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거창한 詩쓰기

배선옥 2013. 3. 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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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사고의 전환과 기법의 혁신

디지털 시대의 문학

1849년의 일이다. 미국 켈리포니아에서는 금광이 발견되자,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많은 사람들이 서부로 달려갔다. 그리하여 금광을 찾은 사람은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거품처럼 허망한 꿈을 잃고 말았다. 한 마디로 ‘아메리칸 드림’은 아니었다.
지금 우리는 디지털시대라는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누구도 이를 거역할 수 없는-문학인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는-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사고의 전환과 기법의 혁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런 디지털 시대의 특징은 구심점이나 구체적 실체가 없이 모든 것이 수평적인 사이버 공간에서 전자부호로 이뤄진다는 데 있다.
문학이나 인문학은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가장 보수적이라는 데 있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디지털시대를 맞아 패러다임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느끼면서도 이를 애써 외면하여 왔다. 독주와 과속에 대해 제동을 걸고 있는 듯 하다.
이런 변화에 대한 위기감, 일종의 불안감은 문학의 위기감을 조성한다. 박상천은『문학과 창작』(2000년 1월 호)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학의 위기를 제기한 바 있었다.

20세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문학의 위기’니 ‘시의 죽음’이니 하는 논의가 무성했다. 이러한 논의들은 확대 재생산되어 심지어는 문학인들 사이에서도 ‘이젠 끝난 게 아닌가?’하는 패배주의적이고 자조적인 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영상산업의 발달,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매체의 출현, 대중문화의 주도권 확보, 경제 논리가 최우선되는 가치관이나 의식의 변화 등 외부적 환경 변화가 특히 이러한 논리를 부추겼던 것이 사실이다. (32쪽)

변화에 대한 불안감이다. 영상산업의 발달이나 인터넷과 같은 새로운 매체의 출현과 같은 외부적 환경의 변화가 몰고 오는 일종의 불안감이라 하겠다. 이런 불안은 실상 인식의 틀을 변화시켜 외부적 환경을 새로운 변화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고정된 틀에 얽매여 바라보면 분명 그것은 죽어 가는 것이겠지만, 만일 인식의 틀을 바꾼다면 그것은 오히려 변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최근 신세대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컴퓨터게임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컴퓨터 게임이 단순히 프로그래밍 기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컴퓨터 게임에는 그 기본적인 서사구조가 있어야 할 것은 물론이고, 그래픽이 동원되며, 음악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컴퓨터게임은 문학과 미술과 음악이 공존하는 새로운 양식의 종합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멀티미디어라 하겠다. 이렇게 앞으로는 지금까지 분리되었던 예술 장르들이 통합의 과정을 거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앞의 박상천은 <문학의 위기, 문학의 전환>에서 이런 현상에 대하여 타타르키비츠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면서 앞으로는 오늘과 같은 예술이 통합되어 새롭게 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장르의 예술이 탄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반세기도 전인 1919년에 스타니스라브 이그나치 비트키비츠는 예술의 종말을 예언했다. 심지어 그는 “예술의 몰락 과정은 이미 시작했다”고 보았다. (중략)
비트키비츠는 이렇게 썼다. “어떠한 힘도 이 과정을 멈출 수 없다” 그리고 어쨌든 예술이 없더라도 “행복한 인류는 온전히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밖에 어떤 문제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모든 이론가들이 비트키비츠 처럼 생각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예술을 없애버릴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이 느끼기에 예술은 인간생활과 활동의 과도기적 형식이었다. 생활과 생활의 리듬 속에 예술이 녹아 없어지게 하라고 그들은 말한다.

김성곤도 이미 <문자매체, 전자매체의 공존과 대화>에서 지적한 바 있듯 디지털 시대에는 전문가와 아마추어 사이의 경계가 와해될 것이라고 한다. 문학에서는 그것이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연작소설 또는 작가와 독자의 공동창작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하이퍼 픽션’이라 불리는 후자의 경우에는 독자가 작가의 창작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어 문학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해체되게 될 것이 자명하다.
그런가하면, 문학 연구나 문학 교육 현장에서조차 문학과 타 매체와의 접목이 활발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능성은 물론 디지털의 멀티미디어적―인터렉티브적 속성이다. 디지털의 이런 특성은 그 동안 대립해 오던 모든 것들의 경계를 해체하고 뒤섞고 재구성하며 문학과 영화처럼 같은 예술 장르끼리의 혼합뿐 아니라 문학과 과학, 예술과 산업 사이의 대화까지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변화는 순수를 부르짖으며 기존 문단의 중심에 안주해 기득권을 향유해오던 제도권 문학자들이나 작가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문학의 세속화와 변화는 필연적이라 하겠다.

변화의 시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디지털 문화로의 변화다. 아날로그로 표현된 비디오, 오디오, 텍스트 정보는 서로 논리적 관련이 없이 각각 물리적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디지털은 모든 정보를 동일한 기호로 저장함으로써 정보 통합을 이룰 수 있다. 즉 비디오, 오디오, 텍스트가 논리적으로 통합하여 음성, 문자, 그림, 동영상 등의 데이터를 통합정보의 형태로 구현하는 것이 멀티미디어다. 전기나 기계의 물질적 특성에 의존하는 아날로그와는 달리 기호로 표기하는 디지털 신호는 논리적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달된 정보의 자유로운 활용과 가공이 가능하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기존의 아날로그 매체인 텔레비전과는 달리 양(兩) 방향성을 갖게 되고, 시간적인 제약을 벗어나는 주문형 정보가 가능하게 되는 인간 중심의 휴먼 인터페이스(Human Interface)를 구현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차츰 인간의 지적 영역뿐만 아니라, 감성적 영역까지 정보 형태로 처리하는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발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므로 21세기 한국문학의 변화는 장기적으로 보아 이러한 디지털 매체의 변화에 의해 주도될 것으로 예측된다.
아직까지 사이버 문학이니, PC 통신문학이니 하는 것들이 매체의 변화뿐 기존의 문학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앞으로 디지털 문화의 확산에 따른 문학의 변화는 그런 변화에 머물 것이 아닐 게 분명하다. 즉 디지털문화는 기존의 모든 예술 형태를 혼합함으로서 사람과 예술의 틈새를 극복해 줄 것으로 생각된다.
변화의 시대. 그렇다. 분명 지금은 변화의 물결이 몰려오는 시대요, 우리는 그 파도 위에 몸을 내던진 사람들이다. 더구나 문학을 상정해 놓고 보면, 이런 변화를 무시하고 자신의 독자적 영역만을 확보하여 그 안에서 안주할 수만은 없는 때임이 분명하다. 이는 모름지기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는 말이다. 새 시대는 단순히 과학기술에 의해 이어져 나가는 사회가 아니라, 시적 상상력과 문학적 창조력에 의해 생명력을 갖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렇기에 ‘스스로 변화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라 하겠다.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다. 이런 생명력을 갖지 못한 것들은 외부적 충격과 환경 변화에 의해 부서지고 파괴되지만 생명체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한국문학은 이런 생명력을 갖기 위해 스스로 변화해야 하는 운명 속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필문학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퓨전 시대의 개막

문학의 위기를 논하는 담론은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문학의 위기라는 비장감에는 경직된 무엇인가가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은 문학이야말로 모든 문화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다.
지구촌은 지금 탈 중심적․다원적인 평등의 세계로 구성되어 가고 있다. 멀티미디어가 의사소통의 핵심적 도구로, 디지털 방식에 의해 세계는 혁신적인 변화를 가속화해가고 있다. ‘문학의 죽음’을 예언하는 변화라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다. 이인성은 그의 <21세기 문학, 또는 식물성의 저항>에서 “21세기의 새로운 문화 구조 자체가 문학의 죽음 위에서 완성될 그 무엇은 아닌가? 기껏해야 멀티미디어 양식의 그 ‘멀티’를 구성하는 한 부속품으로 문학이 전락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21세기에 도래하리라 여겨지는 새로운 문학 환경에 문학이 대처해야 할 방식은 감정적인 호소나 선험적인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작품들을 통해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즉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지금 어떤 작품을 쓰고 또 읽고 있는가? 그렇게 차원이 옮겨진 물음과 함께, 이제 시선은 문학 내부로 향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오늘의 작가들에게 하나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방향에 대한 시사를 하고 있다.
최근 김성곤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말을 들어본다.

21세기에 문학은 스스로의 아집과 패각을 깨고, 타 학문 및 타 장르와의 교류와 대화를 활발하게 진행하는 상호 작용적(interactive) 복합예술이 될 것이다. 그래서 문학과 영상, 문학과 음악, 또는 문학과 미술의 혼합뿐만 아니라, 문학과 과학, 예술과 테크놀러지,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합일 가능성도 문학의 새로운 영역으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문학의 주요 관심사는 이제 생명의 존중, 생태계의 보존, 그리고 인류의 공존 문제가 될 것이다. 인간 중심의 전통적 인본주의는 사라지고 인간이 자연의 일부가 되고 자연과 합일하는 진정한 휴머니즘이 시작될 것이다. 미래의 문학은 개인의 자유와 개체성도 존중하되 인류 절멸을 피하는 공동체 의식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문학은 또한 컴퓨터가 주도하는 무제한의 속도에 대한 성찰과 제동의 기능도 수행할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미래의 문학이 상호 작용하는 복합 예술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문학이 타 장르와 결합되어야 함을 예언하는 말이다. 이런 견해는 이어녕의 견해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이어령은 새 천년 벽두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 마디로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21세기는 통제 불능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국경 안이라고 해도 전통적인 제품의 개념까지도 그 경계가 무너져 전화기에 라디오가 달리고 냉장고에 인터넷이 결합되는 하이브릿드 상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젓가락이 아니라 포크로 스파게티를 먹는 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오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미 우리 앞에 퓨전 시대가 도래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 요즘 아이들은 국수 냉면까지도 포크로 먹는가하면, 콜라에 밥을 말아먹기도 한다. 여기서 스파게티문화를 극대화하고 현대화하면 요즘 유행하는 퓨전 메뉴가 될 것이다. 한식과 양식의 이질적인 요리 시스템을 한데 섞어서 새로운 맛을 창출하는, 그래서 심지어 퓨전(Fusion)을 미래의 비전(Future Vision)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집이 양옥으로 변하고 옷이 양복으로 바뀌는 시대에도 음식만은 밥과 김치로 문화의 전통성을 이어왔지만, 이제는 그 의식주 문화 가운데 가장 보수적인 식문화마저 퓨전화 되고 있다.
앞서의 이어령은 동아일보에 기고한 <이어령의 밀레니엄 메시지>(2000년 1월 1일)에서 다음과 같이 미래사회의 모습을 예고하고 있다.

먹는 음식에서부터 첨단기술에 이르기까지 21세기를 움직이는 키 워드는 탈 경제와 이종배합(異種配合)의 퓨전이다. 20세기는 개체를 시스템화하는 것이었지만 21세기 파워는 육군과 해군을 합친 해병대처럼 서로 다른 개체의 시스템을 공존 공생시키는 힘이다. 그런 힘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지식과 톨러렌스(Tolerance―관용)에서 나온다. 그 톨러렌스라는 말 역시 국수가 스파게티가 된 것처럼 우리 조상들이 가장 많이 써왔던 덕(德)이라는 말의 서구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정치든 경제든 심지어 군사적인 것까지도 덕을 내세운 통치였다. 중국의 삼대 소설이라고 하는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의 주인공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모두 무능해 보이는 사람들이다. 유비 현덕이 그렇고 송강이 그렇고 삼장법사가 그렇다. 그러나 유비 현덕이 있기 때문에 공명의 지혜와 장비의 힘이 한데 어우러져 조조를 이기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탈 경제시대와 같은 21세기의 삼국지, 21세기의 서유기는 장비도 공명도 그리고 손오공도 아닌 관용성―좀 더 우리에게 낯익은 말로 말하면 덕(德)이라는 덕목이다

자못 생경하게 들리는 ‘퓨전’이란 어휘에 접하게 된다. 음식문화에서 비롯한 퓨전이 이미 익숙해진 지금, 우리는 이런 이종배합(異種配合)의 현상을 음식문화만이 아니라 21세기를 움직이는 키 워드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문학의 미래를 두고 볼 때 과연 문학은 어떤 길을 밟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접하게 된다.
이런 변화의 양상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2000년 1월11일 MBC 텔레비전은 뉴스를 통해 음악과 미술이 컴퓨터에 의해 이종(異種)의 요소를 하나의 목적으로 합치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변화의 모습을 방영한 일이 있었다. 대중음악에서의 퓨전은 이미 퓨전 재즈니 음악이라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그럼에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는 보수적인 성격에서 문을 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변화를 수용하기에 시간을 필요로 하는 문학적 특수성 때문이다. 시대는 분명 이종(異種) 배합을 통해 개성을 찾아가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지만, 그런 변화에 둔감한 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은 현실을 반영 한다”는 말만을 금과옥조로 하여 왔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변화의 속도는 엄청난 파고로 우리에게 지금 다가오고 있다. 여기서 문학의 퓨전화를 미래의 방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결국 문학의 퓨전화는 이종 배합(異種配合)으로 혼용, 혼합을 의미한다.

채수영은 그의 논문 <문학의 퓨전화와 시의 미래>를 통해서 견해의 일단을 피력한 일이 있다. 그는 백화점의 예를 들어 말하면서 혼용, 혼합을 퓨전으로 보고 있다.

어느 백화점에는 4층이란 말 대신에 유니섹스란 말을 쓰고 있다. 물론 이 말의 어원은 남녀 공용의 옷을 취급한다는 말이지만, 상징성은 충분한 것 같다. 또한 전통적으로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은 재래적인 관념으로 볼 때, 확연했고 명백하게 구분했기 때문이다. 왜 남녀 공용이라는 말을 써야 했을까는 오늘의 문화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려운 구분이 아니다. 가령 나이 많은 사람들은 이발소를 가야 하는 걸로 알았지만 요즘의 젊은 사람들은 이발소 대신에 미장원에 간다는 사실도 우리 곁에서 변화를 실감하는 일이고, 머리 모양도 이미 남녀를 구분하기 어려운 현상으로 변화했다. 전통적인 것이 무너지는 자리에 이미 혼합 혹은 혼용의 조화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경인문학』, 2000년 제 12집)


이 글에서 채수영은 “이질적인 하이부릿드 문화 속에서 문학의 발판은 순종 고수가 아니라, 착종 혹은 이종(異種) 배합에서 개성을 찾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지만, 문학의 표정은 아직도 지난 세기의 표정을 짓고 있는 슬픈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이미 문학에서 퓨전은 시작되고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이런 문학에서의 퓨전은 혼성 모방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문학에서의 혼성 모방(混性模倣)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이종배합 즉 혼성 모방은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져왔다. 음악과 미술이 컴퓨터에 의해 이종 배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변화의 물결은 앞으로 문학과 음악, 문학과 미술 외에도 여러 장르에서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주로 문학이 다른 장르와 어떻게 이종 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런 발상은 우리가 지금 변화와 변혁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얼마든 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니 그것은 필연적 변화의 물결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변화가 지금 우리로 하여금 발상의 전환과 고정 관념에서의 탈피를 촉구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21세기에 도래할 새로운 문화 환경에 문학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방식에 감정적인 호소나 선험적인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제 작품을 통해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이 쓰이고 또 읽히고 있는가? 이제 시선을 문학의 내부로 돌려본다.

이인성은 앞에 말한 <21세기 문학, 또는 식물성의 저항> 이라는 글에서 영화적 소설을 예로 들고 있다. 즉 최근에 번창하고 있는 듯한 이런 경향은 멀티미디어적 문화 양식의 한 표본인 영화를 보는 듯한 읽히는 소설을 말한다. 이는 단순하게 영화적 이미지나 영화적 장면 묘사를 빈번히 사용한다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사실 문학이 그런 기법들을 차용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기본 구성에서부터 세부적인 서술 방식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영화적인 효과를 창출하려는 듯 보이는 기법이다. 문제는 혼성 모방적 소설에 있다. 이인성은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른바 <혼성 모방적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경향, <구조주의적 활동> 이후 문학뿐 아니라 여러 문화 장르에서 유행하고 있는 이 혼성 모방은, 대중음악 비평을 하는 한 후배가 가르쳐 준 바를 따르면, 디지털 방식-체계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반영하는 양태라고 한다. 디지털 체계는 인류의 모든 유산을 단순 부호로 정보화한 후 무한히 자유롭게 조합해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문화적 장치이다. 60년대의 비틀즈 노래든 90년대의 니르바나 노래든 한 번 입력하면 시간․공간의 차이를 넘어 함께 혼합․재구성될 수 있는 기호로 해체되는 것이다. 혼성 모방은 그 조작을 즐기면서 그것이 새로운 의미의 형태로 솟아오르기를 바란다. 당연히 문학에서도 그런 작업이 가능하리라.
―이인성, <21세기 문학, 또는 식물성의 저항>에서

이어서 그는 베낀 구절들만이 그럴 듯하게 짜깁기한 소설의 시도를 소망하고 있다. 여기서 모방은 자칫 표절 시비를 불러올 소지도 있겠지만, 그는 표절을 인용으로 바꾸고 그 인용들 사이의 관계망(關係網)을 짠 행위가 그 자체로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아무리 위대한 작품도 그야말로 ‘무’에서 창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1995)을 쓸 때 나를 사로잡았던 문제가 그런 것이었다. 거기서, 그런 생각은 매우 의식적인 방법론으로 전환되어 있다. 나는 52개의 이야기 매듭 앞에 52개의 시구를 인용하며, 그것들이 이야기와 어떤 관계로 얽히는가를 뒤쫓아보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미리 구성되지 않았다. 이야기가 시를 부르고 시가 이야기를 바꾸며, 때로는 껴안고 때로는 밀치고 때로는 뒤집으며 그 소설은 흘러갔다. 그 과정에서 내가 유념한 것은, 그 모든 과정을 자기의 살로 받아들이고 움직여 가는 한 주제―작중 시인 ―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나는 문학적 관계를 살아가는 것과 현실적 관계를 살아가는 동질이형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판단에, 그 두 삶을 떠받치는 것은 지극한 구체성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명제가 보여주는 본질론적․원형론적 환원의 방향을 정면으로 거슬러 간다.

라고 하여, 혼성 모방적 글쓰기의 예를 제시하고 있다.

자, 그렇다면 과연 문학 특히 수필문학에서의 퓨전화는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필자는 최근에 수필작가 조재은의 수필집에서 이 같은 퓨전 수필의 실험적 작품들을 감상한 바 있었다. 이런 변화에 둔감한 수필문단에 최근 수필작가 조재은이 발표한 수필집 <<하늘이 넓은 곳>>은 퓨전 문학의 시금석이 될 만한 발상의 전환을 보인다는 점에서 눈 여겨 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민엽은 <21세기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작가의 글쓰기를 헤엄에 비유한 일이 있다. 그는 오늘의 작가는 늪 속을 유영(遊泳)하는 자라고 하면서 “문학과 관련되는 모든 것들이 극도로 불투명해져 있고 그 불투명한 액체성의 공간 속을 오늘의 작가는 헤엄친다. 그 불투명한 액체성은 한없이 끈끈하기만 하다. 문화산업과 멀티미디어, 사이버 스페이스가, 그리고 그것들을 움직이는 후기산업사회의 자본과 권력이 강한 접착력으로 그의 헤엄치는 동작을 옭아맨다. 그 불투명에 눈멀고 그 끈끈함에 속박되어 그의 헤엄은 너무도 힘겹다. 그러나 힘에 겨워 그가 헤엄을 멈추는 순간 그는 저 깊은 늪의 바닥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는 죽어 썩어서 늪에 동화되어 버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변화에 민감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 말로 우리가 새겨둘 만한 말이겠다.
확언하건데, 이런 변화에 민감한 작가야말로 세 시대를 이끌 것은 틀림이 없다. 사이버와 퓨전에 젖기 시작하는 21세기의 독자를 유인하기 위해서는 문학이 바로 이런 변화에 민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출처 : 소향 정윤희 문학의 쉼터
글쓴이 : 所向 정윤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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