다.
그 다음 상황은 보지 않아도 그림이다. 아이는 눈물 콧물이 범벅되어 내 돈을 내 놓으라고 생떼를 쓰며 대성통곡을 하였을 것이다. 손자의 얘기를 들은 할머니는 눈썹이 날리도록 문방구로 달려갔고 문방구 주인을 사행심을 조장했다고 협박 반 애걸 반으로 모자란 돈 이천 원으로 타협을 보았다. 제일 작은 검댕이를 골라 주려고 하는 그의 손을 제치고 제일 큰놈으로 고른 손자와 할머니는 승전보를 울리며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용감무쌍한 할머니다. 덕분에 아이도 쓰라린 인생 경험을 했고 추억의 탑에 돌 하나를 더 얹은 셈이다.

웬만한 애완곤충은 우리 집을 거쳐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아이는 그들을 데려온 일주일은 호기심으로 밥도 제 때 챙겨주며 지나칠 정도로 깊은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시간이 흐를수록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들의 뒤처리는 할머니의 몫이 되곤 했다. 그들도 사람처럼 사랑을 먹고 자라는가 보다. 사람도 사랑이 부족하면 거칠어지고 생기가 없어지듯, 그들도 기운을 잃은 듯 얼마 가질 못해 마침내 죽는 경우도 생겼다. 그런 모습이 딱해 앞으로 다시는 곤충을 사주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검댕이를 어렵게 데려온 얘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검댕이의 값보다 비싼 집만큼은 양보하지 않기로 했다. 자그마한 사육장이 이만 오천 원이다. 전에도 햄스터가 오천 원이면 집은 만 오천 원, 금화조가 팔천 원이면 새집은 이만 오천 원이었다. 주객의 전도였다. ‘배보다 배꼽이 크면 안 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처음에는 고집을 부리던 남편과 아이도 못이기겠다는 듯 네모난 석쇠를 사다가 구슬땀을 흘리며 녀석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제법 근사했다. 손수 집을 만든 남편과 아이는 어느 때보다 더욱 강한 사랑을 베풀었다.
하루는 검댕이가 벌렁 드러누워 배를 하늘로 향한 채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혹시 죽은 것은 아닌가 싶어 아이에게 물었다. 죽은 시늉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는 그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 녀석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귀머거리인가. 갑갑하고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다음 날, 검댕이가 남의 집 화분 근처에서 방황을 하고 있지 않은가. 철끈으로 칭칭 감아 만든 튼튼한 집을 어떻게 빠져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껍고 무거운 책으로 눌려 놓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나왔을까. 그 후로도 그는 몇 번씩이나 탈출시도를 하여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검댕이의 등이 여기 저기 갈라져 상처투성이인 것이 눈에 띄었다. 실패를 거듭해도 포기하지 않고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썼구나 여겼다. 헌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녀석은 정사각형인 석쇠의 네모난 구멍 밖으로 두 집게를 정면으로, 위로, 아래로, 그것도 모자라 사선으로 시도하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녀석이 빠져 나오게 된 비밀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로 석쇠의 구멍을 재보았다. 가로, 세로 1.5 센티미터. 검댕이가 정면으로 빠져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선의 길이가 약 2센티미터가 넘는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 실수였다. 아주 간단한 진리를 소홀히 다룬 것이다. 그는 우리가 놓친 맞모금의 길이를 발견한 것이었다.
겁도 없이 탈출하려는 검댕이를 보며 문득 내 모습이 겹쳐졌다.
신혼시절, 가난한 촌부의 아내는 오직 하나 욕심의 그릇을 채우기 위해 하루를 살았다. 셋방살이를 벗어나기 위한 알뜰함은 이내 작은 평수의 내 집을 얻을 수가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헛된 욕심은 더 큰 것을 바라고 숫자를 헤아리며 여러 해를 보태었다. 겉치장을 위한 삶으로 내 머릿속엔 상상의 기와집은 수없이 그려졌다. 또한 직장에선 한 계단 더 높은 직급을 위하여 모든 상황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고민해갔다. 늘 내 주변의 것들은 경쟁대상이었다. 그렇게 열을 채우기 위한 욕망의 불꽃은 사그라지지를 않았다.
모든 부분을 고속질주로 이루어낸 어느 날, 원인 모를 병에 걸린 듯 가슴아파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건만 이유 없이 허전하며, 신열을 앓듯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내가 원했던 삶이 이런 것이었던가. 물질만능 위주의 사회에 물든 내 모습, 순수감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문득, 내 순수영혼을 잃고 욕망만 높아진 삶이 부질없는 짓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화려한 불빛을 쫓아다니는 불나비 같았다. 노랗게 단풍이 든 느티나무 아래에서 까르르 웃던 열아홉 소녀의 그림자가 그립다. 계절의 아름다움을 시로 읊던 나는 어디에 묻혀 있는 걸까. 사유의 창을 열어 묻고 되묻는다.
그 동안 나는 내내 주위의 환경을 탓하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나에겐 언제나 벗어날 수 있는 열려진 문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현실에 안주해버린 날 조롱하는 듯 했다. 나는 검댕이 보다 용기 없는 사람이었다. 그다지 절실하지도 않으며 실체 없는 고민을 늘어놓던 나의 몸부림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그렇다. 검댕이의 자유를 향한 무모한 도전과 끈질긴 노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1.5센티미터의 구멍에 온 몸을 던졌을 것을 상상하니, 전기충격을 받은 듯 온몸이 짜릿해왔다. 그랬다. 나의 삶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인생살이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볼 줄 알았다. 비껴보고, 누워볼 수 있는 삶을 몰랐던 것이다.
표면에 드러난 가벼운 것을 즐기며, 내면의 깊이를 모르는 지금까지의 삶이 아니었던가. 그래 지극히 사소한 것, 가끔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아주 작은 감성을 도외시했다. 철망에 긁혀 생채기투성이가 될 정도의 적극적인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아 보였다.

식구들이 집을 비운 오후. 녀석이 왕성한 혈기로 사방을 활개치며 돌아다닌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서서히 베란다 쪽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창문을 반쯤 열었다.
서재로 돌아와서도 진정되지 않는 마음은 온통 그 녀석에게 가 있다. 이윽고 ‘툭’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 드디어 자유를 찾았구나’ 작은 탄성이 일었다. 먼발치에서 둘러보니 역시 녀석이 보이질 않는다. 녀석이 기어가는 속도를 계산하며, 시간이 빨리 흘러갔으면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힘이 빠져왔다. 두 어깨가 축 처졌다. 검댕이가 없는 쓸쓸한 보금자리. 검댕이의 탈출은 가족들에겐 언제까지나 미제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2004.「월간문학」당선 │ 2004-제7회 동서문학상 대상 수상작품)




□ 작품 평설 □

이 수필은 제7회 동서문학상 공모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동시에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한 작품이다.

서두는 검댕이의 탈출사건을 다루고 있다. 소재인 검댕이는 사슴벌레의 애칭이다.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는 애완 곤충을 사육하는 쏠쏠한 재미에 빠지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애완동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느새 애완곤충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들이나 산야에서 흔히 발견되는 곤충이지만 지금은 환경오염의 탓으로 사라진지 오랜 곤충들을 애완의 목적으로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 한 사슴벌레가 화자의 집에 오기까지의 아이와 할머니의 영웅담과도 같은 화소로 시작하여 애완동물과 얽힌 에피소드들이 이 수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검댕이의 필사적인 탈출 시도다. 이른바 자유를 향한 무모한 도전과 끈질긴 노력이었다. 어느 날 그 검댕이가 정사각형 석쇠의 네모난 구멍으로 탈출한 것이었다. 그 겁도 없이 탈출을 시도한 검댕이에 대한 화자의 상념은 검댕이를 화소로 하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게 한다. 신혼 시절 가난한 촌부였던 자신의 모습과의 조우에서 오는 존재의 문제에 대한 천착이 이 수필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현실에서의 탈출을 무모하게 시도한 검댕이의 모습에서 문득 조우한 삶의 문제 그건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 동안 나는 내내 주위의 환경을 탓하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나에겐 언제나 벗어날 수 있는 열려진 문이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현실에 안주해버린 날 조롱하는 듯 했다. 나는 검댕이 보다 용기 없는 사람이었다. 그다지 절실하지도 않으며 실체 없는 고민을 늘어놓던 나의 몸부림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여기서 화자는 삶의 진리를 깨닫는다. 검댕이의 탈출이 화자에게 던쟈주는 메시지는 잔잔한 일상을 깨우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한 마디로 일상의 파괴다. “검댕이의 자유를 향한 무모한 도전과 끈질긴 노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력을 다해 1.5센티미터의 구멍에 온 몸을 던졌을 것을 상상하니, 전기충격을 받은 듯 온몸이 짜릿해왔다. 그랬다. 나의 삶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인생살이에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볼 줄 알았다. 비껴보고, 누워볼 수 있는 삶을 몰랐던 것이다.” 이런 의식의 변화가 이 수필을 한 차원 높여주고 있다.
수필은 이렇게 일상에 대한 의미화가 절실해야 한다. 그저 검댕이와의 인연 맺기와 풀기 그 자체로 이 수필이 진행되었더라면 그 의미는 반감되었으리라. 수필의 철학화는 여기에 있다. 화자는 하나의 에피소드를 자기화 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보다 상세한 의미화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문장이 의미화에 도움을 주고 있으며, 경쾌한 문장의 속도가 더욱 이 수필을 매력적이게 한다. 더구나 앞부분의 검댕이와의 인연 맺기는 해학적으로 처리되어 독자를 매료시키기까지 한다. 검댕이와의 관계 형성은 그저 아이의 별난 취미 정도가 아니고 가족관계의 형성을 보인다. 그래서 아이와 할머니가 검댕이를 취하는 과정이 아주 해학적이게 그려져 있다.

아이는 눈물 콧물이 범벅되어 내 돈을 내 놓으라고 생떼를 쓰며 대성통곡을 하였을 것이다. 손자의 얘기를 들은 할머니는 눈썹이 날리도록 문방구로 달려갔고 문방구 주인을 사행심을 조장했다고 협박 반 애걸 반으로 모자란 돈 이천 원으로 타협을 보았다. 제일 작은 검댕이를 골라 주려고 하는 그의 손을 제치고 제일 큰놈으로 고른 손자와 할머니는 승전보를 울리며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용감무쌍한 할머니다. 덕분에 아이도 쓰라린 인생 경험을 했고 추억의 탑에 돌 하나를 더 얹은 셈이다.

손자와 할머니의 영웅담은 이 수필의 백미다. 해학이 넘치는 문체가 이 수필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수필이 그저 애완곤충의 탈출을 그리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먹보인 녀석이 좋아하는 젤리도 마다하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덩그러니 보금자리만 남았다. 그런데 나는 놀라지도, 슬프지도 않다. 가족들은 두 눈에 쌍불을 켜고 그를 찾느라고 야단이다.” 서두의 언술은 다소 차이가 있다. 화자와 가족들의 검댕이에 대한 의식의 차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검댕이의 탈출이 주는 의미화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수필을 창작하게 한 모티브다.
화자는 이런 주제 의식의 구체화를 위해 검댕이의 탈출 의도와 그 집념을 그려냄으로써 자유를 허락하고자하는 자신의 의지를 합리화시키는 동시에 생명에 대한 애정을 우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함축적인 결미와 함께 이 수필은 서두와 결미의 조응을 보여주고 있다.
수필문학은 이렇게 일상의 소박한 이야기를 담론을 통해서 삶의 진리를 규명해내는 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수필이 인간학이라 불려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건강한 삶의 의미화, 간결하면서도 경쾌한 문장 쓰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의 행간에서 우리는 화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출처 : 소향 정윤희 문학의 쉼터
글쓴이 : 所向 정윤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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