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거창한 詩쓰기

배선옥 2013. 3. 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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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想像)은 예술의 한 방편


상상과 허구는 구별되어야

한동안 우리 수필문단에 ‘허구론’이 쟁점으로 등장했던 때가 있었다. 한편 ‘경수필’의 필요가 대두되기도 했다. 이는 수필의 예술성을 높이고, 수필의 영역을 넓히려는 노력이라서 관심을 모았다.
수필에 있어서 ‘상상’은 결코 새로운 이론이나 시도가 아니다. 그동안 구상이나 수사의 한 방편으로 쓰여 왔건만, 수필이 본 궤도에 오르면서 수필을 ‘정(情)의 미학’, ‘사실(事實)의 문학’ 으로 규명한 나머지 ‘허구’나 ‘상상’ 등의 술어를 만나면 알레르기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과 ‘허구’는 구별되어야 한다. ‘상상’은 과거를 회고하거나 객관적 사실을 재현하는데 빌려야만 하는 예술 효과요, 예술 방법의 하나다. 여기서 어떤 대상에 대한 재현(再現)적인 성격에다 미래에 대한 제시(提示)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긍정해야 한다.
무릇 문학이 자기의 실제적 체험만을 존중하고 소재와 범위를 실사에만 한정한다면 자기 중심적 협착(狹窄)한 세계에 그치고 말 것이다. 경우에 다라 남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남의 주장을 내 주장으로 끌어들일 때 체험의 확대는 물론 소재의 다양상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체험의 확대나 소재의 다양화는 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요는 시간적으로 고금을 끌어들이는 일이나, 공간적으로 원근을 접촉시키는 일 등이 상상을 통해 붓 끝에 실현될 수 있다.
중국, 최초 최고의 문학이론가인 남조(南朝)의 유협(劉勰)은 그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특히 ‘신사(神思)’한 항목으로 문학의 상상에 관한 원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고인의 말에 ‘몸은 비록 먼 바다를 거닐면서도 마음은 조정을 그린다.’고 했다. 바로 상상력의 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글을 쓸 때 구상에 있어 상상력의 작용은 몹시 크다. 조용히 생각을 모으면 상상은 천년이란 시간대를 오르내리고, 고요히 가다듬으면 상상은 만리란 공간대를 들락거릴 수 있다. 글을 읊노라면 구슬 같은 원숙한 소리를 내고 눈앞에 풍운의 빛을 말았다 폈다 할 수 있으니 이게 상상력의 극치가 아닐까? 그래서 상상은 인간의 내재 심령이 외계의 사물과 만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상상의 성격과 작용을 이같이 말했는데, 상상이 창작에 있어 내재와 외계를 접촉케 하는 작용임을 설파했다. 동시에 고금의 시간대를 통달시키고 원근의 공간대를 교통시키는 말하자면 초월의 힘도 축약의 능력도 지닌 것이다.
따라서 ‘상상’은 어느 창작물의 주제나 중심 스토리일 수 없다. 어디까지나 어는 주제나 주체를 위한 이용물이요 구성상의 지엽(枝葉)으로 예술 효과를 위한 한가지 방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이 비록 ‘허구’와 비사실적인 면에서 성격을 같이 했을지라도 그 쓰임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다. 그러므로 상상은 필요하되, 허구의 필요는 부정하게 된다.
수필에서의 상상과 고전(古典)

수필은 사실과 개념에 바탕을 두고 의식적이요, 지성적인 구성이 있을 뿐 사실이 없는 수필은 존재할 수 없다. 비약이나 과장이 있어도 무방하다. 정의 범람이나 환상의 픽션이 있어도 수필의 격을 낮출 뿐 금기는 아니다. 그러나 허구는 금기다. 그것은 모든 예술이 픽션인데 반해 오직 수필만 픽션이 아니란 데서 그 증거가 있고 그 어려움이 있다. 수필에 허구를 용인했을 경우를 생각하면 알 일이다. 수필은 산문시와 콩트, 단막극, 동화 등과 무대를 같이하는데 그 특성 발휘가 어렵거나 스스로의 설자리를 잃어, 결국 위기를 맞게 될 것이요, 수천 년 동안 선비가 다져온 자기표현의 수단을 포기하는 상실에 직면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과정을 지킨다. 그러나 수필이 단순한 사실 기록에 머물 수는 없다. 그 사실이 감동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감동적인 전달을 위해 예술적인 표현을 개발해야 한다. 그 예술적인 표현의 한 방편으로 ‘상상’을 마다하지 않는다.
‘장자(莊子)’는 전국시대 최고의 에세이다. 그 첫 편 「소요유」의 문을 열면서 장자는 붕(鵬)d라는 상상 속의 새를 등장시켰다. 그는 한번 마음먹고 날면 그 날개가 구만리나 높이 올라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다고 했다. 그래서 바람을 타고 등에는 창공을 업어 아무 것도 걸리는 게 없이 훨훨 남극으로 날아간다고 형용하였다.
장자는 이토록 터무니없이 큰 새를 상상함으로써 그 마음이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세속을 초탈하여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상징으로 설정한 것이다. 곧 붕조라는 상상은 철저한 자유라는 테마를 위하여 예술적인 표현의 방편이 된 것이다.
진(晋)나라 때 시인 도잠(陶潛)은 인류의 이상향을 그린 ‘도화원기(桃花源記)’한 주옥의 수필을 남겼는데 그것은 상상의 구성이었다.
“동진때 무릉 땅에 고기잡이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쪽배 하나 시내에 띄우고 그는 노를 젓다가 그만 길을 잃었고, 아차 하는 사이 복사꽃 우거진 수풀을 만난 것이다.…”

이렇게 막을 연 ‘도화연기’는 실록을 방불케 했다. 시간과 공간이 기록되었고 그 동작의 묘사가 핍진했다. 도저히 상상의 기록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공상의 기록이 아니라 저자의 위험천만한 시국과 사회에 대한 저항이요, 평화와 행복에 대한 기원인 것이다.
당(唐)나라 때의 시인이요, 수필가였던 두목(杜牧)은 그의 절세작인 ‘아방궁부(阿房宮賦)’를 남겼는데, 그것 또한 상상을 통한 기록으로 진시황 당시 궁전 건축의 호화로움을 비롯, 궁녀들의 자태며 재화의 축적상을 재현시켰다. 그것 또한 단순한 진시황 부패의 기록이 아니라 진시황의 음일(淫佚)을 통하여 그 비인도성을 폭로했고, 항우(項羽)의 불질로 한 조정이 잿더미로 바뀌는 역사적 교훈을 보인 것이다.
‘소요유’의 경우, 상상의 폭이 국부에 불과했지만, ‘도화원기’나 ‘아방궁부’의 경우, 상상의 폭이 훨씬 확대된다. 그러나 ‘도화원기’는 전래의 전설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아방궁부’는 역사 속의 사실을 형상화했는데, 이를 허구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더구나 ‘자아’를 허구화한 것은 아니었다.


상상은 수필의 예술성을 높인다

상상은 인류 사고 활동의 기본이다. 인간의 주체 자신에 축적된 지식, 정보가 외계의 새로운 사물과 접촉했을 때 일어나는 모든 심리작용을 말한다. 그게 잠재했다가 재현하였을 때 우리는 그를 환상이나 몽상으로 일컬으며, 그게 구체적으로 발전했을 때 우리는 그를 연상이나 암시라 한다.
말하자면 상상의 잠재화나 구체화에 따라 환상이나 연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들은 모두 수필 구성에 있어 심미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김태길은 <대열>에서 꿈 얘기 두 가지를 엮었다. 하나는 동서로 뚫린 길의 한복판 2층 유리창에서 내려다보고는 두 가지 대열의 대립과 투쟁이요, 하나는 아이들의 줄넘기에 뛰어들다가 나뒹굴어진 낭패였다.
마지막 서너 줄 말고는 모두 꿈 얘기였는데 읽는 동안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 같다. 곧 현실적인 꿈인지 분간할 수 없는 몽롱한 의식 상태로 독자를 끌어들이면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죄다하고 있다. 좌우로, 여야로 갈려 싸움질하는 정국, 그 정국과 현실이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어 고민하고 방황하는 1974년의 한국 인텔리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꿈이 현실의 재현현상이라는 심리학적 해석 말고도 꿈 자체의 사실성과 의식 분석의 깊이를 인정해야 한다.

피천득은 그의 대표작 <인연>에서 연상이란 의식 작용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공존시켰다.
그는 춘천 소재의 성심여자대학에 출강했던 이야기로부터 시작했는데, 춘천 이야기는 서두에 그칠 뿐, 그 대부분의 줄거리는 ‘성심’이란 학교 이름이 연상 작용을 촉발, 옛날 동경 유학 시절 하숙집에서 알게 된 아사꼬라는 소녀와의 길면서도 정겨웠던 지난날을 회고한 것이다.
춘천에 대한 이야기를 거두절미해도 무관하련만 굳이 그로부터 출발한 것은 주체의 시간과 공간은 분명히 오늘의 서울이면서도 그 의식이 수십 년 전의 동경에 잇다는 사실을 동시에 엮으려는 것이다.
특히 지은이가 세 번째 아사꼬를 찾았을 때,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을 보곤 옛날 아사꼬와 함께 이런 집에서 살자고 한 말을 회상하면서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꼬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소박하게 술회한 것은 정말 밉지 않다.
<대열>이 의식의 잠재화라면, <인연>은 상상의 구체화다. 우연히 회고적인 성분이 많았지만 상상의 작용은 현재와 미래에도 미치기 마련이다.
지난날의 예술이 사실적(寫實的) 인 형사(形似)를 요구했다면 오늘의 예술은 사실 외에도 형사를 요구하지 않는 사의(寫意)의 경지를 용납하고 있다. 그것은 추상, 비구상으로 때로는 여백으로 처리되고 있다.
그 추상이나 비구상, 여백 등이 수필에 있어 상상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것들이 있어 주체를 보다 효과 있게 부각시키고 여운을 통해 예술의 효과를 높이듯 수필의 사실성이나 진실성도 상상의 점철을 통해 심미의 효과를 증대시키고 있다. (허세욱, 「수필문학」, 90-7월호 참조)











◇합평자료◇ 혼자 먹는 밥 / 염혜정


혼자 밥을 먹으면 아무 것도 차리지 않고, 냉장고에 들어있는 반찬도 다 꺼내지 않고 그저 밥 한 공기를 넘기기에 적당할 만큼의 염분과 씹을 거리만 있으면 된다.
하루 일을 끝내고 한 시간 반에 걸쳐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아무 생각도 없다. 하루 종일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에서 몸이 얼었다가 집에 오면 이상하게 지친다. 아침에 일어나려면 굳어 있는 어깨와 팔을 움직이기 힘들 정도이다.
남편 소원대로 너른 집에 왔지만 난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마루가 넓어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려면 작아서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화면 가까이에 다가가서 마룻바닥에 앉는다. 새로 산 소파를 놔두고 마룻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 보는 텔레비전이 재미있을 리 없다. 다큐멘터리나 본다. 이사 가자고 조른 남편이 원망스러워진다.
작은아이는 벌써 개학을 해서 기숙사에 들어가고 큰아이는 여름이 가기 전에 일본을 잘 보고 싶다고 친구와 여행을 떠났다. 여름에 한국에 와서 영어학원에서 영어 강사 노릇을 하는, 겉만 한국 사람이고 속은 미국인인 시조카도 오늘밤은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 남편은 여전히 늦고.
혼자 마루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놓고 그 앞에 작은 상을 놓고 앉아 밥을 먹는다. 마치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듯이, 앞사람의 좌석 등받이를 보듯 화면을 대하고 입으로 밥을 연신 부어 넣었다. 드라마는 보나 안 보나 같다. 신문에 대강 줄거리가 나오니까 지나고 나면 직접 본 것이나 신문으로 예습한 것이나 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안 봐도 큰일 날 일도 없으니.
아이들이 집을 떠나기 전에 좀 너른 집에서 인간답게 살아보자 했는데, 어느새 아이들은 집을 떠난 지 오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은 짐이 많아 좁다고 느꼈던 옛집에서 이미 다 살아버린 것 같다. 식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집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산단 말인가. 어쩌다 밥을 해서 먹으라고 아이들을 부르려면 내 목소리는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방 앞에 가서 노크를 하고 들어가 말해야 한다. 아이들이 식탁에 앉아도 별 말이 없다. 사내아이들이라 엄마를 봐도 안 봐도 말이 없다. 번개같이 밥을 입에 쏟아 넣고 다시 자리를 떠나버린다. 마치 기숙사의 식당과 같다. 따라 가보면 각자 방에 들어가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 매신저를 하는지 연신 낄낄대며 손가락은 자판 위를 날고 있다. 과일도 작은 접시에 담아 각 방으로 ‘배달’을 한다.
난 한 때 내가 사육사 같다고 뇌고 다녔다. 열심히 먹이는 것이 내 역할인 것 같았다. 우리집은 일주일에 한 번씩 엄청난 양의 장을 보는 집이었다. 엥겔지수가 높았다. 잔뜩 차에 싣고 와서 아이들을 핸드폰으로 불러 내린다. 그러면 두 녀석이 내려와 말없이 장 본 짐을 번쩍 들어 8층까지 날랐다. 아들을 둔 보람을 그때처럼 느낄 수는 없었다. 듬직한 아들들이다. 아들 둘이 각자 양손에 여러 꾸러미의 쇼핑백을 꿰어차고 앞장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할 때, 내 마음은 뿌듯했다. 사육사면 어떠한가. 그런데 이젠 사육사가 아니고, 기숙사 사감도 아니며, 차라리 여관지기인 것 같다. 불평을 했지만 아이들이 내는 소음과 가끔은 성가시고 힘에 부치던 뒷바라지가 그동안 잘 커주고 내게 살아갈 이유와 용기를 주었던 아이들의 존재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아이들이 주스나 우유만 먹고 나가는 것 같아도 난 여전히 일주일치의 식량을 사다가 나른다. 함께 오순도순 모여 앉아 저녁을 먹은 기억이 별반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먹는지 매주 사 나르기는 계속이다.
이미 지나간 옛집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해 봤자 나만 손해다. 이젠 혼자만의 시간, 그토록 고대해왔던 적요의 시간이 바다같이 내 앞에 열려 있다. 난 작은 아이의 빈방에 들어와 그 아이의 컴퓨터 앞에 앉는다. 아이가 집에 오는 주말엔 얼씬도 못하는 기계 앞이다. 이제 좀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적응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빌면서 진정 홀로 서기에 나서야함을 깨닫는다.
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서늘한 바람이 벌써 9월이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알려준다. 이 혼자만의 시간, 이 순간이 아쉽고 소중하다. 내 삶도 9월이다.

(「현대문예」,2004-제14집, PP.47-50.)
□ 작품 평설 □


이 수필은 생활수필의 한 전형을 보인다. 수필문학은 살아가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런 일상적 화소는 자칫 독자를 식상하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손에서 책을 놓게 하기 쉽다. 실상 우리 주변에는 이런 독자를 매혹시키지 못하는 그저 고만고만한 이야기들이 널려 있다. 좋은 수필은 우선 독자를 매료시켜야 한다. 어디서 이미 보았음직한 평범한 화소는 독자를 긴장시키지 못한다.
수필은 태생적으로 1인칭의 자기 관조, 자기 반영의 문학이면서 자아 성찰의 문학이다. 그러므로 어차피 그 일상성을 뛰어넘기는 힘들다. 더구나 체험의 한계란 결국에는 고만고만한 이야기 중심에 벽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수필의 한계일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수필은 이런 벽을 뛰어넘는 ‘낯설게 하기’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염혜정의 수필 <혼자 먹는 밥>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왜 독자를 유인하는가? 아픔은 공유할수록 덜어진다고 했다. 똑같이 살아가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속살을 비집고 가슴속에 안기는 이유는 바로 작가와 독자 사이의 공감대의 형성에 있을 것이다. 이를 언어의 미학이라 하면 성찬일까.

화자는 지금 혼자 밥을 먹는다. 냉장고의 반찬도 꺼내지 않고 그저 밥 한 공기와 적당한 염분이나 씹을 거리 정도로 저녁을 때운다. 그렇다. 그에게는 저녁식사가 그저 한때를 때우는 일과에 불과하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귀가한 가족들이 둘러앉아 즐거운 식사를 하는 그런 저녁이 아니어서다. 여기서 화자의 일상의 권태와 갈등이 촉발된다. 세 개의 축으로 진행된다.
그 하나는 가족이 있으되 혼자라는 사실에의 확인이다.

혼자 마루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놓고 그 앞에 작은 상을 놓고 앉아 밥을 먹는다. 마치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듯이, 앞사람의 좌석 등받이를 보듯 화면을 대하고 입으로 밥을 연신 부어 넣었다. 드라마는 보나 안 보나 같다. 신문에 대강 줄거리가 나오니까 지나고 나면 직접 본 것이나 신문으로 예습한 것이나 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안 봐도 큰일 날 일도 없으니.

화자의 이런 저녁식사 장면을 한 번쯤 상상해 보라. 작은 아이는 기숙사에, 큰아이는 여행 중이고, 남편은 여전히(?) 늦고. 파김치가 되어 직장에서 귀가한 아내가 홀로 저녁식사를 한다. 이미 지쳐버린 그가 혼자 먹기 위해 저녁준비를 하겠는가? 하여 있는 대로 통과의례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가족이 있지만 지금은 혼자다. 혼자 먹는 저녁이다.
둘째로 인간다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다. 인간답게 살자고 이사한 너른 집이건만, 화자에게는 그다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아니한다. 삶의 의미에 대한 각성이다.

남편 소원대로 너른 집에 왔지만 난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마루가 넓어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려면 작아서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화면 가까이에 다가가서 마룻바닥에 앉는다. 새로 산 소파를 놔두고 마룻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 보는 텔레비전이 재미있을 리 없다.

혼자 보는 텔레비전이 그렇고, 새로 산 소파도 그에게는 그다지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 마룻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혼자 텔레비전을 본다. 재미있을 리가 없다.
셋째는 가족이 있으되 혼자라는 공허감이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기 전에 좀 너른 집에서 인간답게 살아보자 했는데, 어느새 아이들은 집을 떠난 지 오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은 짐이 많아 좁다고 느꼈던 옛집에서 이미 다 살아버린 것 같다. 식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 집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산단 말인가. 어쩌다 밥을 해서 먹으라고 아이들을 부르려면 내 목소리는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방 앞에 가서 노크를 하고 들어가 말해야 한다. 아이들이 식탁에 앉아도 별 말이 없다.

이렇게 이 수필의 화소의 축은 세 개의 코드로 되어 있다. 가족이 있고 인간답게 살자고 택한 넓은 집이건만, 화자는 혼자라는 사실에 새롭게 눈뜬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의 직시를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세 개의 이야기 축은 이 수필에서 충격에 해당한다. 화자는 어느 날 느닷없이 자신을 찾아온 이 충격적 사실을 통해 이를 분석해내고 통합한다. 그 통합이 바로 자신을 ‘사육사’로 ‘기숙사 사감’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새로운 깨달음이 지극히 보편적이고 평범함 속에서도 존재의 문제를 규명하고 하는 문제에 천착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고독과 회의 그리고 불확실한 정체성 찾기에서도 이를 초월하는 삶의 건강성을 발견한다. “아이들이 내는 소음과 가끔은 성가시고 힘에 부치던 뒷바라지가 그동안 잘 커주고 내게 살아갈 이유와 용기를 주었던 아이들의 존재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가 그러하며, “함께 오순도순 모여 앉아 저녁을 먹은 기억이 별반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먹는지 매주 사 나르기는 계속이다.”가 그러하다.
이는 화자의 새로운 현실에의 적응이면서 정체성 찾기에 해당할 것이다. 만일 이 수필이 이런 건강성을 귀결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만일 수필이 그러하다면 독자는 이 글에서 떠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적응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기를 빌면서 진정 홀로 서기에 나서야함을 깨닫는다.”는 언술의 의미화를 통해 독자는 최초 지녔던 이 수필의 긴장으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만끽하게 된다. 더구나 “이 혼자만의 시간, 이 순간이 아쉽고 소중하다. 내 삶도 9월이다.”라는 결미에 이르면 화자의 고뇌의 한 축에 동참했었다는 기쁨마저 누리게 된다.
그렇다. 정체성의 확인. 이 수필의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수필문학의 묘미는 바로 이런 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좋은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제재를 어떻게 통합하고 의미화해 내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똑같은 일상이지만 이를 의미화해 내는 작가의 솜씨에 따라 문학이냐 아니냐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출처 : 소향 정윤희 문학의 쉼터
글쓴이 : 所向 정윤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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